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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출입구 ‘숫구멍’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2 [12:45]

영혼의 출입구 ‘숫구멍’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2 [12:45]

 영혼의 출입구 ‘숫구멍’


  사람의 몸에 그의 영혼이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을까?

 있다 한다. 바로 숫구멍이다.

  머리 정수리 한 가운데를 숫구멍이라 하는데 갓난아기들을 살펴보면 이곳에 맥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보인다.

 달리 숨구멍이라고도 하고, ‘아이 숨구멍 신 字’인 ‘囟’을 써서 ‘囟門’ 또는 ‘頂門’ ‘白會’라고도 부른다.

 아기들에게 이곳이 열려있는 것은 영혼이 그리로 들어 온 다음 미처 출입  구가 덜 닫혀서라 한다. 어른들의 숫구멍은 딱딱한 뼈로 막혀있어 이미 그 문이 닫힌 것으로 본다.

 예부터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정수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라든가 ‘정수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놈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이 역시 숫구멍 상태를 두고 나온 말일 것이다.

 도가 트여 유체이탈을 할 수 있다는 사람의 영혼도 그 영혼의 통로를 숫구멍으로 본다. 그렇다면 어릴수록 유체이탈은 쉽다는 것일까? 

 현대 뇌 과학자들이 ‘나’라는 것이 신체 어느 부분에 있는가를 조사해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나’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 때의 뇌 부분을 촬영한 결과 머리 꼭대기 부분인 정문 약간 뒤 부분이 활성화 된다는 것을 관찰했고 바로 이 부분을 ‘나’라는 느낌과 관련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만약 ‘나’라는 느낌이 영혼에 대한 느낌이라면 비록 아직 추측 단계이긴 하지만 숫구멍은 과학적으로도 용도가 증명된 셈이다.        

 인도 요가에서도 이곳을 생명에너지의 정점으로 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각 이후 모습을 조각한 불상에는 어디나 정수리에 상투처럼 무언가 봉긋 솟아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육체적 증표라고나 할까. 이는 부처님이 지닌 부처다운 모습인 32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불교에서도 중국 도교에서도 정수리에 솟아난 그 육괴로 사람의 도력을 가늠한다.

 그런데 예부터 여성은 아무리 수도를 해도 백회가 열리지 않고 육괴도 솟아 나오지 않는다고 전해지는데........ 요즘 비구니 스님들 가운데 그런 백회가 봉긋 솟은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 무슨 차별의 음모가 있어 보인다.

 ‘영혼의 통로’라는 이 숫구멍 역할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곳이 티베트 불교다.

 ‘티베트 死者의 서’를 보면 임종에 이른 사람이 숨을 멎으려 할 때, 스님이 그를 오른쪽으로 돌려 눕힌다. 이를 ‘獅子가 누워있는 자세’라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반열반에 드실 때의 자세다.

 스님은 오른쪽으로 돌려 누운 임종자의 목 동맥을 부드럽게 눌러 척추의 에너지 통로에 있는 생명력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오직 머리 정수리에 있는 브라흐마의 구멍을 통해 영혼을 내 보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브라흐마의 구멍이 숫구멍일 것이고, 이곳을 영혼의 통로로 보아 영혼을 이곳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티베트 스님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동맥을 눌러 죽음을 돕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혼이 정수리의 숫구멍을 통해 나가게 되면 그 사람의 숨이 곧 멎게 된다. 그런 다음 스님은 죽은 자에게 이렇게 알린다.

 “지금 그대의 몸은 상념으로 이루어진 몸이라 불리는 ......... 오, 고귀하게 태어나는 성향들의 축적이니라. 그대는 피와 살로 된 몸을 지니지 않은 까닭에, 오는 것이 소리이거나 빛, 혹은 태양광선의 그 무엇이든 이 모든 것이 그대를 해칠 수 없다. 심지어 그대는 죽어 사라지려해도 죽을 수 없다. 그대는 이러한 환영들이 그대 상념의 형상의 형상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이것이 ‘바르도’임을 깨달아라.”

 ‘티베트 사자의 서’의 원 제목인 ‘바르도 퇴돌’은 ‘사이’라는 의미의 ‘바르’와 ‘두 개’라는 의미의 ‘도’ 즉 이 세계와 저 세계 ‘둘 사이’를 뜻하며 죽은 사람이 환생하기 전까지 머무르는 사후의 중간상태를 말한다. ‘퇴돌’은 ‘듣는 것  만으로 자유에 이르는’의 뜻이라 한다.

 스님들은 이후 ‘사후의 중간 상태’인 49일간 죽은 이가 해탈할 수 있도록 아니면 좋은 곳으로 환생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힌두교의 ‘바가바드기타’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사람이 낡은 옷을 버리고 다른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그와 같이 몸의 주인도 낡은 육신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육신들로 옮겨 가나니 그는 칼로도 베지 못하며 불로도 태우지 못하며 물로 또한 적실 수 없으며 바람으로 말려 버릴 수도 없나니 베어질수도 태워질 수도 없고 적실수도 말려질 수도 없는 이가 바로 그이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죽은 영혼은 베어질 수도 태워질 수도 없는 영원한 그 무엇인가? 그렇다면 불로 태우고, 바늘 산 위를 걷게 하고, 얼음지옥에서 얼리는 ‘지옥 고’는 무엇으로 어떻게 당하게 되는 것인지.

 영혼의 새로운 탄생 통로가 되는 숫구멍.

 그 숫구멍을 통과하는 순간이야 말로 중요한 고비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 모두 그 숫구멍을 통과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어느 종교나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임종 때 자신의 생각을 올바로 통제하고 분명한 의식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죽는 순간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고 다음의 삶을 얻게 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 부디 무의식에 빠지지 말라고 권고한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죽는 과정과 이어지는 중음의 세계에서 헤매는 영혼에게 스님들이 길 안내 역할도 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깨어있는 의식과 그 태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못한 영혼에게 단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해탈할 수 있게 한다는 성스러운 말을 승려들이 들려주는 것이다.

 ‘바르도’ 즉 ‘사후의 중간 상태’는 한국불교에서도 치르는 49제의 49일에 해당하며 中陰, 또는 中有로도 불린다.

 임종 순간에 염한 세계가 저승에서의 거처를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은 불교 정토종에도 나온다. 죽는 순간 단 한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염한다면 아미타불이 주석하고 계시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이 자녀의 이름을 거룩한 신들의 이름을 따 짓는 것은 그가 죽는 순간 자연스럽게 신의 이름이기도 한 자녀 이름을 부르게 함으로써 거룩한 세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라는 것이 아닌가.  

 요즘도 우리는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좋았던 일, 행복했던 일만 생각하라’ 이른다. 죽는 순간 한 많았던 일만을 생각한다면 한을 품는 귀신이 되고 말 것이라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죽는 순간 거룩한 이름을 염하라’는 힌두교 라마교 등의 가르침이 그 뿌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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