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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종교에 대한 ‘원시적 통찰’ (1)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5 [17:37]

문명·종교에 대한 ‘원시적 통찰’ (1)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5 [17:37]
 

문명·종교에 대한 ‘원시적 통찰’ (1)

마음공부 달인은 밀림의 미개인이다?


종교적 비유로만 알아왔던 타락(Fall)이란 걸 놓고 어떤 인류학·역사학자들은 인류의 실제 역사적 경험으로 규정한다. 1만년 전 수렵채집에서 농업시대로 막 접어들었던 선사시대인이 타락 경험의 주인공들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목가적 이미지의 농사짓기란 실은 문명사의 대재앙이었다. 파종, 곡식 빻기, 맷돌 돌리기 등 반복노동에 따라 척추 디스크 손상이나 골반·무릎 이상을 가져왔다. 그게 1만년 전 시리아 아부후레이라 지역의 인골(人骨)들을 분석한 결과 내려진 결론인데, 뒤늦은 1000년 전 옥수수 농업을 시작했던 북미 원주민들에 대한 연구결과도 마찬가지란다.

몇 해 전 정신과의사 존 슈메이커의 멋진 책 『Are You Happy?』(번역서 제목이 그렇다)을 우리말로 옮기며 나는 여러 번 무릎을 쳤다. 생각해보시라. 농사짓기를 시작한 선조들은 이내 ‘시간의 덫’에 빠져버렸다. 과일 줍고 사냥하는 등 출렁이는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던 그들 앞에 해시계 발명(5500년 전후)을 전후로 시간 맞추기(on time)라는 개념의 노예가 됐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살던 그들이 부스러기 시간 앞에 노출된 채 내일 먹을 곡식 등 앞날에 대한 걱정을 머리에 이게 된 것도 이때다.


“시간이 등장하기 이전 인간의 삶은 철두철미 현재에 집중됐다. 세상은 무시간적인 짜임새(timeless fabric)속에서 돌아갔다. 코앞의 영원한 현재에 몰입해 살았기 때문에 감각이 활짝 열린 채로 주변상황을 즉각적으로 감지해냈다.”(102쪽 요약)


현대의 합리주의보다 훨씬 근사한 ‘야생의 사유방식’에 매료됐던 철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도 그렇게 봤지만, 슈메이커는 한 걸음을 내딛어 선불교의 핵심을 육박해 들어간다. 이런 얘기다. 농사를 시작한 인간은 언어의 덫에 함께 빠졌다. 언어란 결국 추상적인 얼개다. 예전까지 감각을 활짝 연 채 받아들였던 구체적 체험을 붙잡아놓기 위한 임시방편의 도구다. 이제 시간·언어의 덫에 빠진 인간들은 흔적과의 헛된 놀이를 할 뿐이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추상화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불가능해진 상황인데, 놀랍게도 선사시대인들이야말로 마음공부의 달인이었다. 비약이 아니다. 저자의 다음 말을 보라.


“그것이야말로 선불교에서 말하는 마음 다함(mindfullness *틱낫한 스님의 용어다)의 핵심이다. 그게 행복의 원천이다.”


얼마 전 벼락 치듯 만난 신간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부제 ‘일리노이주립대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가 2년 전의 그 책을 환기시켜줬다. 그 책은 브라질 소수종족(피다한) 이야기인데, 요즘 나는 이 보석 책에 푹 빠졌다. 슈메이커 책의 울림을 고스란히 가진 이 책은 한 소수민족에 대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생생한 보고서인데, 이를 통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통과의례나 장식품·숫자개념도 없고, 마을추장도 없으니 권력의 흔적조차 없는, 원시 그 자체의 피다한 사람들과 우리 현대인 중 누가 더 행복한가를 되뇌게 했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 책을 우화집·행복론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나의 경우 위대한 종교철학서로 다가왔다. 기적적으로 시간의 덫, 언어의 덫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21세기의 한복판을 사는 피다한 족은 삶의 진실을 전하는 선지자라는 판단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처음에 선교 차 이곳에 찾았다는 저자(다니엘 에버렛)은 더 했다. 그는 30년 고민 끝에 기독교신앙을 던진다.


“피다한 족은 풍요로운 내면을 지녔으며,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린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진리를 설파하고 삶을 바꾸도록 강제할 것인가? 우리는 종교와 진리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도 행복할 수 있다.”(446쪽)


왜 그럴까? 나는 이 책 뒤에 메모를 했다. 나 혼자 ‘있다 없다’ 게임을 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있고, 피다한 종족에게 없는 것을 대충 꼽아봤더니 저들은 자살, 창조설화, 원죄의식, 미래걱정, 신, 장신구, 소유, 숫자개념, 가난의 개념 등이 없었다. 그렇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던 “문명이 억압한 지층”이 송두리째 없다. 대신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거의 무진장이다. 매일 매일, 그리고 순간순간에만 충실한 삶에서 오는 만족감에 젖어 사니 가히 ‘무진장’이다. 무진장하게 있는 것 가운에는 널널한 성적 자유를 포함하는데, 더 눈여겨 볼 점은 불륜을 둘러싼 해결 방식이다.


일테면 이미 결혼한 남녀도 좋은 상대를 만나면 며칠 간 밀림에 들어가 섹스를 하고 나온다. 새로운 남녀는 그대로 헤어질 수도 있고, 이혼과정을 거쳐 새로운 짝짓기에 돌입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건 그에 따른 징계나 근신이 왜 없겠나? 하지만 그런 행위를 한 상대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나 폭력 행사는 없다. 그런 짓을 한 상대를 집안에 하루 종일 가둬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툭툭 쥐어박기도 한다. 하지만 분노의 표출 대신 피다한 사람들은 상대를 쥐어박을 때도 “능글맞게 크게 웃는 것이 전부”(186쪽)란다.


이 대목을 보고 유교 윤리의 잣대를 가지고 핏대 내는 독자분도 없지 않겠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유교라고 하는 ‘습득한 윤리 도덕의 감정’이 없는 사회가 매우 탄력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있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결정적으로 내가 놀란 것은 피다한 사람들은 때로는 예전까지의 자기를 몽땅 버리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능력이다. 물론 이름을 바꾸며, 다른 사람인양 행세한다. 새로운 신령을 만났거나 하는 등 커다란 환경의 변화 앞에서 그들은 기꺼이 그렇게 한다. 이게 내가 그들을 ‘마음공부의 달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왜? 현대인들은 자기(에고)에 대한 집착이 너무 심하다. 그걸 자기 정체성이라고 부르며 떠받드는 문명이다. 하지만 정체성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시라. ‘기억의 다발’인 의식이 만들어내는, 실체가 없는 헛것에 다름 아니라는 게 많은 종교적 깨우침의 핵심이 아니던가? 사실 근대 이전에는 모두가 그랬다. 우리 선조들이 많은 아호(雅號)를 가졌던 게 그 흔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가톨릭에서는 거듭나는 체험인 영세를 받으면서 새 이름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피다한 사람들의 지혜에 나는 새삼 탄복을 한다.


나이 50대인 내가 앞으로 뭘 할까? 사나이로 태어났으니 종교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친구들에게 호언을 해왔다. 물론 농담이었는데, 이제 꿈을 바꿔 나라 하나를 세울 참이다. 피다한 사람들을 모델로 하고 노장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유토피아를 세우고 싶다. 폭발적인 내용의『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를 읽은 후유증 아닌 후유증이다. 어쩌지? 다음 회에 이 책에 담긴 삶의 지혜를 한 번 더 풀어내고 싶은데, 이점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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