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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와 미륵신앙(彌勒信仰)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7/24 [13:58]
미륵(미트라·태양신)이 유대교 히브리어의 ‘메시아’가 되었다

메시아와 미륵신앙(彌勒信仰)

미륵(미트라·태양신)이 유대교 히브리어의 ‘메시아’가 되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7/24 [13:58]

미륵의 인도어 Metteyya(메티아)가 메시아 가 되었다는 견해
 
중동의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페르시아 : 그리스와 마라톤 전쟁을 하고 알렉산더에게 망한 그 페르시아)을 설립한 키루스 2세(기독교 성경의 고레스 왕 · 키루스 = 태양이라는 의미)는 B.C. 539년 신바빌로니아(바벨탑과 공중정원을 세운 그 바벨로니아를 멸망시키는데, 이때 바빌론(수도)에는 바빌로니아에게 패망하고 본국(현재의 이스라엘 지역)으로부터 잡혀와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민족이 있었는데, 키루스 2세는 이 노예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준다. 키루스 2세는 점령지의 민족들에게 종교자유와 노예제를 폐지하게 했던 역사적으로 관대했던 제왕이다.
 
그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는 다신교였는데, 2개의 종교를 많이 믿었다. 조로아스터교(영어식 발음이고, 독일어식 발음은 짜라스투라, 불을 숭배)와 미트라교(태양신 숭배) 였다.
 
미트라! 즉, 이 미트라가 바로 불교, 인도의 미륵에서 온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를, 그가 믿는 종교인 미트라신을 빗대어서, ‘미트라가 유대인들을 구원해주었다’고 생각했고, 키루스를 미트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키루스 는 미트라(태양신, 미륵) 이다. 미트라(미륵)의 인도 발음이 메티아(Metteyya) 이고, 이게 유대교 히브리어로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
 
유대인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기독교의 예수)를 말하는 메시아란 말은, 인도 메티아 에서 시작된 말이고, 이것이 동양불교로 와서 미륵이 되었고, 페르시아로 가서 미트라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다시 유대인들이 메시아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미륵불과 미륵보살에 대한 불교신앙
 
미륵보살이 현재 머물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 신앙과 미래에 인간 세계에 태어나 중생을 교화기를 갈망하는 하생 신앙이 있다. 미륵은 인도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가르침을 받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고 도솔천에 올라갔다고 한다.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교화하다가 석가가 입멸한 지 56억 7,000만 년 후가 되면 성불하여 3회의 설법을 통해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특히 신라에서 미륵이 화랑으로 태어났다는 하생 신앙이 매우 성행했다.
 
고려 시대에는 화엄종이나 선종의 유행과 함께 미륵 신앙이 상당히 유포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미륵 신앙이 매우 성행했으리라 생각되지만 이에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다. 미륵 신앙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후천 개벽 사상과 결합되어 증산교 등의 신종교 운동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미륵보살이 현재 머물고 있는 도솔천9(兜率天)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신앙(上生信仰)과 미래에 인간세계에 태어나 중생을 교화할 미륵불의 구원을 갈망하는 하생신앙(下生信仰)이 있다. 미륵신앙이 의거하고 있는 한역경전(漢譯經典)은 6가지가 있으나 이중에서도 〈미륵상생경 彌勒上生經〉·〈미륵하생경 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 彌勒成佛經〉의 3가지를 중시하여 '미륵3부경'(彌勒三部經)이라 한다. 이들에 의하면, 미륵은 인도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서 석가의 가르침을 받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受記)를 받고 도솔천에 올라갔다고 한다. 지금은 도솔천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다가 석가가 입멸한 지 56억 7,000만 년 후가 되면 성불하여 3회의 설법(龍華三會)을 통해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삼국 특히 신라에서 미륵이 화랑으로 태어났다는 하생신앙이 매우 성행했으며, 백제의 경우에도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에 나타나듯이 미륵3존(彌勒三尊)이 연못 속에서 출현했다고 믿어졌다. 고구려에도 죽은 어머니가 미륵불의 용화3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발원해 미륵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미륵하생신앙이 성행한 원인은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으로 암울한 현실에 처한 백성들이 구원을 갈망했고, 또한 통치자 역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다스리는 시기에 미륵불이 출현한다는 경전의 예언에 근거해 자신이 곧 이상적인 왕임을 정당화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통일신라기에 들어서면서 미륵신앙에 대한 학문적 검토가 폭넓게 이루어졌는데 원효(元曉)·원측(圓測)·대현(大賢)·의적(義寂)·경흥(憬興) 등은 각각 미륵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종요(宗要)·약찬(略贊)·술찬(述贊)·요간(要簡) 등의 알기 쉬운 해석본과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한 각종 주석서(疏) 등을 저술했다. 이러한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미륵신앙은 아미타신앙과 결합되어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성덕왕대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관세음보살의 도움을 받아 각각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현신성불(現身成佛)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불교신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신라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미륵에 대한 찬양(경덕왕 때 월명의 도솔가, 충담의 차공양), 사찰건립(경덕왕 때 진표의 금산사와 법주사 창건), 미륵불 봉안(성덕왕 때 김지성이 죽은 부모를 위해 감산사에 석미륵상을 봉안한 사실, 경덕왕 때 왕이 백월산에 남사를 세운 뒤 미륵상을 봉안한 사실) 등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혼란한 후삼국시대의 사회상 속에서 미륵신앙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견훤은 금산사의 미륵불이 바로 자신이며 후백제야말로 미륵의 용화세계라고 주장했고, 태봉의 궁예 또한 자칭 미륵불로서 두 아들을 협시보살로 삼아 직접 불경 20여권을 만들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행한다며 대중을 현혹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화엄종이나 선종의 유행과 함께 미륵신앙이 상당히 유포되었다. 이때의 신앙형태로는 지배층의 경우 사찰건립이나 법회의 개최 등이 있었고, 민간에서는 미륵에 대한 공양을 위한 모임인 향도(香徒)와 결계(結契)가 활발했다. 향도의 예로는 태조 때부터 미륵사에 공신당을 두고 매년 법회를 개최한 일, 현종 때 미륵신앙을 중요시하는 법상종 승려를 위한 현화사 창건, 문종 때 흥왕사 내에 자씨전(慈氏殿)의 창건, 예종 때 미륵사에서의 법회 개최 등을 들 수 있다. 결계의 예로는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하며 해변에 향목(香木)을 묻어두는 풍습의 유행, 우왕 때 사천매향비에 나타난 1,000명의 결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미륵신앙이 매우 성행했으리라 생각되지만 이에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다. 오히려 미륵신앙과 무속신앙이 결합된 양상이 많이 보이는데, 이런 예로 숙종 때 여환(呂還)의 역모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근거로 하층민이나 노비층을 결속하여 역모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만큼 이상사회를 바라는 하층민들의 불만이 사회 전반에 확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륵신앙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후천개벽사상과 결합되어 증산교 등의 신종교 운동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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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주현 2017/01/08 [01:55] 수정 | 삭제
  • 천경지정 하정 경 정하 지하주 하요서. 미국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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