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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님과 하늘님, 하나님은 같은 분”-종교는 바꿀 수 있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3/12 [09:25]
종교지도자들과의 대담●대종교 원영진 총전교

“한얼님과 하늘님, 하나님은 같은 분”-종교는 바꿀 수 있다

종교지도자들과의 대담●대종교 원영진 총전교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3/12 [09:25]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민족고유의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


대담: 이옥용(발행인)
사회: 신민형(편집인)
일시 및 장소: 2014년 3월 10일 대종교 총본사
사진= 황광현 사진전문기자
 

▲ 원영진 대종교 제 19대 총전교     © 황광현 기자


대종교의 수장 원영진(62) 총전교는 연로한 다른 민족종교지도자와는 달리 젊었다. 반만년 역사(4471년)의 가장 오래된 종교의 수장으로서 그는 위엄이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대외적인 활동도 적극적이다. 그래서 대종교 일각에서는 그의 소탈한 행동이 비판을 받고 있는 듯 하지만 그가 쌓아온 경력상 오히려 그의 활동이 위축된 대종교의 장래를 밝게 해주리라는 기대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단군을 교조로 민족고유의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


그는 1978년 대종교에 입교한 이래 일본과 중국, 북한 선교에 적극적이었으며 이를 위해 해외동포연구소, 예절연구소, 인성개발연구소 등의 개인활동을 끊이지 않고 해왔다. 중국 목단강 인근 경박호에 200만평의 소목장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피폐한 북한과 조선족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그러한 모임과 사업이 장기적으로는 대종교의 큰 뜻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단군정신선양회‘를 통해 탈북자에 대한 특강도 많이 했다.

2012년 김문겸 총전교가 77세의 나이로 조천(朝天)하고 제 19대 총전교로 선임된 이후에도 그가 이끌어왔던 ‘단군정신선양회‘의 회장을 계속 맡고 있다. 대종교의 수장으로서 내려 놓아야 할 자리라는 비난도 있지만 그는 모두가 대종교의 융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민족의 뿌리를 찾는 내부적인 운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톨릭 단체에서 신부와 수녀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했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해 민족고유의 하늘님을 신앙하는 종교”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듯이 대종교의 경전을 통해 단군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린 것이다. 단군신앙을 미신, 우상으로 치부하던 그들에게 기독교가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우리민족의 경천(敬天) 사상을 알리고 만물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역설함으로써 단군신앙이 그저 ‘곰 이야기’를 거론하는 신화나 미신이 아님을 인식시켰다. 단군이 ‘하나님의 메신저’이라는 논리와 ‘한얼님과 하늘님, 하나님이 같은 분’이라에 공감을 산 것이다.
이에 한 수녀는 그에게 다가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저도 대종교 교인이 될 걸 그랬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도 건넸다고 한다.

▲ 매일종교신문 이옥용 발행인과 대담을 나누는 원영진 총전교.     © 황광현 기자


“예수는 서양의 구세주, 홍암 대종사는 동양의 구세주”


원영진 총전교의 형은 개신교 장로이며 동서는 목사이다. 그러나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단군상 훼손’이나 ‘제사 거부’ 같은 불상사가 안 생긴다. 그는 경천, 숭조(崇祖), 애인(愛人), 애물(愛物) 사상을 기본적을 가지고 있는 한 ‘종교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주변엔 개신교 목사 10여명이 단군을 연구하며 내면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스님 30여명도 단군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역시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 당시 삼각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 그때 “민족을 위해 제단을 쌓아라” 하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1977년 7월 7일 전농동 자택에 ‘민족제단’이라는 현판을 걸고 20년간 ‘자시(子時) 기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불생(不生) 불멸(不滅)의 참된 마음’인 천진(天眞)을 얻기 위해 1978년 대종교에 입교하게 된다.
 
모든 종교를 포용할 수 있는 조화원리를 갖춘 범세계적 종교로서의 대종교로 개종하게 되는 것이다. 개신교인이었을 때는 미신 우상으로 여겼던 단군과 대종교가 보편적 합리적 종교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기독교에서 풀리지 못한 응어리가 풀어진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는 신학공부를 한 가수이자 화가인 조용남이 “예수는 서양의 구세주, 홍암 나철 대종사는 동양의 구세주”라고 한 말에 공감한다.

