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북촌 주변-민족혼 깃든 동네답게 종교시설마다 나라사랑 가득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2 [12:01]

북촌 주변-민족혼 깃든 동네답게 종교시설마다 나라사랑 가득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2 [12:01]

 

민족혼 깃든 동네답게 종교시설마다 나라사랑 가득

 

칠보사-한글 현판 위풍당당, 안동교회-애국지사 배출

삼청와드-동네 국군병원 위문공연, 삼청교회-민족계몽 산실

가회동성당은 정치지도자들의 평온 찾아줘


 길거리 구옥들을 리모델링해 멋진 카페와 상점으로 바꿔놓으면서 평일에도 숱한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서울 속 유럽’으로 탈바꿈한 북촌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가회동, 재동, 팔판동, 삼청동 등을 지칭한다. 한양 북쪽에 자리잡아 북촌으로 불렸으며,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북촌에는 바라만 봐도 추억 속에 빠져들 듯한 옛 골목길이며, 900동 남짓의 한옥도 남아 있어 ‘600년 역사문화 도시’ 서울의 정취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북촌에서 종교시설 탐방은 또 하나의 흥미거리다.


 10여년 전만해도 북촌은 청와대에 근접해 있어 개발이 안되고 가옥도 낡아 돈 없는 서민들이 싼 값의 셋방을 찾아 모여들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길거리 구옥들을 리모델링해 멋진 카페와 상점으로 바꿔놓으면서 평일에도 숱한 젊은들이 몰려드는 ‘서울 속 유럽’으로 탈바꿈했다. 북촌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가회동, 재동, 팔판동, 삼청동 등을 지칭한다. 한양 북쪽에 자리잡아 북촌으로 불렸으며,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북촌에는 바라만 봐도 추억 속에 빠져들 듯한 옛 골목길이며, 900동 남짓의 한옥도 남아 있어 ‘600년 역사문화 도시’ 서울의 정취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북촌에서 종교시설 탐방은 또 하나의 흥미거리다. 먼저 북촌의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불교 조계종 칠보사는 500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큰법당’이라고 쓴 한글현판이 일품이고,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삼청와드는 한국의 첫번째 스테이크(교구)였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띤다. 또 대한예수교장로회 안동교회와 삼청감리교회는 올해 나란히 100살을 맞은데다  멋스런 찻집 운영으로 지역사회에 다가가고 있다. 가회동성당은 아름다운 중세 고딕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내년에는 헐고 그 자리에 새로 본당을 지을 예정이어서 올해 마지막 감상 기회가 되고 있다.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 근처에 있는 칠보사는 터도 좁고, 전통가옥이 4채 뿐인 소담한 사찰이지만, 장안에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절의 조실로 있다가 열반한 석주(1909~2004)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과 대종사에 올랐던 명사인데다, 그가 30년 전에 쓴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이 대웅전 앞에 위풍당당하게 걸려있기 때문이다. 힘차고 정겨운 서체에서 스님의 한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칠보사에는 기둥에 걸린 6개의 주련도 모두 한글로 쓰여 있어 뜻이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칠보사의 자랑은 또 있다. 500년된 느티나무다. 북촌의 가을은 칠보사 느티나무가 오색의  잎을 찰랑거릴 때 시작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 자태가 빼어나다. 이곳에 절을 지은 사람은 만해 한용운 선사의 제자이자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간 춘성(1891~1977) 스님으로 알려진다. 도성 안에 사찰을 못 짓게했던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서울에도 사찰이 하나 둘 생길 무렵인 1925(6)년 춘성 스님이 북촌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현재는 석주 스님의 제자 송담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다. 큰 스님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늙은 느티나무는 늘 넉넉한 품으로 노승의 빈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일주문도 없는 칠보사를 나서 두 서너발짝 내려오면 담 하나 사이로 삼청와드가 있다. 와드란 교회와 같은 개념이다. 미국에 본부를 둔 예수그리스도교회는 한국에 17개의 스테이크와 148개의 와드를 가지고 있으며, 신도수는 8만명을 헤아린다. 스테이크(stake)란, 텐트를 지탱해 주는 말뚝을 말하는데, 교회를 지탱한다는 뜻에서 따왔고, 와드(ward)란 지역을 뜻하는 용어로 단위 교회를 말한다. 삼청동 5번지에 위치한 삼청와드는 당시 북아시아지역 책임자였던 게일 이 카 선교부장이 한국선교사로 파송됐을 때 한옥이 딸린 300여평 부지를 마련해 세워졌다. 이때가 1957년. 여기에서 서부, 청운, 미아, 신당 등 8개 와드가 분리돼 나갔다. 한옥에서 예배를 보던 성도들이 2년여 동안 적립식 건축기금을 모아 1971 학교건물과 흡사한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1973년 이곳에 서울 스테이크가 조직되었으니, 이는 한국 최초의 교구요, 전세계적으로 605번째 스테이크로 기록된다.

