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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붓다가 이루려 한 것은 ‘자율 신앙’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0/21 [10:10]
씨알사상 지상중계 ① 다석 유영모의 삶과 영성-박영호(다석학회 고문)

예수와 붓다가 이루려 한 것은 ‘자율 신앙’

씨알사상 지상중계 ① 다석 유영모의 삶과 영성-박영호(다석학회 고문)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0/2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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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柳永模,1890~1981)는 온 생애에 걸쳐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한국의 큰 사상가다. 16살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나 불교와 노장, 공맹 사상 등 동서고금의 철학, 사상, 종교를 하나로 꿰뚫는 진리를 깨달아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32살에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그곳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전했고, 40대에는 기독교청년회(YMCA) 연경반에서 30년 넘게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그러면서도 ‘성경’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성인을 모두 좋아했다. 다석의 제자인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역시 사상가요 민권운동가로 일생을 살았다.


두 사람은 지난 2008년 서울대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 이후 세계 사상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재단법인 씨알(이사장 김원호)은 지난 2009년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금요일 서울 명동 정진상교육관에서 제6기 씨알사상강좌를 열었다. 이 강좌에서는 박영호 다석학회 고문,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이기상(철학) 한국외대 교수, 이규성(동양철학) 이화여대 교수, 정양모(다석학회 회장) 신부 등 씨알사상 전문가들이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삶과 사상을 중심으로 강의했다. 범종교신문에서는 이를 지상중계한 바 있다. 이 강좌의 정신이 다시금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매일종교신문에 재록해 놓는다. <편집자주> 


바울은 제사·구복종교 예수 사상과 달라
불교는 붓다의 니르바나 신앙 잃어버려
“짐승의 내가 죽어야 하느님 자녀”




다석 유영모는 ‘교회에 안 나가는 크리스천’이었다. 다석은 81살에 광주 동광원에서 공식적인 마지막 말씀으로 ‘사도신경’을 강의했는데, 그 강의 내용을 들으면 다석이 왜 교회에 안 나갔나를 알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사에서 일제에 저항하여 기독교 정신을 지킨 무교회를 중요시 여기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성서조선을 발행한 김교신의 죽음과 더불어 무교회는 맥이 끊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 같이 교회는 안 나가도 류영모와 김교신의 신앙내용은 아주 다르다.


사도신경은 7~9세기 이단을 색출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으로,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 없다. 사도신경은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바울 신경’이라고 해야 맞다. 다석이 교회를 멀리 한 것은 바울의 교의신학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다석만큼 예수를 사랑한 사람도 없다.


영성신학을 밝히려면 바울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예수 제자를 박해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를 만나거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변해 예수를 추앙하게 되지만, 신뢰가 가지 않는 인물이다.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가난하고 무식꾼이었다.


이에 반해 바울은 학벌이 좋았고, 집안이 부유해 닷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유학까지 갔을 정도다. 바울이 예수의 사상을 배울려면 예수의 직제자들에게 배웠어야 했다. 그때는 복음서라고는 없었다.그러나 마음에 내키지 않아 예수에게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했던 것이다. 바울이 예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면, 예수 사상과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실제는 전혀 다르다. 그러니 계시받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바울 사상과 예수 사상은 전혀 다르다. 예수는 얼나의 깨달음 신앙인데 바울은 생전사후 축복을 바라는 제사종교요, 구복종교에 불과하다.


예수 신앙은 영성 신앙이다.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것은 새로 나야 된다는 뜻이다. 곧 ‘몸의 나’에서 ‘얼의 나’로 솟나라는 뜻이다. 우리는 육신의 부모에게 몸나 즉, ‘에고(ego)의 나’를 받았다. 때문에 하느님에게 얼나를 받아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느님에게 얼나를 받는다는 말은 깨닫는다는 말이다. 예수의 영성 신앙은 곧 깨달음(자각)의 신앙이다.