다만 그는 “개인적으로 종교를 바꿀 수 있으나 조상은 바꿀 수 없다.”는 신념이 투철하다. 따라서 “우리민족이 가져야 할 얼을 찾아야 한다”며 그 얼을 국조(國祖)인 한인(桓因)·한웅(桓雄)·단군왕검(檀君王儉)의 ‘세검 한몸(三神一體)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대종교의 기본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 ’신리대전(神理大全) 등에 따르면 시공성(時空性)을 초월한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신(神)인 한얼이 바로 신앙의 대상이다.


일제시대 30만 교인 확산과 위축


대종교는 1909년 1월 15일(음력), 홍암 나철(1863~1916) 대종사가 중광한 종교이다.
그러나 그 맥은 단군교조로 출발해 나철교조에 이르는 반만년 역사 속에서 교명(敎名)이나 의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단군시대에는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을 마련해 하늘의 뜻을 일깨웠다. 부여에서는 교명을 대천(代天)이라 하고 음력 10월에 영고(迎鼓)의 제례를 거행했다. 삼한에서는 계음(禊飮)의 의식을 통해 신교 전통을 지켰다. 고구려에서는 경청(敬天)이라는 교명으로 동맹(東盟)의 제례를 거행했으며 신라에서는 숭천(崇天), 백제에서는 교천(郊天). 발해에서는 진종대도(眞倧大道)라는 이름으로 교맥이 이어졌다. 고려 때에도 왕검교(王儉敎)로 동맹의 전통을 이은 팔관(八關)을 거행했다. 산신, 용왕 등 민속신앙의 밑바닥에도 그 맥이 흐른다고 할 수 있다.

몽고의 침략 이후 700년 동안 끊긴 교맥은 나철 대종사의 중광(重光․ 부활의 의미)으로 맥을 잇게 된다. 그래서 개천 4343년, 서기 1909년 음력 1월 15일은 중광절(中鑛節)로 대종교의 4대 경절 중 하나가 되었다.

종교로서보다는 항일국구, 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한 대종교는 시교(始敎)한 지 1년만에 2만여 명의 교도가 생겨났으며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했다. 한편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했다가 1914년에는 본사를 백두산 북쪽 산밑 청파호(靑坡湖) 근방으로 옮겨 국내와 마주지역에 포교를 함으로써 30만 명의 교세로 커져나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강화했고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해 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일본의 폭정을 통탄하는 동시에 인류 구제를 위한 간절한 뜻을 남기며 자결했다. 이후 대종교는 숱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확대를 통해 포교활동과 그 정신의 맥을 이어나갔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게 되자 총본사가 부활되었고, 1946년 2월 환국하여 서울에 설치되었다. 미군정 때 대종교는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과 함께 5대 종단의 일원으로 등록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초대 문교부(현재의 교육부)장관인 안호상의 노력으로 천주교를 포함한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었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받았다. 초기 정부 국무위원에 대종교인이 이시형 부통령, 이범석 장관 등 7명에 이를 정도로 그 위세는 이어졌다. 당시 이시형 부통령은 경복궁에 대종교 총본사를 들어서게 한다는 포부도 갖고 있었다.


▲ 원영진 총전교와 이옥용 발행인이 대종교 총본사 천궁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황광현 기자


민족자주와 항일독립정신을 이을 새로운 목표 찾아야


원영진 총전교에게는 이제 단군의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정신을 확산시킬 대종교의 중흥을 이루어야 할 과제가 있다.

역대 정부의 정책에 밀려 미신, 우상으로 인식되는 단군교를 ‘민족고유의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로 알려야 되며 ‘나 중심에서 해야한다‘는 각 종교와 사회의 갈등을 ‘홍익인간 이화세계’ 정신으로 풀어나가며 융화시킬 책임이 있다. 다종교다문화시대에 접어든 나라에서 기왕의 민족자주와 항일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어나갈 새로운 정신인 것이다.

정통민족종교로서의 위상을 세워야할 막중한 책임도 있다. 반만년 이어졌다가 700년 끊어졌던 단군교의 맥을 이은 대종교로서 민족신앙과 종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지도력이 요구된다.

