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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합정동 절두산순교박물관 & 외국인선교사묘원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0/19 [22:03]
천주교와 개신교가 만나는 ‘영성적 공간’

서울 합정동 절두산순교박물관 & 외국인선교사묘원

천주교와 개신교가 만나는 ‘영성적 공간’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0/19 [22:03]


서울 마포구 합정동은 한국 기독교역사의 중요한 공간이다. 지하철 2호선 객차가 합정역을 출발해 당산철교를 올라타기 위해 막 몸을 일으키는 철로 양쪽으로 천주교의 절두산순교박물관(왼쪽)과 개신교의 양화진외국선교사묘원(오른쪽)이 있다. 순교박물관은 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전개됐던 곳이고, 선교사묘원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헌신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합정역 7번 출입구에서 양화대교 방면으로 조금 걷다보면 순교박물관(500m)과 선교사묘원(300m)을 알리는 팻말이 높이 솟아 있다. 그 왼쪽 도로 입구에 십장생이 그려진 기와 담벽이 눈에 들어온다. 지하철의 지상돌출부분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가림막이다. 이 전철구간 양쪽도로 끝지점에 순교박물관과 선교사묘원이 자리잡고 있다. 어느 쪽으로 가도 이들 성소(聖所)를 만날 수 있다.
 
각기 성격이 다른 두 성소가 왜 한 자리에서 만났을까. 그것은 이곳의 옛 이름 양화진(楊花津)을 이해해야 한다.
 
‘버들꽃 나루’라는 의미를 가진 양화진은 마포 서남쪽 한강 북안(北岸)에 있던 나루터였다. 조선시대 해상교통의 요지였으며, 한양의 천연방어선을 이루는 요충지로서 진대(鎭臺)를 설치했던 곳이다. 과거 선박을 이용한 외국선교사들도 이곳을 통해 한양에 출입했다. 양화나루 근방은 정자가 많고, 경치도 뛰어났다. 특히 누에고치 머리를 한 ‘잠두봉(蠶頭峰)’은 실경산수화의 멋진 화재(畵材)로 등장하던 곳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나루터가 잔혹한 처형장으로 변했다. 이 지역 합정동(合井洞)의 유래는 본래 이곳에 있었던 ‘합정(蛤井·조개우물)’이라는 우물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조개우물은 우물 바닥에 조개껍질이 많이 붙어 있어 지어진 이름인데, 망나니들이 사형도구로 쓰는 칼을 갈고 물을 뿜기 위해서 팠다고 한다. 바로 순교기념관 근방이다.
 
절두산에는 형구돌 등 병인박해의 흔적 ‘또렷’
양화진 언덕에는 한국을 사랑한 이들의 넋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던 1866년 10월 황해도 사람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내 김엇분(마리아), 아들 붕익(바오로) 등 천주교신자 수십명이 이곳에서 무자비하게 처형됐다. 당시 흥선대원군 등 집권자들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몰아 병인년 들어 대대적으로 박해를 가했으며, 이 소식을 접한 로즈 제독이 프랑스함대를 이끌고 그해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양화진을 통해 조선을 침입했다. 집권자들은 요충지인 양화진이 서양세력에 의해 더럽혀진 것이 천주교인들 때문이라고 탓하고, 천주교인의 피로써 오욕을 씻고자 이곳을 사형집행지로 택했던 것이다. 이후부터 잠두봉은 천주교신자들이 목이 잘려 숨진 곳이라하여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어졌다. 1894년 개화파 거두 김옥균도 이곳에서 능지처참되어 효수 당했다.
 
양화진에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들어선 것은 의료선교사 존 W. 헤론과 깊은 관계가 있다. 현재 sbs 월·화드라마 ‘제중원’에서 조선에 인상적인 의술을 전하고 있는 헤론 원장이 바로 그다. 고종임금 시의(侍醫)이기도 했던 헤론은 조선에 온지 5년만인 1890년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운명한다. 이때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조선 땅에 첫 정박한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요청했으며, 몇차례 난항 끝에 정부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로인해 헤론이 외국인묘원의 최초 안장자가 된 것이다. 이후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 등 총 414명의 유해가 속속 안치됐다.
 
선교사묘원은 양화나루터 뒤 잠두봉(절두산)과 대각선 방향으로 후미 언덕에 조성돼 있다. 이곳에 묘지가 조성될 때 만해도 천주교는 아직 절두산을 성지로 확보하지 못했다. 천주교는 1956년에 가서야 절두산 순교지를 매입했으며,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절두산에 순례성당과 순교기념관을 짓는 첫 삽을 뜨기에 이른다. 축성 및 개관식은 이듬해 이뤄졌다.
 
