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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성 한림대 교수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2 [14:07]

이삼성 한림대 교수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2 [14:07]
 

이삼성 한림대 교수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한국사의 발전 가로막은 것은 명분주의였다


 당신에게 중국의 아편전쟁(1840년)과 일본의 개항(1953년) 그리고 강화도조약에 따른 조선의 개항(1876년)은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으신지? 당시 세 나라의 사회 분위기와 집권 엘리트층 전략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에 대한 그림을 갖고 있는지도 묻고 싶다. 알고 보니 페리 제독 일행의 흑선(黑船)이 들어올 때 일본 사회 역시 “천지가 열린 이래 최대 비상사태”라는 위기의식으로 패닉상태에 빠졌다. 반외세의 슬로건인 ‘왕을 지키고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존왕양이(尊王讓夷)의 구호로 들썩였던 것까지는 우리나 중국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가 달랐다. 존왕양이를 주창하던 구 정치세력이 바로 국가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이 개국·개화의 중추로 발돋움하는  놀라운 역사의 유턴이 이뤄진 것이다. 서세동점의 파고를 헤쳐 나갈 지배층의 정치적 통합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고, 19세기 제국주의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나라인 새 일본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와 중국은 그 작업에 실패했다. 그 결과 기존 봉건질서에 대한 ‘노!’의 목소리인 민란이 태평천국의 난(1951)과 한국의 동학혁명(1894)인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점검을 해보자.


 붕어빵인 두 민중봉기가 내세웠던 지도이념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대목도 흥미롭다. 낡은 이념인 유교와 작별했던 태평천국은 기독교를 일단 베꼈다. 신약성경보다는 구약에서 암시를 받았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서학(西學)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반면 동학혁명은 토종 이념인 유불선 통합이 모토였다. 이런 한·중·일 비교사의 정보를 담은 이삼성(한림대 교수)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는 가히 일급의 읽을거리다. 상·하권 1500쪽의 이 책은 책 근수만이 대단한 게 아니고 문제의식과 들인 공력에서 가히 문제작이라서 나는 요즘 이 책을 알리는 샌드위치맨으로 나섰다.


 이 책은 고대사에서 19세기까지를 포괄하는 통사이며, 당시 국제질서의 큰 그림을 함께 보여주는데, 이런 작업을 한 저자는 놀랍게도 젊은 국제정치학자다. 전공은 미국외교 쪽. 미뤄보건대 그는 그동안 답답했으리라. 애국주의 내지 민족주의적 접근을 자기 소명으로 아는 꼭 막힌 국사학자들이 요긴한 저술을 제 때에 내놓지 못하니까 국외자가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적 이해와 정치학적 및 국제관계학적 관심을 결합하여 보다 전체적인 이해를 시도”(2권 서문)인데, 간만에 만난 호방한 스케일의 이 책은 분과학문으로 따지면 동양사·서양사·한국사·국제정치학·미국사를 포괄한다. 저자의 속생각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언제까지 현미경(분과학문)만을 고집하다가 길을 잃고 헤맬 것인가? 한번쯤은 망원경(통섭)으로 훑어내려 넓은 시야와 교두보를 확보해야하지 않을까? 때문에 저자의 방식은 머리카락을 쪼개는 ‘밀(密)의 방식’ 보다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소(疏)의 방식’을 택했는데,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19세기사의 경우만 국한해도 우리 근대사의 굴절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저자의 큰 스케일의 표현대로 “19세기는 왕조로서 청조의 무덤일 뿐만이 아니라 중화질서 자체의 무덤”이었다. 그 분수령이 아편전쟁인데, 이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 한반도는 말 그대로 ‘잃어버린 70년’으로 시종한다.


 ‘잃어버린 70년’ 동안 왜 우리는 일본 같은 자기 쇄신이 불가능했을까? “조선사회와 그 지식인들, 그리고 일반 민중은 19세기 중엽이후 몰아닥칠 세계사적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정신적·지적 준비”(2권 196쪽)에 왜 실패했을까? 쉽게 말할 수 없겠지만, 우리의 19세기는 내내 문제가 있었다. 우선 저자의 지적대로 왕권(내지 국가권력)이 많이 부실했다. 쉽게 말해 19세기는 ‘소년왕’의 시대였다. 1800년에 왕위에 올랐던 순조는 10살이었다. 뒤이은 헌종 은 8살,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시골의 10대 철종은 19세였으며, 고종은 10세였다.


 부실한 왕권을 대신한 것은 개혁과는 담을 쌓은 요지부동의 신권(臣權)인데, 이들은 전국의 서원 1000개를 거느린 사대부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시열의 노론(老論)세력이었다. 노론의 상징물은 충북 괴산의 만동묘가 아닐까? 만동묘가 상징하는 것은 북벌(北伐)사상이다. 명나라를 받들고 청나라를 배척한다는 외교정책이자 조선사회 세계관인데, 문제는 이것의 힘이 너무도 막강했다. 17세기 이후 조선지식의 사상적 흐름을 가늠하는 저자의 진단을 경청해보자.


