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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강의●죽음을 넘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4/25 [09:18]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

다석강의●죽음을 넘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4/25 [09:18]
 
“사형수 몸으로 다투다니 사람이란 도깨비 같은 존재”

죽음이란 줄 것을 다 주고 꼭 마감을 하고 끝내는 것이다. 줄 것을 다 주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죽음이다. 돈이 있는 사람은 모은 돈을 주고,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은 아는 지식을 주고 그래서 줄 것을 다 주면 끝을 꼭 맺는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은 모을 것을 모으고, 알 것을 알아서 이웃에 주고 가려고 나왔다.

외국 사람의 얘기를 들은 것인데, 어느 일본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파선(破船)하여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때 그 배의 선장이 죽기 바로 직전까지 배의 상황을 기록해 놓고 죽었다. 그 사람이야말로 죽음을 아는 사람이다. 소위 이것을 순직했다고 한다. 자기 직분에 순사(殉死)하는 이것은 그대로가 종교가 될 줄 안다. 하느님을 한 번 부르지 못하고, 예배 한 번 올리지 않았어도 이 사람은 무엇(진리)인가 찾고 들어갈 때에 (진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이러한 죽음을 택했으면 좋겠다. 삶의 길을 걸어가다가 하느님께서 삶을 그만두라고 하면, “왜요?” 소리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하느님 아버지이다.

장자(莊子)는 ‘외물불가필(外物不可必)’이라고 했다. 밖의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나의 의지만이 자유라고 한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기껏해야 좁디좁은 의지의 자유뿐이다. 이 땅 위에서는 하는 사업이나, 나라나, 세계나 다 제 맘대로 할 수 없다. 모두가 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물에 끌려 다닐 것 없고 외물에 종노릇 할 것 없다. “이따위 내 몸을 자른다 해도 겁낼 것 없다. 내 얼이 나를 영생케 한다.” 이쯤가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이다. 몸은 죽어도 얼이 하느님께로 간다고 믿는 것이다. 얼은 하느님의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이다. 죽는 연습은 영원한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다. 단식(斷食)하고 단색(斷色)하는 것이 죽는 연습이다. 우리가 몸으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요,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이다. 단식하는 것은 내 몸을 내가 먹는 것이다. 단식에는 금식(禁食)과 일식(一食)이 있다. 유대 사람들은 금식을 하고 인도사람들은 일식을 했다. 모두 죽는 연습이다. 몸으로 죽는 연습이 얼로 부활하는 연습이다.

▲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이다. 사진은 양화진 묘지의 모습.     ©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한다. 공자(孔子)도 지·인·용(智仁勇)이면 무서운 것이 없다고 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파지(眞理把持)에도 무서워하지 않는 정신이 들어 있다. 예수의 가르침도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몸나가 있어서 걱정인데 몸나로 죽고 얼나로 솟난 하느님 아들이 무엇 때문에 두려운가? 시편에는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이는 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한다.

인생은 무상(無常)하다. 무상한 인생이지만 이 무상한 인생에서 비상(非常)한 명령을 내려주신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은 미숙한 탓이요, 인생이 자족하다는 것은 성숙한 탓이다. 인생문제는 성숙해질 때 해결된다. 성숙이란 내가 아니면서 내가 될 때 이루어진다. 이는 제나(自我)에서 얼나(靈我)로 중생 부활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 동안 9억 번을 숨 쉰다. 숨을 들이쉬는 것이 사는 것이요 숨을 내쉬는 것이 죽는 것이다. 한 번 숨 쉬는 데 생(生)의 덧없음과 명(命)의 보통 아님을 볼 수 있다. 사람은 가끔 이번만 살려 달라고 기도를 한다. 씨가 들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렇다. 빈 쭉정이가 된 것이다. 쭉정이가 가지에 3년이란 말이 있다. 가지에 붙어만 있으면 무얼 하나 모양만 사납다. 나는 이번만 살려달라는 쭉정이 인생들의 남은 생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치 전과자들처럼 용서해주면 또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죽음 겁내는 것은 빚이 있기 때문
무덤 숭상은 守株待兎의 어리석음
生死 벗어나야 힘있게 살 수 있어



사람은 생사(生死)를 벗어나야 한다. 몸과 맘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빛나고 힘 있게 살 수가 없다. 사람은 좀 더 빛나고 힘 있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을 깊이 감추어 두었다. 이 영생의 씨앗(얼나)을 잘 길러서 제나를 초월해야 한다.