이렇듯 양화진은 낯선 서구의 물결과 조선의 묵은 정신세계가 순순히 합류하지 못하고 충동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역사현장이며, 그 터 위에 구교와 신교가 만나 영성적 공간으로서 공존을 모색하며 아픈 역사를 지워나가고 있다. 순교박물관과 외국인묘지는 양화진공원을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돼 있어 어느쪽으로 순례코스를 잡아도 무방하다.
 
이들 두 성소는 기독교신자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마음의 휴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다. 선교사묘지에서는 한국을 사랑하고 이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 가족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고, 한민족의 지난했던 근대사를 반추해 볼 수 있다. 조각품처럼 단장된 다양한 비석은 구미(歐美)의 세련된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다. 순교박물관에서는 사람들 목졸라 죽이는데 사용한 대형 형구돌이며, 망나니들의 긴 칼 ‘행형도자(行刑刀子)’를 형상화한 성당 종탑 등을 볼 수 있는데,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 이들 성소는 서울시 선정 외국인을 위한 시내 주요관광코스에도 포함돼 있다.
 
순교박물관과 선교사묘원을 돌아보노라면, 유적지 곳곳에서 손을 모으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자들과 발견할 수 있다. 가슴 속에서 처연함이 솟아오른다. 그야말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뜨거운 영성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다. 두 성소가 지하철 2호선 철로 벽으로 막혀 있어 답답하기도 하고, 여간 흉물스럽지 않다. 철로 벽을 허문다면, 더욱 너르고 안정된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국가 재정이 허락되면 철로를 강 밑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만하다. 서울 귀중한 문화유산답게 잘 지키고 가꿀 필요가 충분하다.
 
절두산순교박물관
‘병인박해’ 새긴 천주교의 기념비적 순교지

 
절두산순교박물관은 잠두봉(蠶頭峰) 위에 조성돼 있다. 갓 모양의 둥근 지붕에 망나니 칼 형상의 종탑이 세워진 곳이 성당이고, 그 옆에 3층 현대식건물이 박물관이다. 그 아래 야외 주차장에서 잠두봉을 바라보면 누에고치 머리 형상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순교지 순례는 야외주차장 한켠에 마련된 ‘순교자기념탑’에서 시작된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28위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형틀을 상징하는 중앙의 주탑에는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이 새겨져 있고, 우측탑에는 절두된 머리가 올려져 있어 절두산의 지명을 암시한다. 잠두봉을 좌측으로 우회해 올라가는 길목에 ‘빨마가지(종려나무)를 든 예수상’이 서 있다. 예수상 손바닥에는 못이 박혔던 흔적까지 세밀히 조각돼 있다. 얕으막한 언덕을 오르니 너른 광장이 눈앞에 전개된다. 야외전시장은 여기저기 소나무를 식목하는 등 봄단장이 한창이다. 작은 키의 샛노란 복수초가 나그네를 반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바위 가운데 구멍이 난 형구돌이다. 병인박해 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충청북도 연풍공소에서 발굴돼 1974년에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밧줄을 목에 걸고 구멍 뒤에서 잡아당겨 질식시키는 무자비한 집행기구였다.
 
너른광장으로 들어서려는 데, 가톨릭신자로 보이는 중년 남녀들이 마리아상이며, 예수의 수난처 등 조형물 앞에서 두 손을 모으거나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으며 간절히 기도한다. 참으로 경건해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서 이곳이 가톨릭의 매우 중요한 영성공간임을 실감했다. 이들 신자들은 매일 오후3시 열리는 미사에 참석하러 왔다가 조형물을 일일이 순례하며 기도드리는 것 같았다.
 
야외전시장에서 감상할 수 있는 주요조형물로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김대건 신부 동상’ ‘박순집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성 남종삼 흉상’ ‘성모동굴’ ‘순교자의 모후와 빨마’ ‘안수 성모상’ ‘김대건 신부 좌상’ ‘척화비’ ‘야외14처(십자가의 길)’ 등 수십점이 있다. 조형물은 모두 국내 유명한 조각가들의 작품이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은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인 이의송과 그의 처 김예쁜, 아들 봉익 등 세 사람을 한꺼번에 조각해 놓은 아름다운 석상으로 순교박물관으로 오르는 언덕 입구에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은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의 규모로 야외광장 끝에 세워져 있다. 잠두봉과 마주보며 야외전시물의 핵을 이룬다.
 
‘성모동굴’은 1858년 성모 마리아가 프랑스 루르드 동굴(마사비엘)에서 발현한 것을 기념해 마사비엘을 본 따 1978년 조성했다고 한다. 동굴 안의 대리석 성모상이 불교의 관세음보살처럼 후덕해 보인다. ‘야외 14처(십자가의 길)’는 예수가 유대법정에서 십자가 형틀이 있는 골고다언덕까지 끌려가던 14개 장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모든 기독교 신자에게는 절로 숙연해지는 은혜스런 공간이다. 십자가의 길은 야외전시장 둘레에 산책로처럼 조성돼 있다.
 
