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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을 호법선신으로 포용한 불교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7/03 [15:35]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국불교의 산신신앙연구④

산신을 호법선신으로 포용한 불교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국불교의 산신신앙연구④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7/03 [15:35]

'三國遺事' 체제는 고려중기 일연(一然)에 의해 편찬된 책이다. 기술방법으로는 문헌과 현장 조사를 통해 자신의 사상적 토대위에서 고대사회의 생활양식을 체계화 한 것이며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종류도 각종 원시신앙, 신의 계시와 점복, 불양, 주술과 금기, 무불습합, 통과의례(기자, 태몽, 출산, 성년식, 결혼식 즉위식 장례식, 위령제, 환생), 생산기술문화(농업, 수렵, 어로), 물질문화(의식주), 표현문화(예술, 연희, 건축, 조각, 회화, 민요) 등 생활문화 내지 민속문화가 있다. 이렇게 다양한 고유(민간)신앙이 드러나고 있는데 삼국유사의 체제는 고유신앙의 흐름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확인된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드러나는 고유신앙이 바로 산신신앙이다.
▲ 산신이 호랑이를 지긋이 누르는 모습은 불교가 고유신앙의 흥기에 대한 경계하는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삼국유사 속 산신의 역할과 기능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산신신앙과 관련된 부분은 여러 곳에서 산견되는데 상호보완적 습합현상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산신과 관련 첫 기록은 단군신화에 등장한다. 산신의 최초기록인 단군신화에서는 환인(하느님)의 아들 환웅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弘益人間)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있는 신단수로 아래로 내려온다. 여기서 말한 산정은 하늘에 가까운 곳이고, 따라서 신이 내리는 곳이요 머물러 있는 곳이라 하겠다. 환웅이 산정에 내린 것은 신의 거처에 내린 것이다. 산신의 거처인 산신당은 산정이 아니면 산중턱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태백산은 성산이었고, 그 정상에 신단수가 있는 곳은 산신의 거처이며, 산신을 제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단군은 죽은 뒤에 단장당경으로 옮겼다가 이후 아사달로 돌아와서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 1908세였다. 단군이 산신이 된 것은 바로 신의 아들이 죽어서 신으로 되돌아 간다는 의미이고, 이는 산신신앙과 천신신앙이 연결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한국인의 기본신앙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호국신령은 어느 산의 신인지 명시되어 있으며, 나라에서 정해 섬기는 산신이 아니고서는 그 권능을 발휘하지 않는다.
농경사회로 발전된 고대국가에서는 부족 중심의 토템신앙이나 동물숭배의 차원을 벗어나 농경사회와 밀접한 하늘과 땅이 결합된 농경신적 산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산신은 국가적 통합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신격으로 곧 자연신이며 기능면에서는 수호신으로 보았다. 단군은 산신이 된 이후의 행적이 기록으로 전하지 않으며, 사망했다는 기록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불문하고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산신으로 숭배됨으로써 바로 창조된 체 영웅이 산신화하는 하나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불교 승려와 고유신앙의 교섭기에 보여주는 모습들을 살펴보면 상호 교류를 통한 상호 이해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당나라에서 덕경 등을 보내오자 대왕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과 삼산신들이 때때로 궁전 뜰에 나타나 모시기도 하였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 문루에 납시어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스님 한 사람이 헤어진 장삼을 입고 앵통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영접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소승은 충담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주겠는가.” 하니 스님이 이내 차를 달여 드리니 차 맛이 특이하고 찻잔 속에서도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이 이야기는 「안민가(安民歌)」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지은 충담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오악과 삼산신이 때때로 나타나 왕이 모셨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산신신앙이 왕실의 수호신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을 공양하는 것도 남산이 성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는「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조를 들 수 있다.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이 혼자서 보았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니 왕 자신도 춤을 추면서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신이 먼저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부(工人)에게 명해서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이라고 했다 한다. 혹은 상염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이 또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검이라 했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이라 했다. '어법집'에 말하기를, “그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했는데 ‘도파(都波)’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했다. 즉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한 것이다.
 
제사십구대 헌강대왕(憲康大王)이 개운포에 놀러 갔을 때 만난 동해용왕의 자손(처용)에게 관직을 주고 있다. 왕이 친히 개운포에 직접 찾아 용왕의 아들을 중앙으로 불러들인다. 용은 왕으로 상징되는 신성한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 동해 용의 자손을 중앙 귀족으로 편입은 개운포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아내와 직위를 주어 보좌왕정(輔佐王政)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력자로 만들고 있다.
 
용으로 상징되는 고귀한 세력을 자신의 휘하에서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 경주 남산 포석정(鮑石亭)에서 신과 함께 춤을 추고 있으나 주변의 신하 등이 알 수 없었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옥도검,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며 신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고유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알맹이는 ‘망아’상태이다. 이를 학술적으로는 ‘엑스타시’니 ‘트랜스’라고 부르는, 일종의 강신 상태를 동반시키는 환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에서도 이러한 망아 상태가 기본이 된다. 격한 음악의 반주에 따라 격한 춤을 추고 흥분된 상태에서 신이 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신을 맞을 상태까지 춤과 노래를 한 다음, 신의 강신을 받는 것이다. 즉 인간과 신의 상호 노력에 의해 결합이 이루어진다. 이를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런 신과 인간의 결합점이 무당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무당의 몸(身)은 인간과 신이 만나는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샤만은 인간으로서 죽은 람들의, ‘악령들’ 그리고 ‘자연의 영신들’과 친교하되 이들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기의 영들을 다스리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샤만도 때로는 ‘영신에 들릴’때가 있다. 샤만은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샤만들의 이러한 접신 체험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성층, 신화나 의례 구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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