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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 배우 김태희의 간증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3/08 [08:10]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가톨릭 신자 배우 김태희의 간증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3/08 [08:10]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입니다. 여름방학에 남동생과 교리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아 첫영성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더 어릴 때에는 조부모님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가끔 절에 따라다니기도 했는데, 어린 내 눈에는 왠지 모르게 성당 다니는 다른 친구들이 예쁜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는 모습이 부럽고 멋져 보였습니다.
 
중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땅을 보고 하늘도 보며 걷다 불현 듯 신비스런 기운이 휩싸면서 가슴이 벅차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늘 너와 함께 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나의 경험이 그 날의 기분 탓에 겪은 단순한 감정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증명해 보여줄 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난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놀라운 체험들을 꽤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사사롭고 막무가내인 수많은 기도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응답해 주시며 당신의 존재를 늘 내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내가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하느님 말씀을 모른 척하며 살지 않는 이상, 하느님은 언제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 많은 말씀 가운데, 유독 여러 번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난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모자라고 부끄러운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날 사랑하실 거야. 영원히….’라고.
 
하느님의 훈육방법
 
삶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절실히 찾게 될 때가 있습니다. 기쁜 일이 생겨 한없이 감사를 드릴 때, 그리고 힘든 일이 생겨 마음이 너무나 괴로울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느님 앞에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게 될 때는, 역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뭔가 큰일이 생겼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과연 아무 이유 없이 오로지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이신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고, 마냥 피하고만 싶은 일들도 시간이 흐르면, 그로 인해 내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게 하신 하느님의 훈육방법이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예상치 못했던 사건 하나하나가 사실은 모두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 누구도 원망이나 불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더욱 노력하면서 그 분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우리가 늘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사는 것, 그것 하나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연기’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은 정말 하느님이 주관하시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연기자로 이끄신 것은 아마도 그것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제대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일주일 단 한 번, 고작 한 시간일 뿐인 미사 시간에 딴 생각을 하고, 자기 전에 달랑 한두 구절의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바라는 것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말로는 하느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말이 얼마만큼 내 진심과 맞닿아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두 달 전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본당의 한 신자로서 청년활동에 권유를 많이 받아왔지만 내가 다른 청년들과 어울리며 신앙생활을 서로 나누고 돕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정기적으로 신부님과 내 또래 자매들과 너무나 즐거운 성서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하느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하느님이란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 성서모임은 점점 더 신이 나고 흥미로운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지금까지 나의 신앙생활은, 2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내가 그린 상대방의 이미지만을 보며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한 가짜 연애처럼 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영적으로 새롭게 내어나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고, 특히 나는 지난 일을 너무나 쉽게 잘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내게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놀라운 체험으로 나를 깨닫게 해주셔도 또 금세 잊어버리고 제자리걸음만을 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는 말씀이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바람과 같이 자유롭다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그 말씀대로 어떠한 제약 없이 눈앞의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나를 이끄시는 대로 하느님 뜻에 순종하며 살면 행복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간절히 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나는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때로는 남들보다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는 우월감까지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과시하고 자랑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고, 나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봐 혼자서만 조용히 하느님 사랑을 맛보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를 잊고 살았다는 것과 내가 그동안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죄책감입니다. 내 성격은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마음이 내키는 쪽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남에게도 쉽사리 무엇인가를 권유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종교나 믿음 같은 문제는 누가 말로써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이 쓰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읽으면서 선교 활동에 대해 가졌던 회의적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선교 활동을 할 때, ‘구원’이라는 단어를 꼭 씁니다. 우리 인간이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질문 몇 가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답변을 알아봅니다.
 
1. 누가 구원되는가?- 인간이/ 2. 누가 구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3. 무엇으로부터 구원되는가?- 죄에 의해 배가(倍加)된 인간의 유한함으로부터/ 4.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 구원되는가?- 더욱 정의롭고 보다 형제애적이며 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와 교회에 매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일까요? 솔직히 나는 그리스도교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수없이 많은데, 그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교회에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회에 속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하느님의 목소리인 ‘양심’에 따라 도덕적, 인격적으로 사는 그들의 행위 안에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모른 사람에게 그분을 알게 해주고 싶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마치, 정말 사랑한다면 좋은 것을 서로 나누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려 하시며, 그때 취하시는 길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전부터 나는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말자!”라고 답해왔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여, 감히 나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내가 느끼는 이 기쁨을 모두가 느낄 수 있게 되는, 나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 가톨릭 신자 김태희 세례명은 베르다이다. 그녀의 겸허한 신앙고백이 4회에 걸쳐 천주교 소식지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란에 실렸는데 이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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