죽음이란 어린이가 만삭이 되어 어머니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지구는 어머니 배나 마찬가지다. 어린이가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있듯이 사람이 백 년 동안 지구에 있다가 때가 되면 지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어머니 뱃속에서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의 아들(얼나)이 충실하게 무럭무럭 자라 열 달이 차면 만삭공(滿朔空)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아들이 자라기 위해서는 식색(食色)을 절제하면서 하느님께 기도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입은 묵혀 두고 맘을 비워 둔다.

후손 끊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진리가 끊어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짐승은 종족을 잇는 것이 삶의 목적이지만 사람은 진리를 잇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석가는 자식을 기르려 하지 않고 제자들만을 길렀다. 진리를 이어 주는 것은 자식이 아니라 제자인 것이다. 실제로 후손이 끊어진 사람은 극히 적다. 그러나 정신이 끊어진 사람은 아주 많다. 단군 할아버지의 정신을 잇댈 사람은 삼국시대에도 별반 찾아볼 수 없었다.

반드시 화장(火葬)을 지내야 한다. 얼은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몸은 흙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재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무슨 삶의 흔적을 남기려고 할 것 없다. 영원한 것은 진리의 생명인 얼나뿐이다. 인도사람들은 이미 3천 년 전부터 화장을 지냈다고 한다. 그들은 전 인류의 선배이다. 예수는 영원히 사는 것은 얼이니 몸은 쓸데없다(요한 6:63)고 했다. 제가 묻힌 무덤을 천만 년 보존하면서 후손들에게 제사나 받아먹겠다는 쭈그러진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사람 노릇하기 틀린 것이다. 참나(얼나)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은 다 외물인데 무엇 때문에 참나 아닌 주검을 묻은 무덤을 숭상한단 말인가? 무덤을 명당자리에 쓰면 부자가 되고 고관이 난다고 하는데 이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으로 어떻게 새 시대에 적응할지 모르겠다.

죽음에 다다라서는 인생이란 싱겁고 우습다고 한다. 구약 전서에는 인생의 일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 하여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전도서 1:2)고 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우습다는 말의 연속이다. 우습도록 헛되면 웃고 그만두어도 될 터인데 죽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악을 쓴다. “약을 사오너라” “입원을 시키라”는 등 집안 식구들을 괴롭힌다. 나기 전부터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형수의 집행유예 기간이다. 사형수가 향락을 하다니, 요절복통할 일이다. 이 생명은 종당 죽음이 결정되어진 사형수들이며 이 죄수들이 못나가게 얽혀 매어놓는 곳이 가정이요 국가다. ‘처옥자쇄(妻獄子鎖)’란 말이 있다.온(溫)이란 죄수(囚)에게 쟁반(血)에 음식을 담아서 주는 것이 따뜻하단 말이다. 곧 이 세상은 우리 모두가 다 사형수의 처지로서 서로서로 위로해 주는 것이 따뜻한 일이다. 부귀공명이란 이 병든 세상의 한 증세다. 사형수의 몸으로 서로 잘났다고 다투다니 요놈의 사람이란 도깨비 같은 존재인지 모르겠다.

자살(自殺)을 죄라고 한다. 그것은 너의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라 내 맘대로 처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생명을 비워버리는 것을 시인한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 나는 그것을 좇아야 한다고 믿는다. 나도 죽인다는 것은 퍽도 안 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자살을 아주 손쉽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꼭 자살을 해야 할 경우 그러한 자리에서 못나게 죽음을 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죽는다는 것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 때는 죽어야 한다. 이렇게 죽어야 다음 대(代)가 좀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왜 죽을 것을 겁내는가? 우리가 빚이 있기 때문이다. 빚이 죄이다. 빚을 다 갚아 버리고 원대한 하나에 참례하면 군색할 것 하나도 없다. 원대한 하나(하느님, 전체)에 합쳐져야지 못 합쳐지니까 문제가 생긴다. 원대한 하나(전체)에 합쳐지는 것이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거다.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차마 말 못할 사랑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忍信仁三二)/ 그 가운데 벌려진 삼라만상은 참으로 좋아라(參差由來是)/ 그래 속에서 작은 아들인 내가 영원을 그리며 헤매는데(小子慕彷徨)/ 근본을 찾고 영원을 좇는 날개의 힘은 너무도 미약해(報本追遠微)/ 생각하고 추리하여 영원에 바로 들어가는 길은(推抽到直入)/ 자기의 속알을 깨쳐 제 뿌리로 들어가는 길뿐이라(自本自根己)/ 모르면서 아는 체함은 어리석고 고집일 뿐(不知知痴固)/ 아무 것도 모르는 자기임을 깨달아 신비의 아버지 만나리(知不知神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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