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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과 로마 가톨릭의 종교암흑시대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7/16 [17:35]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일들2

로마제국과 로마 가톨릭의 종교암흑시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일들2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7/16 [17:35]

▲ 무소불위의 교황의 권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카놋사의 굴욕’     ©

1260년간의 천주교 전성시대
 
392년 가톨릭이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마침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자, 서로마의 정치적 공백을 로마교회가 대신하게 된다. 로마교회는 로마의 권위와 명성과 명칭을 물려받음으로써 서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실 예로 천주교의 깃발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538년 교황의 적대 세력인 아리우스파의 동고트를 정복함으로 교황권이 세계 지배에 들어가 중세시대 로마교회와 교황은 무소불위의 권한으로 세상에 군림하고, 그 군림은 프랑스 혁명 와중에 혁명군에 의해 교황이 바티칸에서 파리로 압송됨으로써 그 권위가 한풀 꺾이게 된다. 이를 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한때와 두 때와 반 때’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한다. 이 1260년의 기간 즉 538년부터 1798년 까지를 로마 가톨릭 전성시대 혹은 종교암흑시대라고 말한다.
 
로마제국과 로마 가톨릭을 하나로 보는 이유들
 
<동일한 조직 형태>
현재 교황청의 조직은 국가와 같다. 즉 각국 정부가 승인하고, 국방부, 재무부에는 장관이 있고 경호실이 있으며 각국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있다.

<교황이 국왕의 역할을 함>
서로마제국이 힘을 잃어가던 시기, 중앙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뭉쳤다. 교회의 정치 조직을 국가 조직으로 알고 로마의 주교를 교회의 교황으로 섬기게 된 것이다. 실제로 교황은 국왕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470년 교황 그레고리1세는 룸바르드족의 침입을 격퇴시켰다. 또한 그레고리1세는 “교황은 최고의 재판장으로 왕과 황제를 임의로 폐위할 수 있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세속 군주 권력 능가한 교황의 권력 
 
세속의 권력과 손을 잡은 로마 가톨릭의 위세는 날로 높아갔다. 그러나 중세초기까지는 유럽 각국의 국왕들과 로마 교황은 상호 존중하는 협조관계를 유지해왔다. 즉, 상호간의 고유의 권한영역을 인정하면서 세속적 문제와 정신적(영적)문제를 각기 행사해 왔으나 11세기 후반에 와서는 국왕과 교황간의 의견 충돌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관계가 점차 고조되다가 성직자 임명권이 각기 자기 권한이라는 주장을 두고 정면으로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이 바로 ‘카놋사의 굴욕’이다. 그 발단은 성직자 임명권은 교황의 권한에 속한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발표다. 이에 대해 발끈한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왕권도 역시 신이 직접 내린 것이므로 성직자 임명권이 황제에게 있다고 반발했다.
 
이에 교황은 다시 그해 12월 하인리히 황제에게 교황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황제는 이듬해인 1076년 1월 보름스에서 제국 국회를 소집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킨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교황은 오히려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다고 선언하고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황제와의 접촉을 금지시키고 신하들에게도 황제에게 충성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보름스 회의에서 황제를 지지했던 제후들과 성직자들이 황제를 배반하고 파문이 취소되지 않으면 1077년 2월 교황이 주최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를 추방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하인리히 4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 자신을 지지해주던 지지자들의 배신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재빨리 교황에게 무조건 항복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것만으로 불안함을 느낀 하인리히4세는 교황을 직접 만나 용서를 빌기로 작정하고 왕비와 왕자 그리고 몇몇의 신하를 거느리고 추운 겨울 라인강을 건너 알프스를 넘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고 한다. 이때 교황은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카놋사 성에서 휴양을 하고 있었다. 이 카놋사 성에 도착한 하인리히4세는 교황을 만나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교황은 막무가내로 거절하였다. 이렇게 되자 교황은 한껏 교만해져 황제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래서 황제는 카놋사 성문 앞에서 모자도 없이 맨발로 얇은 겉옷만 걸친 채 꼬박 3일 동안 서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는 하인리히4세 황제에게 접견을 허락하고 그 자리에서 ‘하인리히 4세와 제후들의 분쟁은 교황의 재정(裁定)에 따라 해결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비로소 파문을 풀었다. 이것을 ‘카놋사의 굴욕’이라 하는데 이것은 당시 무소불위의 교황의 권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 후 하인리히4세는 이 사건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슴속에 품은 채 귀국, 왕권강화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배반했던 제후들이 루돌프 황제를 옹립하자 하인리히4세와 그 지지 세력들이 이를 진압하고 반격하는 등 상황이 혼란스럽게 전개되었다.
 
교황은 다시 하인리히4세를 파문하고 루돌프 황제를 승인하기에 이르렀지만 하인리히4세는 이미 교회에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교황의 선언을 무효화했다. 황제는 로마에 쳐들어가 그리고리우스7세를 추방하고 클레멘스 3세를 옹립했다. 이후 이들 두 당사자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와 후임자들 사이의 보름스 협약에 의해 성직자 임명권은 교황에게 있고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임을 발표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권한은 여전하였고 특히 십자군 전쟁 때에 이르러서는 정점에 다다랐다.
또한 교황 인노켄티우스3세는 영국 존 왕을 굴복시켰으며 독일의 오토4세를 퇴위시키기도 하는 등 교황의 권력은 세속 군주의 그것을 능가했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은 교황의 권위가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게 되는 계기가 된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교황의 지위는 절대군주이면서 종교적 절대군주가 되어 사람의 영혼까지 관여하는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성경 다니엘서 7장25절에 예언된 대로 교황 즉,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랜 권력은 일단락된다. 1798년 프랑스 혁명군 베르띠에 장군에 의해 교황 피우스 6세가 바티칸에서 파리로 압송되어 발랑스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세속을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 교황의 권위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하나님과 그의 교회에 대한 제국 로마와 로마 교회의 행위들
 
성경 다니엘서 8장은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를 동일하게 보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소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 두 로마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실제적 역할에 대해서 성서 다니엘서는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 중에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범죄함을 인하여 백성과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것에게 붙인 바 되었고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단8:10~12)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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