 “북벌론적 대청인식이 150년 지속되다가 18세기 후반기에 와서 일부 진보적 사상가들에 의해 북벌론을 청산하고 청나라 문화와 서양문화를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하는 북학론(北學論)이 나왔다. …(하지만)새로운 세계관이 자리를 잡기에는 북학파도 정조도 힘이 부족했다. 북학파는 숙청되고 서학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으며, 쇄국주의와 패권주의는 지속되었다.”(1권 589쪽)


 저자의 질문은 이 때문이다. 왜 우리는 중화주의에 중독돼 중국 바깥(일본·청나라)의 움직임에 눈을 감았고, 그 결과 전쟁이나 외침 등 국가불안을 자초했나? 그 핵심에는 한국 중화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즉 우리 중화주의는 외교 전략을 넘어 세계관·우주관이자 이데올로기였다는 게 저자의 통찰이다. 명분에 집착하는 외곬의 집단심리 내지 사회심리가 그만큼 완고했다. 상식이지만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란 근대 식민주의와 달리 느슨한 중심부-주변부의 관계다지만, 눈여겨 볼 것은 일본이다. 중국이야 본래 종주국으로 명분·원칙(道)과 실리·변칙(術)을 함께 챙기는 유연한 스타일이었지만, 일본도 영리했다. 필요할 때 중국이란 우산에 들락거리는 등 선택에 능했다.


 1392년 무로마치 막부가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만, 1411년 이후 외교를 단절했다. 훗날 청과도 국교를 맺지 않았지만, 무역 등 실리는 따로 챙겼으니 그들에게 중화주의란 외교전략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고지선의 명분이자 가치였고, 그 때문에 이웃 일본의 역동적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었고, 임진왜란·청일전쟁을 불렀다. 뿐이던가? 옛 중국(명) 섬기기에 눈멀어 병자호란의 참화를 자초했다. 당시 삼학사인 김상헌이야말로 중화주의 중독의 전형이겠지만, 역시 한국적 명분주의와 외곬 DNA가 주범이다.


 내년으로 한일합방은 100년을 맞는다. ‘잃어버린 70년’동안 눈먼 쇄국과 내부개혁 외면으로 버벅대다가 국권 상실까지 불렀지만, 이걸 성찰해볼 책으로 이삼성의 책은 으뜸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지금 중화주의는 손가락질하고 말 옛 유산이 아니다. 한·중·일 삼국 역사를 찬찬히 훑어보면 더욱 드러나는 우리 핏속의 명분 우선주의, 도덕 과잉이야말로 또 다른 중화주의이자, 얼치기 노론의 마인드가 아닐까? 그게 이 사회의 갈등조정 능력 부족은 물론 대국을 읽는 전략 마인드 부재를 낳는 주범이라면, 그 또한 병은 병이다. 그걸 어떻게 고칠까?    

에 질문 또한 묵직하다. “왜 우리는 중화주의에 중독돼 중국 바깥(일본·청나라)의 움직임에 눈을 감았고, 그 결과 전쟁을 자초했나?” 누구나 품어봤을 질문을 한·중·일 비교사로 풀어내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만의 중화주의 실체가 드러난다. 즉 우리 중화주의는 외교전략을 넘어 세계관·우주관이자 이데올로기라는 게 문제다. 명분에 집착하는 외곬의 집단심리 탓임은 물론이다.


 상식이지만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란 근대 식민주의와 달리 느슨한 중심부-주변부의 관계다. 눈여겨 볼 것은 일본이다. 중국이야 본래 종주국으로 명분·원칙(道)과 실리·변칙(術)을 함께 챙기는 유연한 스타일이었다지만, 일본도 영리했다. 필요할 때 중국이란 우산에 들락거리는 등 선택에 아주 능했다. 1392년 무로마치 막부가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만, 1411년 이후 외교를 단절했다. 훗날 청과도 국교를 맺지 않았지만, 무역 등 실리는 따로 챙겼으니 그들에게 중화주의란 외교전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지고지선의 명분이자 가치였다. 그 때문에 이웃 일본의 역동적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임진왜란·청일전쟁을 불렀다. 뿐이던가? 옛 중국(명) 섬기기에 눈멀어 병자호란의 참화를 자초했다. 당시 삼학사인 김상헌이야말로 중화주의 중독의 전형이겠지만,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할까? 한국만의 명분주의와 외곬 DNA가 주범이니 말이다. 최대 비극은 19세기다. 1840년 아편전쟁과 함께 중국의 천하질서는 무너졌지만, 우리의 중화주의 중독은 풀릴 줄 몰랐다. 내년으로 100년을 맞는 1910년 한일합방까지 내내 그랬다.


 그 기간을 저자는 ‘잃어버린 70년’이라고 규정하지만, 눈먼 쇄국과 내부개혁 외면으로 버벅대다가 국권 상실까지 불렀다. 이후 근대사의 아픔을 많이 치유했다지만, 우리 안의 외곬의 DNA는 사라졌을까? 저자가 보기에 중화주의 중독은 여전하고, 그게 요즘은 한미동맹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한미동맹을 외교 전략의 모든 것이자, 이데올로기로 떠받든다면 옛 중화주의 중독과 뭐가 다르냐는 지적이다. 오해 마시라. 그는 섣부른 반미주의자가 아니며, ‘이데올로기로서의 한미동맹’ 지적 또한 매우 현실적인 사안이다.


일테면 중국 위협론이 그렇다. 중국이 커지면 한반도가 위험해진다는 논리가 중국 위협론인데, 그건 증거가 희박하다. 역사를 보면 중원이 안정되었을 때 한반도에 전쟁은 거의 없었다. 중원이 흔들렸을 때 몽골 침략, 병자호란, 임진왜란, 한일합병이 찾아왔다. 결론은 간단하다. 한·중·일 삼국 역사를 찬찬히 훑어보면 우리 핏속의 명분 우선주의, 도덕 과잉이 뚜렷이 보인다. 그게 갈등조정 능력 부족은 물론 대국을 읽는 전략 마인드 부재를 낳는 주범이라면, 그 또한 병은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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