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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유태인, 한국인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5 [13:18]

동양의 유태인, 한국인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5 [13:18]
 

동양의 유태인, 한국인


한민족을 동양의 유태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유태인이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실지로 유태인이 믿는 것은 ‘돈’과 ‘토라(Tora)’ 라고 하는 경전이다. 유태인은 실지로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면서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죽음의 책임전가를 한 민족이다. 이는 유태인의 자기기만이며 동시에 세계를 기만한 것이다. 유태인은 참으로 교활한 민족이다. 교활하기 때문에 머리가 좋은 민족이다.

한민족은 수난의 역사를 운영한 점, 그에 따라 머리가 좋은 점, 그러면서도 정작 풍요해지면 자신의 하느님--한국인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민족, 천손족(天孫族)이라고 한다--을 배반하고 강대국에의 종속과 유랑의 역사를 운영한 점, 다시 말하면 비굴함과 배반의 역사를 운영한 점에 있어서 유대인과 매우 흡사함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땅에 대한 역사, 현실적인 역사를 부정하는 특징을 보인다.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의 노예생활과 방랑생활 때문에 이스라엘 땅을 떠난 유대인이 유대인의 정통이고 그 땅에 사는 유대인은  이민족에게 복종한 오염된(변절한) 유대인이라는 소위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역설의 역사와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選民思想)과 함께 철저히 하늘 중심의 구약(토라)을 발전시켜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유대인은 ‘땅이 없는 민족’이었지만 위대한 민족의 경전 ‘구약’을 잃어버리지 않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끝내 2천 년 만에, 2차 대전 후 독립하여 이스라엘을 세우는 기적을 이루었다. 한민족도 겉으로는 유대인과 비슷한 역사를 운영해왔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있으면 비슷한 역사가 많아서 교훈을 얻기 싶고, 그래서 기독교가 전래 2 백여 년 만에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기독교인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민족은 자신의 바이블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유태인과 달리 비록 반도의 조그마한 땅덩어리이긴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이블을 만들 필요가 덜 했는지도 모른다. 간혹 민족의 위기 때, 즉 몽고의 침입때에, 구한말 일본의 침략 때에 단군신화가 역사서의 형태로, 혹은 종교경전의 형태로 부활하긴 했지만--예컨대 삼국유사나 단군교 계통의 경전을 만들어내긴 하였지만 그것을 현실적인 토착종교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은 ‘땅에 대한 부정’의 역사를 가졌지만 ‘하늘에 대한 긍정’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오늘날 변함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이에 비해 한민족은 ‘땅에 대한 부정’의 역사만 가지고 있어 항상 부정의 악순환 속에서 비극적인 역사를 운영하고 있다. 단지 한민족이 유대인에게 위로 받을 수 있는 점은 그래도 자신의 땅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고 간신히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대인과 같이 그렇게 2천년 동안 떠나 있었던 이스라엘 땅을 자신의 땅이라고 억지주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비록 자신의 바이블은 없지만 조그마한 땅덩어리--한반도는 큰 단절 없이 유지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땅마저 최근세사에서 반동강이 난 채로 분단상태에 있다. 이는 한민족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통일, 통일을 외치고 있지만 우리의 통일을 바라는 주변국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통일에 있어서 지혜가 필요한 것인데 이 시점에서 민족의 발전과 문화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는 남한의 자유․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남한 중심의 통일이 아니라 민족의 확대재생산의 통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땅에 대한 부정’의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거꾸로 운영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 것은 <민중-여성-운동-방송-인터넷-기(氣)철학>이다. 이것은 비권력경쟁 혹은 반권력경쟁의 시퀀스에 속한다. 이들의 시퀀스가 결정하고 있는 문화적 내용들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는 혁명적 상황들에 대해서 가부, 진위, 찬반을 결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이들에 대한 결정론적 판단을 하기 전에 이 시퀀스에 반대가 되는 시퀀스를 생각해보는 것이 전체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반대 시퀀스는 <엘리트-남성-법칙-신문-법전-이(理)철학>이다. 이것은 권력경쟁의 논리에 속하는 시퀀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권력경쟁의 논리에서는 항상 소외되어 있고(아니 스스로 참가하지 않고 있고) 항상 비권력경쟁의 <민중-여성...>의 시퀀스를 선택한다. 물론 <민중-여성>의 시권스는 그야말로 우주의 근본 혹은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남성...>의 시퀀스에 해당하는 것은 문화 혹은 문명적이면서 지배적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선택한 시퀀스이다. 