우리사회는 획일적이지 않다. 현대에도 제사 종교, 신조 종교, 자각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제사 종교가 가장 많다. 다석은 자각 신앙을 이루려고 한 분이었다. 석가모니는 이 세상이 헛된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것은 깨친 소리요, 그것을 믿는 불교는 깨친 종교다. 얼나를 깨달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다석은 스스로 “나를 불교신자라고 한다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불교신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표현을 썼다. 거듭나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 신앙에는 깨달음이 전혀 없다. 속죄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오늘의 교회가 너무 바울 신앙에 치우쳐 있어 깨달음을 모른다. 오늘 예수가 교회를 보면 “내가 가르친 것이 아니다”고 말할 것이다.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인공위성을 발사했으나, 우주 진입에 실패했다. 인간을 위성에 비교하면 그 목적은 하느님께 가는 것이다. 나를 1차로 발사시켜 준 분이 어머니다. 어머니는 아기 낳는 어려움을 감수하고 역할을 다했으니 성공한 것이다. 2차 성공은 하느님께 가야 한다. 그럴려면 얼을 보호하는 두꺼비집인 몸이 떨어져 나가야 한다. 몸을 체념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다.


내가 다석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질문한 것이 출신학교나 고향이 아니었다. “생각이 나느냐”고 물었다. 다석의 제자 함석헌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도 “기독교인들은 왜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바울 신앙은 생각하는 것을 막았다. 동정녀 탄생, 육체 부활 등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자율적인 신앙이라야 살 수 있다. 타율신앙은 죽은 신앙, 죽은 정신이다. 바울이 그렇게 만들었다. 믿으라고만 했지,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붓다와 예수의 깨달음의 신앙은 똑같다. 육에 집착하면 영적으로 거듭날 수 없다. 간디도 “when the ego dies, the soul awakes(에고가 죽어야 영이 깨어난다)”고 설파했다. 장자가 말하기를 옛날 참사람들은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죽는 것도 슬퍼하지 않았다. 육체가 쓸모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 때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 예수가 “회개하라”고 한 말은 “거듭나라”, “깨달으라”는 말이지, 죄진 것을 회개하라는 말이 아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의 몸뚱이 삶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인간사란 하룻밤 꿈꾸는 것이다. 죽으면 꿈에서 깨어난다. 이 사실을 알면 삶에 애착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꿈꾸는 시간이다. 하느님이 생각날 때 꿈에서 깨는 순간이다. 예수나 붓다가 오기 이전에도 이 세상에 종교는 있었다. 단지 그때의 종교는 제나(ego)의 종교였다. 사람들이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하니, 힘 있는 곳에 가서 빌기 시작한 것이다. 빌면 가피를 받는 줄 알았다. 종교가 이러한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최대한 이용했다. 종교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지옥 형벌을 받는다”고 겁을 줬던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도 겁을 준다. 겁을 줘야 말을 잘 듣기 때문이다.이것을 샤머니즘 이라고 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말이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분이다. 구약은 자꾸 벌을 강조하는데,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을 하느님이 벌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인신 제사’까지 바쳐 하느님을 잔인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래도 구약의 신관은 다른 서물숭배신관보다는 발달된 신관이었다. 제사종교나 의식종교는 에고를 위한 종교다.


붓다의 신앙 대상은 ‘니르바나’(절대자 신의 다른 표현)였다. 그런데 불교는 니르바나를 버리고 그 자리에 붓다를 갖다놨다. 예수를 신격화한 사람도 많다. 이것을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누구든 어릴 때는 어머니 아버지가 최고다. 엄마 아빠가 곧 하느님이다. 초보적 신앙자일 때는 공자나 붓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이 성장하면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종교가 신도들을 자율적 신앙인으로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 ‘신자=돈’으로 보니 자꾸 붙들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모두가 자율적인 신앙인이 되기를 바랐다.그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좋다고 말하였다.