현재 단군을 숭배하는 신앙인은 300만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대종교를 중심으로 한다기보다는 각종 유사단체가 난립되고 있다. 선불교를 비롯해 한얼교, 우주종교, 단군교 등이 모두 단군을 뿌리로 하고 있으며 무속, 산신신앙 등 우리 민족의 고유신앙 역시 단군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대종교 총본사가 직접 관여하는 곳은 도(道)본사 4곳, 시교당(施敎堂)은 100여 곳이 존재할 뿐이다.

원영진 총전교는 “기독교가 수백개의 교파가 생겨 하나님의 뜻을 전하듯이 대종교도 여러 종파로 나뉘어 한얼님의 뜻을 전파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론 ‘계시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개인 플레이’로 난립하는 것에 대해 우려가 크다. “진리로 하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경(眞經)을 보고 고쳐야 된다”는 신념이다.

그는 삼청공원에 단군상을 설치하려다 미군정의 반대로, 88올림픽 때 박세직 조직위원장이 남산 1300여평에 단군신전을 지으려다 개신교 등의 거부감으로, 무산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민족종교를 폄하하던 정부정책에 대한 서운함도 있다. 북한이 단군릉을 발굴해 최대성전으로 꾸미고 민족정신을 기리는 것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60년대 대종교에서 무속교화원을 설치, 5000명의 무속인을 교육시켰는데 당시 대종교 내에서 ‘무당교’에 대한 반론이 컸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 “단군의 경천사상이 뿌리깊었던 우리민족은 민속신앙뿐 아니라 불교, 기독교의 유입이 세계 어느나라보다 급속히 이루어졌다.”며 “5색인종이 한 가족 한 형제라는 대종교의 기본정신을 갖고 다른 신앙도도 같이 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종교의 근본주의가 무속인들을 포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00만 단군 신앙인과 모든 종교 포용하는 종교로


원영진 총전교는 개신교의 근본주의, 교조주의, 배타주의를 거부하듯이 대종교의 그러한 태도도 거부하는 듯했다.
1990년대 한 민족종교 단체는 기독교에 ‘하느님’이란 명호를 도용해선 안된다는 소송을 걸었었다. 현재 이슬람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성경에 ‘알라’의 명칭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중국에서 ‘god'를 ’상제(上帝)’라고 한 것에 반해 한국 기독교에서 ‘하느님’이란 호칭을 쓴 것은 민족자주성의 거부이며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고유의 한얼님을 이방의 신(神)인 여호와, 알라, 브라흐만 등으로 대입 참칭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일리가 있다는 편을 들면서도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 듯 했다. “한얼님과 하늘님, 하나님은 같은 분”이란 신념이 더욱 크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종교가 300만 단군 신앙인을 포용하기 위해서도 대종교의 근본주의, 교조주의, 배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고 그것이 대종교의 기본정신이라 확신하고 있다.

지난 2월 14일(음력 1월 15일)에는 제105주년 중광절을 맞아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총본사 천궁에서 기념식을 봉행했다. 교세와 위상이 낮아진 만큼 천제의식은 화려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민족고유의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로서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듯을 펼칠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현재 미약하더라도 그 정신이 이어지는 한 창대하게 뻗어나갈 것이라고 원영진 총전교는 믿었다. 그가 개신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하여 수장이 되었듯이 언젠가는 대종교가 말그대로 으뜸종교로 자리잡을 것임을 믿는 듯했다.

홍암 대종사가 대종교를 창시한 중광절의 의미를 뛰어 넘어 세상 사람들에게 우주탄신을 알리는 개천절(음력 10월 3일)의 의미를 전달할 날을 기약하고 있다. 우주, 종교, 문명, 나라가 열린 최대․ 최고의 축제일이 되어가는 과정에 자신의 소탈하고 적극적인 행보를 바치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단군이 세상에 강림한 지 216년 만에 다시 하늘에 오른 날인 어천절(御天節․ 음력 3월 15일), 민족의 명절은 가경절(嘉慶節․ 음력8월 보름날) 등 대종교 경절도 언젠가는 만인이 경배하고 기리는 축제가 될 날이 올 것이란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종교의 핵심교리와 개천절의 변천

