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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강의●기독교가 바로 돼야
“원죄를 자손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신학에서 파생”
기사입력: 2014/04/04 [10:41]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엄해정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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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는 ‘같은 것이란 다른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이단이라고 헤프게 불러서는 안 된다. 자기하고 다른 것이 이단이라면 자기 자체 속에도 다른 것이 좀 많겠는가? 그렇다면 죄다가 이단일 것이다. 나 아니고서는 모두가 이단인 것이다. 한 가지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 ‘동야자이야’는 또 사뭇 ‘다른 것은 같다’는 뜻도 된다. 머리하고 발하고는 절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다르게 움직이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머리와 발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같다는 말 속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것이라도 따지면 다르고, 다른 것이라도 따지면 같은 것이 된다. 

성경의 ‘경(經)’ 자는 ‘항상 지낼 경’ 자로 항상 갖고 있다는 뜻이다. 또 ‘남이 남긴 길을 항상 줄곧 걸어간다’는 뜻의 경 자도 된다. 몇 백 년, 몇 천 년이 가도 지구 위에서 사는 사람은 다시 여기에 생각을 하고 또 하게 되는 그러한 뜻의 경 자라 하겠다. 선각자의 기록이나 말씀을 성경이라고 하는데, 나의 성경관은 몇 천 년이 가도 자꾸 사람들이 돌아보게 되는 말씀은 다 성경이라고 하고 싶다. 나는 적어도 신구약 성경은 성경으로서 오래 가도 버릴 수 없는 진리정신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신약성경을 위주해서 말하는데 신약의 말씀도 구약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경전도 다 구약성경과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오 5:44)고 예수는 가르쳤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듣기 어렵고 시행하기 어렵다. 역사는 너무나 미워할 것을 사랑 아닌 방법으로 그릇되게 미워했기 때문에 된 노릇이 하나도 없다. 미워할 것을 미워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따로 있다. 삼독(三毒, 탐진치)이 일어나는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삼독을 언제나 채찍질해서 다스려 나가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삼독을 잘 다스리는데서 성인(成人)이 된다.

 
▲ 미켈란젤로의 원죄 부분도.     ©

원죄는 三毒…잘 다스리면 성인돼
남 위해 죽은 사람은 예수 버금가
루터 뭐했나…性은 가톨릭이 옳아
종교, 많이 모이면 허식으로 흘러


요한계시록은 본래 내가 덮어놓고 보지 않으려고 한 것인데 이 세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떠들썩하고, 예수 믿는 자만이 부활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가 30대에 죽은 것이나 90살까지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남을 위해 죽은 사람, 억울하게 죽은 사람, 핍박받고 죽은 사람 이들은 모두 예수가 흘린 피에 못지않은 대속을 하고 죽어간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자기가 세수한 물을 성수라며 먹이는 등 예수의 이름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은 그 무슨 짓들인가? 끝없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재강림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릴 필요가 없었다. 영원한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데 대표할만한 하느님 아들인 예수는 참으로 혼자 산 사람이다. 예수는 대자연처럼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었다.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살아 온전한 사람 노릇을 했다.

믿음이란 밑바탕에서 밀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추리(推理)라는 말은 밀어서 자꾸 올라가는 뜻이다. 밀어나가는 것이 아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 자꾸 밀어나가면 훤히 트이는 데 이른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아는 것을 더 밝게 하는 것이 추리이다. ‘밀어 믿음으로’ 하늘 밑을 이 세상에서 들어 밀어서 하느님에게 닿을 때까지 올라가자는 것이 믿음이다. “하느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편 73:28 개역성경)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나는 좋사오니 이 몸 둘 곳 주님이시라 하신 일들 낱낱이 전하리이다.”(시편 73:28 공동번역) 내가 주 하느님을 피난처로 삼으면 그처럼 굳건한 반석이 없다.

여기서 행사를 전파하겠다는 것은 인생의 원칙이 이렇다고 분명히 깨달은 것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증거 하겠다는 것이다. 신구약 시대가 따로 있고 동서양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으로서 찾고 찾은 뜻을 집어넣은 것 그 이상 무엇이 없다. 인도교, 유대교, 기독교, 불교, 회교 또는 온갖 인생철학을 다 쥐어짜도 이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다. 인생으로서 깨닫는 데 이 위에 더는 없다. 

