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학업은 골찌, 책읽기와 작문에 관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5 [17:31]

학업은 골찌, 책읽기와 작문에 관심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5 [17:31]

원로민속학자 임동권 박사의 ‘나의 일생’ 2

학업은 골찌, 책읽기와 작문에 관심


형들과 함께 다닌 보통학교 시절


7세가 되어 나는 은산 보통학교(恩山 普通學校)에 입학을 했다. 지금은 7세에 입학하는 것이 당연하나 당시는 그러하지 못 했다.

겨울부터 보통학교 선생님들이 마을을 찾아가서 학교에 입학하기를 권유하고 다녔다. 즉 학교는 있는데 학생이 없기 때문에 정원 50명을 채우기 위해서 7세 되는 소년 소녀가 있는 집에 찾아가서 학교에 입학하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보다 3세 위인 형님이 1학년에 있으므로 부모님께서 입학을 동의하여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형을 따라다니면 된 것이며 법적인 입학 연령도 7세니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해에 같은 마을에서 나 말고 2인이 입학하였는데 나보다 3살이나 더 많은 10세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있으나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일하고 놀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그러했다.

우리 집에서 은산(恩山)의 보통학교까지는 십리가 넘으며 5일 장이 서는 큰 마을이었다.

학교에 처음으로 간 날, 즉 입학식이 있었는데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을 좀처럼 부르지 않아서 불안했는데 마지막에서야 호명을 하기에 크게 대답을 했다. 알고 보니 생년월일 순서대로 불렀음을 알았다. 입학생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 어리다는 것이다. 같은 반에 여학생 3명이 있었다. 그러나 남학생 47명, 여학생 3인 합해서 50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얼떨떨했으나 차츰 적응이 되었다.

학교에 갈 때에는 교과서와 점심에 먹을 주먹만한 누룽지를 보자기에 싸서 팔에 끼거나 어깨에 가로 메고 다녔다. 학교까지의 거리가 5킬로나 되어 한 시간을 소비하니 새벽밥을 먹고 집을 나서야 했다. 가을철에는 해가 짧아 어둑어둑한데 십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갔다.

학교에 가려면 1킬로쯤 가서 오목고개란 공동묘지가 있는 산 고개가 있고 다시 1킬로를 더 가야 신작로에 이른다. 오목고개는 공동묘지를 가로질러야 했고 고개 마루에 서낭당이 있어 늘 5색 헝겊들이 매달려 있어 바람에 나부낀다. 여기를 지나려면 등이 오싹 땀이 나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을 것 같아 매우 무서웠다. 그래서 오목고개를 넘어 신작로까지 나아갈 때까지 일렬로 선후의 순서가 있어야 했다.

등교의 순서는 마을 안에서 그날그날 아침에 정해진다. “돈돌박이”라 해서 마을 공동의 휴식광장 아래에서 정해지는 데 마을의 윗길과 아랫길이 여기에서 합해져서 외길이 된다. 그래서 이곳에 도착하는 순서에 따라 신작로까지의 순서가 결정된다. 그래서 밥을 먹고 빨리 이곳까지 달음질해서 먼저 도착해야 한다. 오목고개를 넘는 행렬의 순서가 정해지는 것이다. 소박한 질서유지의 방법이었다. 형제가 다니는 경우에는 형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어린 아우에게 양보하는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안개가 자욱할 때와 비가 내리는 날에는 머리를 풀고 얼굴을 가린 여자귀신이 나온다 하고, 또 상여소리가 들린다 했다. 공포의 고개였다. 실제로 여우가 얼마 전에 쓴 아기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공포의 행렬은 신작로까지 가서 해제된다. 이러한 공포를 면하려면 고개를 넘지 않고 신작로로 나가야 하는데 1킬로쯤 더 돌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소박한 질서가 채택된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소박한 등교의 질서였다.

나는 우리 면에는 학교가 없어 이웃 면 즉 부여군(夫餘郡) 은산면에 있는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別神祭 때는 임시 휴교


은산은 지금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은산별신굿”이 전승되고 있는 곳이다.

학교에 가는 도중에 두 곳에 장승이 있다. 구룡리와 은산에 다가서 장승이 있는데 은산 별신제(別神祭) 때에 새로 세우는 동방 청제(東方 靑帝)이다. 평년에는 산신제(山神祭)를 지내고 3년마다 별신제가 있다. 별신제 때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학교의 운동장까지 사람들로 북적대니 학교는 임시휴교를 한다.

별신제 때에는 학교는 쉬고 서커스 패가 들어와 요란한 나팔을 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온갖 잡상인들이 들어와 장터를 메운다. 나는 좌판에 있는 옛 이야기책과 잡지 속에서 소년구락부(少年俱樂部)란 낡아빠진 한 잡지를 사서 읽었다. 베루와 아문젠의 남극, 북극의 탐험기(探險記)를 읽고 나도 커서 탐험가 되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 탐험가는 포기했다.

한번은 친구들과 돌을 던져 장승의 코를 맞추기를 해서 장승 코를 맞춘 친구를 “너, 큰 일 났다. 장승이 노해서 잡아가거나 죽게 된다.”고 놀렸더니 다음날 불어 병이 나서 학교를 3, 4일 결석을 했다. 그런 후로 장승에 돌팔매질은 하지 않았다.

이웃 부여군과 청양군의 경계에 큰 내와 작은 내가 있다. 교량은 없고 “유두돌”이라 해서 시멘트로 만든 큰 돌이 놓여 있어 돌에서 돌로 뛰어 건너 다녔다. 그러나 비가 많이 와서 냇물이 불면 돌 위로 물이 넘치니 건널 수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런 때에는 학교에서 결석으로 치지 아니해서 좋았다.

