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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전으로 치닫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역사적 관계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7/13 [18:18]
이스라엘 가자지구 공습, 2012년 '8일교전' 이후 최대규모 희생, 학살

전면전으로 치닫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역사적 관계

이스라엘 가자지구 공습, 2012년 '8일교전' 이후 최대규모 희생, 학살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7/13 [18:18]

이스라엘 청소년 3명이 지난 6월 팔레스타인 자치구인 헤브론 지역을 지나가던 중 실종된데서 발단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이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7월 3일, 실종된 이스라엘 청소년 3명이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에서 숨진채 발견되었고 이어서 8일부터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하마스의 로켓 기지 등 천백여 곳이 목표가 됐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은 이스라엘에 공습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하고 국제사회에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이스라엘 정부를 압박해 달라고 요청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에 앞서 이날 이스라엘 일간지 기고문에서 유대인 소년 3명과 팔레스타인 소년 살해 사건을 개탄하며 지금을 "위험한 순간"이라고 규정하고 양측에 자제를 당부했다고 AP 통신이 전했지만 미국 국무부 젠 사키 대변인은 "이스라엘을 겨냥해 이어지는 로켓포 공격을 강력히 비난한다"면서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어지면서 무력 충돌을 중단하라는 국제 사회의 압박도 커지고 있지만,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스라엘 가자공습 닷새째에는 사망자 157명으로 늘어났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시티 동부 투파와 남부 라파 지역 등을 공격하면서 하루에만 52명의 추가 사망자가 나왔고 50여명이 다쳤다고 AFP와 AP, 신화통신 등이 보도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 측은 부상자만도 1천60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AP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교전에 따른 하루 사망자로는 2012년 11월 '8일교전' 이후 이날이 최대 규모라고 전했다. 어린이를 비롯한 민간인들의 대량학살로 이어지면서 전면전 형태로 가고 있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습으로 인한 대량학살된 팔레스타인 어린이. '악한 평화 없고, 좋은 전쟁 없다'     ©

 
현대 종교전쟁·테러의 발단, 이·팔의 영토분쟁    

전면전으로 치닫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은 현대 종교전쟁, 테러 등의 발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현재의 영토는 이스라엘 영토가 아니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가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의 강제적인 분할 계획을 채택하여 실행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영토와 가자, 서안 등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는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다수가 무슬림이었고 10%는 기독교도, 유대인은 4%에 불과했다.

이·팔의 분대의 시초는 19세기 후반, '유대인 국가 건설'을 사명으로 하는 '시오니즘 운동'에 따라 유럽의 유대인들이 속속 팔레스타인 땅을 밟으면서 비롯된다. 특히 1930년대 독일 나치즘의 등장으로 유대인 대학살이 이뤄지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급증했고 토착 아랍인과의 충돌도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유엔은 1947년 총회 결의 181호를 통해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56.47%를 유대 국가에, 42.88%를 아랍 국가에, 예루살렘 국제지구로 0.65%를 할당한 후 1948년 10월 1일까지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 건설을 완료하라고 요구했다.

유대인들은 유엔안을 받아들였고, 1948년 5월 14일 데이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국가 창설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 지역의 87.5%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인구의 70%를 차지했던 토착 아랍인들에게 이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국가 창설 다음날인 15일 아랍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1948년 전쟁'이 발발했다.

전투력이 월등한 이스라엘은 1948년 전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78%를 장악할 수 있었고 이 지역이 현재 이스라엘의 영토에 해당하며 이로 인해 토착 팔레스타인인의 90%에 가까운 90만 명이 난민이 됐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차지한 78%의 영토를 공고히 하기 위해 '부재자 재산법'을 공포했다. 즉 원래의 거주지를 떠나 피난한 아랍인들의 토지를 강제 몰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귀환법'을 선포해 세계 각지 유대인들을 불러들였고 이들에게 거주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스라엘이 나머지 22%의 땅, 즉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 지역과 가자 지역을 '점령'하게 된 것은 1967년 전쟁을 통해서이다. 국제법은 전쟁을 통해 장악한 땅을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점령지로 규정됐다.

아랍국들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을 요청했고, 유엔 안보리 역시 1967년 242호 결의를 통해 이스라엘 철군을 요구했지만 이러한 국제사회의 요구는 아랍국과 이스라엘이 정해진 경계 내에서 평화를 유지할 것을 규정하고 있을 뿐, 어디에서도 팔레스타인인의 자결권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스스로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1969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주도하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조직했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점령에 대항해 1987년 1차 인티파다(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차 인티파다를 겪으며 1988년 세워진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는 PLO와 쌍벽을 이루며 이스라엘에 대항한 투쟁을 진행했다. 그해 PLO는 서안과 가자로 구성된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PLO와 협상을 시작했고, 1994년 PLO 파벌 중 파타당이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들 지역에 수립됐다.

1995년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무장공격 중단을 선언하면서 지역 분쟁은 한동안 수그러들지만 2000년 이 지역에 대한 최종지위협상에서 이스라엘 점령촌 제거, 난민귀환, 1967년 경계선 회복 등 팔레스타인의 요구를 이스라엘이 거부하면서 이-팔 협상은 결렬됐고 이는 2000년의 2차 인티파다로 이어졌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총선은 PLO 중심세력이 아니라 하마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스라엘의 계속된 군사공격으로 '무장 저항'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데다, 파타당의 부패에 실망한 팔레스타인인들이 하마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2005년 가자지구에서 철수했던 이스라엘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다시 봉쇄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선 유혈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분쟁을 이어가던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2008년 6월 6개월 간의 휴전을 합의했다. 하지만 휴전이 끝나는 날인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했다.  
    

테러단체인 하마스가 포함된 팔레스타인 통합정부에 이스라엘 반발 
    

한편 지난 6월 팔레스타인이 통합정부를 구성하기로 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갈등이 더 심화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대립해 무장정파 하마스와 온건파 파타가 7년 만에 통합 정부 출범을 공식 선포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크게 반발하는 이유는 팔레스타인 통합정부에 무장 테러단체인 하마스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파타가 지배하는 서안지구와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로 나뉘어 있었다. 파타는 이스라엘을 인정한 반면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실체를 거부하며 투쟁해 온 상황으로 이스라엘 정부는 통합 정부에 반발하며 앞으로 평화 협상은 없다고 선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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