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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②-개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7 [13:35]

삶의 향기②-개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7 [13:35]
 

삶의 향기②

개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9년 전 ‘사람의 둥지(공동체)’를 설립할 자리를 물색하고,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려고 강원도 홍천의 솔골에 들어가 어느 폐가를 빌려서 4개월 정도 생활한 적이 있다. 솔골은 내촌면 화상대리의 6~7호가 거주하는 조용한 자연부락이다.

이 동네에는 영춘이라는 전신 지체장애를 가진 10대의 소년이 있었다. 솔골 입구에 내려서 우측에 보이는 제각의 고샅길을 따라 30미터쯤 올라가면 언덕 밑에 있는 쇠락한 기와집이 영춘이와 그의 어머니가 사는 보금자리다. 영춘이는 처음에는 땅을 기어 다니다가 조금 나아져 지팡이를 짚고 위태롭게 다닌다고 했다.

영춘이는 어울릴 친구도 없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주민도 없었다. 내가 친근하게 대해주자 영춘이는 곧잘 나에게 찾아왔다. 우리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누어 먹고, 시간 나는 대로 같이 지냈다. 이윽고 영춘이는 나의 집에 오는 것이 낙이 되었다. 사람들은 버릇 나빠진다고 먹을 것도 주지 말고 쫓아버리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 날 어둑해질 무렵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하여 영춘이를 집으로 데려다 주려고 곁부축해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영춘이는 한 걸음씩을 옮기고는 나에게 몸을 의지한 채 한참동안 꼼짝하지 않아 무척 답답했다. 그래서 지루해진 나머지 밭길에 서서 노래를 불러주자 갑자기 지팡이를 버리고 밭으로 쓰러지더니 데굴데굴 구르며 괴성을 질러댔다. 그 괴이한 행태를 보고 무척 당황했다. 조금 전 땅콩을 준 것이 체해서 그런 줄 알고 조바심이 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영춘이에게 최고 기쁨의 표현임을 알아차렸다. 밭에서 괴성을 지르며 뒹구는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춘이는 또 한 번 나를 감동시켰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나무를 한 짐 해서 부엌에 들여놓은 것이다. 집 옆의 산자락에는 영춘이가 기어 다니고, 온몸으로 미끄럼 탄 자국이 선명히 나있었다. 낫으로 자른 뾰족한 나뭇등걸 때문에 성한 사람도 함부로 다니지 못할 위험한 곳에서 어떻게 나무를 해놓았는지 아찔했다. 아침에 와서 점심도 안 먹고 나무를 했다고 한다.

솔골에는 영춘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소녀처럼 명랑한 50대의 김씨 아주머니다. 내가 하이디라고 별명을 붙인 김씨 아주머니는 몸이 약해 요양지를 물색하던 중 솔골이 마음에 들어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녀는 전직 대학교수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매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청소년기를 막 벗어나고 있는 영춘이가 담배 피우는 것을 알고 영춘이에게 담배를 사준다고 했다. 영춘이는 그 담배를 참 맛있게 피운다고 한다. 나는 그 장면을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영춘이를 꼭 껴안고 등을 토닥거리며 사랑해 주면 영춘이의 기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여러 번 보았다. 그녀와 영춘이의 관계는 나보다 훨씬 오래됐다.

그런데 솔골에는 영춘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외지에서 들어와 이층집을 짓고 사는 60대 초반의 고씨 성을 가진 아저씨다. 그는 이곳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돼 있었는데 사람들이 왜 그를 싫어하는지 나도 경험했다. 한 번은 그와 맞닥뜨려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하여 무안해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난 적이 있다.

영춘이는 나와 재미있게 놀다가도 고씨 집을 지나칠 때는 그의 집에 눈길을 흘기곤 했다. 어느 날은 고씨가 보이자 대뜸 "야, 이 새끼야!"하고 욕을 했다. 깜짝 놀랐다. 언어장애가 있는 영춘이가 그토록 또렷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어른에게 욕을 하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나중에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그 얘기를 전했더니, 영춘이가 고씨 집에 놀러라도 가면 먹을 것을 주기는커녕 욕하며 발길질을 하여 내쫓곤 했다는 것이다.

그 후 급박한 가정사로 인해 친밀하게 지냈던 하이디 아주머니와 영춘이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그곳을 떠나왔다. 영춘이는 지금 20대 후반의 청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솔골에서 영춘이와 함께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다 보니 어느 선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짖어대자 화가 나서 개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개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한참 후에 깨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이웃집에 입양(?)보냈다는데, 이 개가 다른 사람들은 잘 따르면서도 유독 옛 주인인 선배를 보면 미친 듯이 짖어댄다는 것이다. (이승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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