내길 양쪽에는 뽕나무밭이 있었다. 봄이면 오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구미가 당겨 그냥 지나지 못한다. 입 언저리엔 오디 물로 붉으래했다. 토양이 모래땅이니 무밭이 많았다. 하교 할 때면 그냥 지날 수가 없어 주변을 살피고 주인이 안 보이면 무를 뽑아 먹기도 했다. 여름철에는 목욕을 즐겼고 고동을 잡고 물고기를 잡는 재미가 있었다.

큰 내와 작은 내 사이에 “도깨비 둠벙”이라 해서 물이 늘 고여 있는 못이 있었다. 도깨비가 산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래서 아무도 못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 한번은 장난꾸러기가 고무신에 도깨비 둠벙 물을 퍼서 친구에 끼얹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도깨비 둠벙 물로 세례를 받았으니 너는 이제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울며 집으로 가서 “이제 나는 죽는다.”고 울었다. 이 사연을 들은 부모가 물을 끼얹은 학생 집에 가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학생은 5일 동안 결석을 하는 소동이 있었다.

나는 입학해서 학교에 갈 때에는 고충이 있었다. 상급생들이 “젖 먹고 왔느냐”, “부뚜막에 말려 왔느냐” 등 상급생들의 놀림이 있었다. 내가 너무 어려서 하는 농이었다. 그럴 때에는 나는 도망을 쳤다.


끝을 벗어나지 못한 학업성적


학교시절의 나의 성적은 형편이 없었다. 맨 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흥미가 없었다. 그러니 늘 꾸지람을 들어야 했고 늘 그냥 놀기만 했다. 집에서 늘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지리(地理)과목은 흥미가 있어 “지리박사”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지도만 펴놓고 보면 하루 종일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5학년 땐가 학예회(學藝會)가 있었는데 나는 지도를 펴놓고 “서울에 가는 길”과 “일본 동경에 가는 길”을 설명했다.

6학년 때의 일이다. 누군가 “올 겨울에 양말 안 신기”를 제의하여 모두 동참을 했다. 물론 나도 동참을 했다. 나는 10리가 넘는 길을 가야하니 겨울에는 고충이 많았다. 눈이 발목까지 내리는 것은 보통이고, 바람에 눈이 쌓인 곳은 무릎에까지 쌓이는 곳도 있다. 당시는 신이래야 고작 고무신인데 무릎까지 푹푹 빠지면서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양말을 안 신기로 하였으니 고생을 사서 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한번 마음을 먹었으니 나는 관철하기로 했다.

집에서 학교에 갈 때에는 어머니가 지켜 앉아 양말을 신도록 하였으나 대문밖에 나아가 벗어 안마당에 던지고 등교를 했다. 걸어가니까 참을 수 있었으나 재수 없게 내 자리엔 교실바닥에 송판 구멍이 있어 바람이 들어와 발이 시려 견딜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책보 채 구멍에 놓고 발을 그 위에 놓았더니 급한 대로 발 시린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추위가 심해짐에 따라 양말을 신는 수가 늘어 드디어 모두 양말을 신었으나 나는 끝까지 버티어 냈다.

봄이 되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었고, 교장실에 불려가 칭찬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몸이 허약한 나에게 그러한 오기가 있었던가 싶어 혼자서 웃은 일이 있다.

졸업을 앞두고 진학 문제가 있었다. 형이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나도 서울에 가기로 하고, 희문중학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학업성적도 좋지 않았으나 달리기와 철봉 매달리기가 형편없이 모자랐다.


문학 소질로 일본 유학


나는 은산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에 진학하기로 했다. 원래는 일인들만 다니는 학교인데 수년 전부터 한국인도 다니고 있었다. 2년제인데 졸업하고 중학교 2년에 편입할 수가 있었다. 각 학년마다 학생 수는 3, 4명에 불과하고 고등과도 1, 2학년 합해서 10명이 안 되었다. 교사는 교장과 교사 1명으로 모두 두 사람이라 한 교실에서 4개 학년이 복식 수업을 해야 했다.

고등과 학생들은 모두 같은 학교출신이라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도서실이 있어 많은 도서가 비치되어 나는 닥치는 대로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동서양의 위인전(偉人傳)이 있어 읽었고 나는 이때부터 교과서 외에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재미있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수업 과목에 작문(作文)시간이 있어 시를 쓰라는 것이다. 무엇을 쓸 것인지 막연한데 창밖을 내다보니 가을의 소슬바람에 미루나무 잎이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광경을 시로 썼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교장이 내가 쓴 시를 읽어라 하기에 읽었다. 교장은 아주 잘 된 시(詩)라며 가을의 정경을 잘 표현했다고 칭찬을 했다. 나는 상황을 그대로 문자로 옮겨 놓은 것뿐인데 과찬을 하니 당황했다.

며칠 후 교장이 부르더니 “너는 서울로 진학하지 말고 일본으로 가서 공부하면 네 소질을 충분히 살릴 수가 있다”고 했다. 나는 집에 가서 일본에 가겠다고 말했으나 응낙을 해주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교장선생에게 전하였다. 며칠 후에 교장이 자습을 시켜놓고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두어 시간이 지나 교장이 돌아왔다. 나를 부르더니 일본으로 유학하기로 너의 아버지와 큰 형님의 승낙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양조장을 운영하시고, 큰 형님은 면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의 부형께서 오르간을 한 대 기부해 주셨다”는 것이다. 아마 공부를 못하는 내가 문학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을 하니 기분이 좋아서 일본 유학을 결정하고 오르간을 기부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여하튼 나는 일본 유학을 하게 되었고, 내가 일본에 간다니까 서울의 형도 덩달아 일본 유학을 졸라 함께 가게 되었다. 운명이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는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