기록에 의하면, 3~4년 전만해도 야외전시장에는 조선출신의 일본 성녀 ‘성 오타 줄리아’ 묘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는지 찾을 길이 묘연하다. 어쩌면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지만, 여러 가지 정황이 뒷받침되지 않는 모양이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을 거쳐 가파른 언덕을 휘돌아 잠두봉 위로 올라서면 순교자기념성당과 박물관을 만난다.
 
순교자성당은 잠두봉의 모양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서울대 미대 이희태 교수의 설계로 건립됐다고 한다. 성당의 지붕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을 하고 있고, 궁궐의 기둥과 같은 원주가 지붕을 받치고 있다. 박물관은 잠두봉 위에서는 1층이지만, 야외전시장에는 3층으로 돼 있다. 평소 2,3층은 교회사관련 유물과 문헌자료를 비롯한 민속품들이 전시된다.
 
현재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유품전’(2010.2.16~5.23)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김 추기경이 즐겨 입었던 개량한복이며, 늘 어린아이처럼 살자고 다짐하며 집무실에 놔뒀던 작은 어린이 조각상, 각종 서체 등이 전시돼 일생을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다간 김 추기경의 체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개신교 선교사들의 안식처…헉! ‘제중원’ 헤론 원장도
 


한해 방문자가 6만8000명에 이르는 한국기독교역사의 뿌리와 같은 중요한 사적지다. 1893년 10월24일 의료선교사 존 W. 헤론의 유골을 양화진에 이장함으로써 첫 번째 무덤이 탄생했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14명이 양화진묘지에 묻혔다. 이들 중 143명은 선교사이고, 나머지는 선교사의 가족과 그들을 돕던 사람들이다. 면적은 1만3224㎡이다. 묘지 옆으로 아름다운 조형미를 자랑하는 기념교회와 홍보관이 조성돼 있다. 묘지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면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외국인선교사묘지는 다양한 문양의 묘비가 세워져 있어 외국에 와 있는 느낌을 받는다. 묘비 사이의 공간도 너르고, 묘비도 각양각색이어서 순례코스가 흥미진진하다.
 
sbs 월화드라마 ‘제중원’의 인기 때문인지, 순례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헤론의 묘다. 사각면에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윗부분은 피라밋처럼 생긴 오벨리스크 양식을 하고 있는데, 멋스럽다. 이곳에 서면 한강도 조망되고, 멀리 대각선 방향으로 절두산순교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헤론(1858~1890)은 영국에서 출생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동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우수한 재능을 하는 그가 ‘동양의 미개국’ 한국선교를 지원했을 때 주변에서는 크게 놀랐으며 말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1885년 6월21일 조선에 입국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갓 결혼한 아내 해티 깁슨이 동행했다고 한다.
 
조선에 온 헤론(조선명, 혜론)은 고종임금 시의(侍醫)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얻었으며, 조정에서는 그를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에 아낌없이 젊음을 바쳤다.
 
헤론은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인술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헤론의 성격은 드라마에서 헤론 역을 맡아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는 리키 김에 의해 단편적으로나마 드러난다. 리키 김과 실제 헤론의 인상착의가 닮았다는 느낌도 든다. 그는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하며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고,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도 없었다. 동료선교사에 기포드는 한 언론에서 헤론의 인간성에 대해,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그는 의지적이었으며, 책임감도 강했다. 그러나 누적된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인지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만다. 이때가 조선에 온지 5년, 그의 나이 33세였다. 헤론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이곳에는 헤론 선교사 외에도 연세대학교를 세운 H,G 언더우드 부부와 그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부부, 이화학당을 세운 M.F 스크랜턴과 그의 딸이며 이화여전 초대교장을 지낸 엘리스 아펜젤러, 평양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홀과 그의 부인으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운 로제타 홀, 숭실학당 설립자 월리엄 M. 베어드, 한말에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승동교회에 백정 장로를 세워 신분의 평등을 실현했던 S.F 무어,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M. 위더슨, 성경의 한글번역작업을 통해 한글의 대중화에 기여한 W.D 레이놀즈, 고종의 외교밀사로 미국과 헤이그를 다녀온 H.B 헐버트, 배화학당을 설립한 J.P 캠벨,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한 H.G.아펜젤러, 결핵퇴치의료활동을 벌이고 크리스마스실을 만든 S. 홀, 대한성공회 2대 주교였던 A.B 터너 등이 한국선교사에 기념비적인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셔우드 홀은 1992년 한국에 결핵요양원을 처음 세운 인물이다. 이들 선교사들의 삶은 하나같이 개화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료와 선교, 교육은 물론 우리나라의 독립과 인권에 많은 기여를 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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