종교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얼나를 깨달으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거늘, 하느님의 권능이란 미명(美名)을 이용하여 이상한 소리로 부흥을 하려 한다. 그리하여 금이나 돈이 쏟아져 구체적인 돈·밥·옷의 부흥이 된다. 어쩌다 우연히 들어맞은 것을 보면 우리 동포들은 무슨 권능을 본 것처럼 돈이나 금가락지를 마구 내놓는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면 그냥 차에 실어 가지고 간다고 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들의 돈을 빼앗아 먹는 도둑놈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렇게 예수를 팔고 다니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이 괴로운 까닭을 원죄로 돌리는데, 이 사람이 늘 하는 얘기지만 원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독을 말한다. 우리는 이 삼독의 원죄를 피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따먹어서 그의 자손이 이같이 되었다고 자손들에게 죄다가 뒤집어씌우는데 그따위 말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신학으로 그렇게 생겨 나온 것이다. 스스로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면 알 수 있다. 못된 뿌리가 세 개가 있음을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삼독을 우리는 지워버리는 데 힘써야 한다.  예수는 잔치를 부정했다. 네게 반대로 답례할 수 있는 이를 잔치에 청하지 말라고 했다. 잔치는 아무리 잘해도 뒤죽박죽(斗祝薄祝)이 된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지만 개혁은 무슨 개혁을 했는가? 루터는 영웅형이다. 독일 같은 데서야 이런 영웅이 난 것이지, 이런 데서야 무슨 영웅이 필요한가? 나 같은 사람이 못하는 짓을 했으니 영웅이다. 마틴 루터는 제가 장가가고 싶어서 그랬다는 가톨릭의 말이 맞다. 루터와 칼빈이 개혁했다지만 개혁된 게 뭐 있는가? 오히려 성(性) 문제에 있어서는 가톨릭이 옳다. 로마서 8장 3절에서 6절까지에 있는 바울의 말이 옳다. 이 세상에서는 살[肉]이 아니고 얼로 살아 올[律法]을 옳게 이루려고 제가 애써야 한다. 제가 스스로 애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찬송은 난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할 때나 일할 때는 찬송이 참 좋은 것이다. 한 달 만에 우리가 만났는데 그저 만나서는 싱거운 일이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해결된 문제가 있으면 이를 증거 하거나, 또는 의심이 분명히 생겼다면 그것을 서로 주고받는데 의의가 있고, 만나서 반갑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새 것을 자꾸 서로 주고받아야지 하던 말 그대로 평생가야 새 것 하나 없으면 그게 뭔가? 그래 가지고서 만나면 무얼 하겠는가? 벌린 춤이라 안 추지 못하고 추는 체하는 게 이 세상이다. 목사, 중노릇을 일생 하는 것은 벌린 짓이라 안 하지는 못하고 하는 체하는 것이다. 그건 생명의 노래가 아니다. 

요새 불교, 기독교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신통이라는 기이한 것을 구한다. 종교가들도 제법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체한다. 그렇게 하다가 많은 사람이 입신(立身)하게 되면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으니까 제법 능력이 있는 것처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람들이 믿으면 많은 사람에게 전도한 게 되니까 좋다고 생각한다. 요새 종교란 게 다 이렇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교육적인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좋다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하는데 많이 모이면 도리어 허식으로 흐르거나 술주정과 난장에 빠지고 만다.

종교는 자유인데 어떻게 믿든 자기가 분명한 것을 믿으면 된다. 남의 말 듣고 믿으면 그게 무엇인가? 한 마리의 개가 의심이 나서 짓는데 다른 개들이 따라 짓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영원히 오고 가는 생명인데 마침내 한 생명으로 완성하는 그 생명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전체의 생명이지 어떤 시대 어떤 인물의 것이 아니다. 기독교를 믿는 자는 예수만이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다.

구약시대에도 그랬지만 예수도 이 세상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장가 시집가고 그러다가 멸망하고 마는 데라고 했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는 악한 게 더 늘어가고 있다. 악한 것이라 해로운 건데 이게 자꾸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 않는다. 이 몸과 맘의 제나[自我]는 수성(獸性)의 노예인데 짐승들이 모인 사회가 잘 되어 갈 리가 없다. 어쨌든 사람은 겉으로 나오지 말고 속으로 들어가 참나에 이르러야 한다.

제나로 죽고 얼나로 솟나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땅에 부딪친다. 그러나 예수가 위로 오르신 것처럼 나도 올라감을 믿는다. 예수와 나와는 이 점에서만 관계가 있다. 그 밖에 속죄니 하는 건 믿지도 상관도 없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이 몸을 사(赦)하는 지를 나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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