 삼청와드는 항상 열려 있다. 철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초기 예배당인 한옥과 교회 특유의 흰색 벽돌조 예배당, 농구시설, 수려한 향나무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교회는 어디를 가도 청소년들을 위한 농구장이 마련돼 있어 인상적이다. 

 성도들이 전하는 추억 한토막. 북촌 초입인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너편에는 예전에 국군수도통합병원이 있었다. 이곳에는 한국전 등으로 부상 당한 육해공군 장병들이 입원해 있었는데, 당시 삼청와드 청남청녀(중고등부) 향호향상회 소속의 수준 높은 연극반이 이들 군인 환자들을 위해 신파극 ‘육혈포 강도’를 공연하며 큰 위안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 연극반 학생 고원용은 훗날 국내 IT업계의 거목이 된다.

 삼청와드를 나서면 삼청동 ‘문화의 거리’와 만난다. 거리거리마다 디카를 든 젊은이들이 ‘작은 유럽’에 도취돼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어느 한 가게도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아기자기한 인도를 거슬러 내려가면 삼청파출소 못미쳐 대각선 방향으로 카페보다 더 예쁜 작은 도서관이 나온다. 삼청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도서관 ‘꿈과 쉼’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도서관 한 쪽에는 서너개의 파라솔이 설치돼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그 아래에는 아름다운 북카페가 탐방객을 유혹한다. 수제품 가구로 꾸며진 럭셔리한 분위기와 독일 달마이어 원두를 사용한다는 북카페 ‘엔’은 최상의 커피, 딜리셔스한 팥빙수, 저렴한 가격으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팔판동 49번에 속한 삼청교회 본건물은 도서관 뒤편에 있다. 이 교회는 인근의 안동교회와 1909년 한달 간격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니, 올해 나란히 100주년을 맞은 셈이다. 삼청교회는 문희수 담임목사를 맞아 멋진 북카페와 어린이도서관을 지역사회에 선물했고, ‘꿈꾸는 공동체’라는 새로운 비전으로 교회의 새 역사를 열어나가고 있다.

 

 

 

북촌은 봐도봐도 흥미진진하다. 안동교회를 가기 위해 발머리를 삼청파출소 옆 골목으로 돌린다. 이미 골목 안까지 카페와 상점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풍년상회’ 여주인은 쌀파는 재미보다 떡볶이 파는 재미에 푹 빠진 듯 땀을 뻘뻘 흘리며 떡볶이를 접시에 퍼담는다. ‘coffee factory(커피공장)’라고 이름붙은 카페는 문전성시다. 문 앞은 물론, 길 건너에까지 젊은 남녀들이 입장을 기다리며 장사진을 이룬다. 고객을 잡아끄는 힘이 무엇인지 참 신기하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벗어나니 정독독서실이다. 독서실 담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원불교 시민선방이 눈에 띈다. 이어 오른쪽 골목 어귀에 고가구 수리하는 집이 있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 좌측으로 꺾어드니 기와집 담장과 명문당 출판사가 눈에 들어온다. 기와집은 전직 대통령 윤보선(1897~1990) 생가이고, 고풍스런 솟을대문 앞에 안동교회가 옛 종탑을 뽐내며 고즈넉하게 서 있다.