그런데 지금 <민중-여성)의 시퀀스가 지배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급진 진보주의는 제대로 지킬 것이라고는 없는(근대사에서 제대로 지키고 보수할 전통이나 훌륭한 역사도 없는) 허약한 위선적 보수주의의 대한민국을 지금 해체중이다. 계속 뒤에 오는 자가 앞의 것을 부수고 앞의 역사를 부정하는 악순환의 자기부정의 논리에 빠져 계급혁명 식으로 전통과 역사를 파괴하고 있다. <민중-여성>의 시퀀스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인류문명을 권력체계로 보면 이는 매우 불길한 징조이며 일종의 피지배적 콤플렉스의 한시적 발산의 증후군이고, 한풀이 굿판을 벌이고 있는 셈이고, ‘민주주의의 잔치의 끝’이 되며 앞으로 계속 퇴락하는 신호가 된다.

인류문명이 반대로 대전환을 이루어, 흔히 여성시대, 모성시대로 상징되는 평화와 평등에 이르는 반권력체계로의 대전환을 이룬다고 보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과연 인류가, 인류의 문명이 지금 갑자기 반권력체계로 흘러갈까. 인간사회 자체가 바로 권력체계이라고 볼 때 이는 너무 희망적이고 안이한 전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가 인류문명의 대전환의 시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인 반권력체계의 ‘모성주의-평화주의-평등주의’가 세계를 이끌어가게 될까. 이것은 자연선택 과정에서 적응에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에 비교될 정도로 운명적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평화-평등주의는 단지 권력체계라는 마루의 중간 중간에 보이는 골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이다. 세계는 언제 다시 지리상의 경쟁시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만약 인류사에서 천재일우의 기회로 <모성적 세계로의 전환>을 이룬다면 우리의 현실은 비관적이지만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는 <부성적 세계>를 이끌어왔다는 점에서 우리의 이러한 여성적․모성적 문화특징이 눈물과 절망을 예고하고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문화는 왜 줄곧 여성적이었을까. 여성적이라는 말은 ‘피지배적’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왜 지배적인 입장에서 생각을 하지 못할까. 이 피지배적이라는 말에는 여성주의, 평화주의, 사대주의, 식민주의, 순종주의, 반항주의 등 온갖 문화복합적 특징들이 숨어 있다. 우리는 지금 내부적 자기모순과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생산성이 없는 푸닥거리만 계속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 굿판에는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 속에서 간간이 절망의 신탁이 들려온다. ‘한국인이여, 정신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길고 긴 억압과 한탄과 질곡의 협곡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때엔 이미 늦으리, 늦으리.’

모든 게 국민의 민도(民度)와 함께 하여야 하고 빨리 바꿈에 따른 혼란과 실패보다는 천천히 바꾸는 안정과 성공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빨리 간 것이 될 것이다. 천천히 가라. 그러면 성공한다. 빨리 가려면 그렇게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실망과 상처만 남는다. 이제 제도와 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차례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기질은 그렇게 이성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데에 서투르다. 그 까닭은 역사적 굴곡에 의해 항상 극단적인 역사운영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 스트레스가 우리를 잘못 가게하고 있다. 기운은 넘치는데 그것을 형태화 시키고 제도화시키고 아름답게 만들 이성과 미의식이 부족하다.

한국인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바보이다. 한국인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질에서 나오는 특유의 신명(神明) 때문인 것 같다. 흔히 이 신명을 문화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실은 체질에서 비롯되어 문화적으로 관습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신명은 차라리 문화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체질적인 것이다. 한국인은 신명을 위해 태어난 민족인 것 같다. 이 신명에 걸리면 못하는 것이 없고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신명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명은 때로는 신풍(神風)과 같은 광기(狂氣)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신명이나 신풍 때문에 혹은 이것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한국인은 역사의 경쟁에서, 문화의 법칙정립에서 다른 민족, 다른 나라에 뒤지게 된다. 이는 어딘가 믿는 구석--신명--이 있기 때문이다. 신명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신명은 변화무쌍한 기(氣)와 느낌(feeling)의 결과이다. 신명은 기복이 크다. 신명은 자연의 리듬과 같은 것이다. 신명은 계획과 정복과는 관계가 없다. 참으로 한국의 미래가 궁금하다. 신명에 합리적 토론과 계획을 보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인, 문명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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