영성신앙은 자율적인 신앙이다. 스스로 하느님을 만나야 된다. 복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붓다와 예수는 복을 구하지 않았다. “아버지 뜻대로 하겠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예수의 40일간 광야 금식기도는 죽기를 각오한 길이었다. 죽음의 자리에 가야 하느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자살보다 어렵다. 그래서 가치 있는 일이다. 나도 자살을 많이 생각했다. 32살에 상처했고, 6.25때도 죽음을 많이 목격했다. 그러니 관념이 아닌, 체험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개체란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어야 한다. 개체란 죽게 돼 있다. 일부 신학에서는 몸이 영원히 사는 걸 믿는데, 무지몽매한 일이다.


성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를 엄청 위하고 있다. 왜 그럴까. 무당의 경우 섬기는 대상의 수가 많은데, 최영 장군이 가장 인기라고 한다.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예수를 샤먼적으로 접근했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예수의 영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은 협잡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석은 사도신경을 외울 가치조차 없다고 한 것이다. 기독교가 발전하려면 사도신경에서 풀려나야 한다. 거기에 매이면 옴짝달싹 못한다. ‘서구 기독교가 망한다’는 말은 바울신앙이 망한다는 것이지, 예수가 망한다는 말이 아니다. 불교 신앙이 변질되면 불교가 망하는 것이지, 붓다가 망하는 것이 아니다.  제사 행위는 1만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제사종교와 의식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다. 다석은 식사기도도 안했다. 신앙이 어릴때는 기도와 찬송 등 의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3000년 사이에 동서양에서 유명한 정신적 지도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공자 노자 붓다 에레미야 이사야 예수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뭔가 때가 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와 붓다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 정신 사상이 깨달음의 사상이다. 붓다와 예수가 동시대에 태어났다면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에 가장 가깝게 산 사람이 붓다이고, 붓다에 가장 가깝게 산 사람이 예수다. 두 사람은 너무 일치한다. 그것은 근원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생전에 자주 “내가 잘 아는 것은 니르바나 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교는 니르바나, 곧 하느님을 버리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불교는 석가의 니르바나 신앙을 찾아야 한다. 불상없는 적멸보궁이 석가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몸으로 사는 것이 무익한 것이라고 했다. 개체 의식이 깨지고 전체의식이 살아나야 한다고 했다. 박애주의자가 되라는 말이다. 예수는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지만, 기독교인들은 자기와 다르면 이단이라고 해 상종도 안했다. 이단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것에 불과하다. 예수 이후 깨달음의 종교는 없어지고, 신조 종교만 남았다. 영성 신앙이 살아나야 한다. 요즘 기독교인은 간판만 예수지, 속은 바울 신앙이다. 바울은 영적 이야기를 줄곧 하다가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끄집어낸다. 정신 없는 일이다.


하느님이 인간과 지구를 창조하셨으면,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거듭나는 사람을 거두기 위함이다. 얼이 하느님과 교통하는 것이 참이다. 하느님은 인간 만들어놓고 영적으로 거듭나는 사람이 있으면 거두려고 한다. 교회는 의식도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짐승의 나는 죽고, 하느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사람을 하느님은 찾고 계시다. 종교는 제나(ego)의 의식, 제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사람은 예수 석가와 같이 깨달음 신앙에 이른 다석같은 분이다. 다석같은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한다. 예수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어린아이는 탐욕, 성냄, 섹스에서 고결하다. 그런 상태로 어른이 되는 것이 하느님 아들인 성인이다. 탐진치의 내가 완전히 죽어야 한다.  <정리=정성수>


*박영호:1959년부터 1981년까지 20여 년동안 다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다.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그것을 보완하여 ‘다석사상전집’(총6권)을 출간했다. 이밖에 ‘다석 류영모 명상록’ ‘중용에세이’ ‘잃어버린 예수’ 등을 펴내며 삶 속에서 깨우침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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