 개화파 지도자 박봉승 등 양반들은 안국동 27번지에 구국 일념으로 교회를 세웠으니, 곧 안동교회다. 1909년 3월 성도 김창제 집에서 첫 예배를 본 것을 기원으로 한다. 초대 목사 한석진은 당시 한국장로교회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7인의 목사중 한사람이었다. 안동교회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한글학자 이윤재 장로를 배출하고, 야학을 운영하는 등 민족계몽의 산실이었다. 윤보선 대통령도 예배에 참석했으며, 현재는 장남 윤장구 장로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한다. 본래는 고딕식 3층 건물이었는데, 1977년에 신축해 오늘에 이른다.

 안동교회는 황영태 담임목사가 부임하면서 ‘1인 1섬김의 현장 갖기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교인들은 복지관, 생명밥상공동체, 아름다운실버 등 사회복지시설을 찾아다니며 이웃섬김을 실천한다. 그래서인지 교회를 안내하는 여성 분들이 그렇게 친절할 수 없다. 황목사는 교회내 전통 가옥인 소허당을 쉼터로 개방해 매주 토요일 지역민과 북촌 탐방객들에게 차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예배당의 파이프오르간도 언젠가는 오픈할 예정이다.

 골목을 다시 나와 재동사거리로 내려가면 재동슈퍼마켓과 재동초등학교 사이의 큰길 가회로가 나타난다. 가회로를 따라 100여 m 오르면 좌측으로 성당 종탑이 우뚝 올려다 보인다. 가회동 성당이다. 성당에서 한 집 건너 보이는 대저택이 국내 굴지의 김영사 출판사다. 가회동 30-3에 위치한 가회동성당은 1949년 명동성당에서 분리돼 나와 한옥에서 본당으로 인가가 났다. 현재의 고딕양식 건물은 1954년 신축됐는데, 당시 노기남(1902~1984) 주교가 와서 준공미사를 집전했다고 한다. 노주교는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요, ‘경향신문’을 창간한 한국사회의 큰어른이었다. 본당 옆 현대식 4층 건물은 사제관인데, 1967년 신축됐다. 가톨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인들에 대한 복지서비스가 잘 돼있다. 가회동성당도 본당이 안정권에 놓이자 1969년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 임야 5만평을 매입해 본당 묘지로 확보했다. 사후 누울 자리가 마련돼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음 든든한 일이리라.

 한때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삼청동에 살 때 미사를 보며 평온을 찾았다는 가회동성당. 이제 55년된 아름다운 예배당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건물이 비좁아 내년에 헐고 그 자리에 본당을 새로 짓는다고 한다. 예배당이 좁으면 넓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역사와 추억이 담긴 옛 건물이 사라지는 것은 문화재 마니아들에게 안타까운 일이다. 가회동성당 뒤편이 유명한 북촌한옥마을이다. 발품팔아 골목골목 누벼볼만하다.

 삼청동은 예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던 도교적 공간이기도 했다. 삼청(三淸)은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도교 3위를 모신 삼청전(三淸殿)이라는 곳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청은 나중에 산청(山淸), 수청(水淸), 인청(人淸)의 의미로 바뀐다. 북촌의 종교시설을 여행하며 인상적인 풍광 하나를 발견했다. 칠보사의 큰 느티나무와 예수그리스도교회의 작은 느티나무가 서로 담을 아랑곳 하지 않고 팔을 뻗어 맞잡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 종교도 서로 손잡고 웃음꽃 피울 날이 올는지.<논설위원>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