▲ 대종교의 마니산 개천절 행사 장면.     © 대종교 이창구 봉선 제공


<교리의 근간은 三一神 사상>
대종교의 근본 교리는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조(調)·금(禁)의 3법이다. 교리의 근간(根幹)은 삼일신(三一神) 사상이다. ‘신리대전’의 <大倧之埋三一而已(대종교의 이치는 셋과 하나일 뿐)>은 곧 <한얼은 한임과 한웅과 한검이시니>의 삼신일체(三神一體, 세검 한몸)의 한배검(天祖神) 교리와 상통하며, 한배검은 바로 대종교의 신앙대상이기도 하다.
삼신설 외에도 삼진설(三眞設)에 기반을 둔 삼철설(三夙說)과 삼망설(三忘設)ㆍ삼도설(三途設)ㆍ삼법설(三法設)ㆍ삼아설(三我設) 및 천궁삼부설(天宮三府設) 등은 모두 이 삼일의 원리(三一之埋)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구원관(救援觀)은 인간은 누구나 삼진(三眞)을 받고 태어나 자라면서 삼망(三妄)을 받게 되므로, 삼법(三法)으로써 삼도(三途)를 닦아 원래의 삼진 상태로 돌아가면 바로 일신(一神)에 귀일(歸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망즉진(返妄卽眞)ㆍ삼진귀일(三眞歸一)의 교리이다.
경전은 계시경전(啓示經典)과 도통경전(道通經典)으로 나누어진다. 계시경전은 ‘삼일신고(三一神誥)’, ‘천부경(天符經)’, ‘팔리훈(八理訓)’, ‘신사기’ 등으로서 대종교 중광(重光) 이전에 한배검의 계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 도통경전은 ‘신리대전’, ‘회삼경(會三經)’, ‘삼법회통(三法會通)’, ‘신단실기(神檀實記)’ 등으로서, 계시경전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종사(宗師)들이 교리를 해설ㆍ주석한 것이다. 대종교의 교리를 살펴보면 유ㆍ불ㆍ도ㆍ교의 외래종교사상을 취사선택해 묶어 놓은 혼합 교리임을 알 수 있다.
대종교의 구원론은 자력적 방법과 타력적 방법의 두 가지로 인간의 구제를 말하고 있다. ‘삼일신고’의 진리훈(眞理訓)과 ‘신사기’의 교화기(敎化紀)에 의하면 사람과 만물은 모두 삼진(三眞)을 받고 태어나는데, 세 가지란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로서 이것이 사람의 본바탕이다. 그러나 육체를 지니고 삶을 이어나가는 동안에 삼망(三妄)이 생기게 되는데, 삼망이란 마음(心)·기(氣)·신(身)이다. 삼진은 삼망에 의하여 흐려져서 욕심이 생기고 병이 나고 죄를 짓게 되어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삼망을 억누르고 삼진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력적인 방법이고, 어떤 초월적인 힘을 빌려 삼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타력적인 방법이다.
자력적인 방법은 진과 망이 맞서서 세 길 감(感)·식(息)·촉(觸)이 만들어지는데 이 때 지감(止感)하고 조식(調息)하며 금촉(禁觸)하여 절제하고 금욕주의적 수행을 한다면 망을 돌이켜 진으로 들어가게 되어 성이 트이고 공을 완전하게 한다(性通功完)는 것이다.
 
▲ 중국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삼종사의 묘.     © 이창구 봉선 제공

<개천절 유일하게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
한편 개천절은 1900년 대종교를 중광하면서부터 경축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발족 첫 해인 1919년부터 국무원 주최로 음력 10월 3일에 ‘대황조성탄 급 건국기원절 축하식(大皇祖聖誕 及 建國紀元節 祝賀式’을 거행했다.
광복 후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도 이를 계승해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식 제정해 국가적으로 기리기 시작했다. 1949년부터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됐다. 단기연호 사용도 5․16혁명정부에 의해 폐지되었고, 1962년 1월 1일를 기하여 서력기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반만년 역사 가운데 얼마 안되는 독자적 연호를 쓴 짧은 시간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개천절의 의미도 희석되어 왔다. 역대 대통령중 개천절 행사에 참석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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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 2017/12/13 [22:40] 수정 | 삭제
  • 대종교에 대해 궁금증이 치솟아 오르다가 확 꺼지는 기분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416 민의를 짓밟고 군권이 망동한 516이 혁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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