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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에서 산신의 수호자로 변화한 호랑이 형상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7/25 [07:05]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국불교의 산신신앙연구⑤(끝)

산신에서 산신의 수호자로 변화한 호랑이 형상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국불교의 산신신앙연구⑤(끝)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7/25 [07:05]

▲ 산신이 호랑이를 등받침 삼아 기대어 쉬고 있는 모습의 산신도.     ©

북극권이나 시베리아 그리고 아시아 여러 민족의 이데올로기나 신화, 의례는 이들 민족 샤만들의 창작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샤머니즘 이전 시대의 산물이거나 적어도 바로 그 시대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것들은 일반적인 종교체험의 산물이지 특별한 자질을 지닌 인물이나 접신술을 행할 수 있는 특권 계급의 산물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왕의 행동, 포석정에서 남산신과 춤을 추고 금강령 북악신, 동래전에서 지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것은 고유신앙에서 사제자(무속인)가 접신을 통해 신과 교통하고 신의 말(공수)을 자신의 몸과 입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왕이 접신을 체험하는 모습은 그가 신명을 몸으로 체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이다.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 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나는 바로 선도산 신모인데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네게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삼상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 육류성중(五三佛 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과 오악의 신군(신라 때의 오악은 동의 토함산, 남의 지리산, 서의 계룡산, 북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 또는 공산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을 위해서 점찰법회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 굴불지의 용이 황제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에 약사도장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불사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지혜에게 선도산신모가 나타나 공동으로 불사를 권유하고 있다. 단. 신라의 오악에 산신을 그려 봄,가을 점찰법회를 개최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도산 산신이며 동시에 도교의 술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도교의 선도산신모와 불교승려는 불사를 매개로 한 습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이면에서 일연은 습합의 중심에 불교를 두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배경이 다른 두 개의 종교가 습이체험을 통해 습합되어가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지만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신은 중국 가는 데 필요한 일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법사는 그 말에 의해서 중국에 갔으며,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에 널리 통달하고 유교의 학술까지도 겸해서 배웠다.....“내 또한 그대에게 계를 드리겠소.” 말하고는 이에 생생상제의 약속을 맺었다. 법사가 또 청했다. “신의 참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까.” “법사가 만일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가를 바라보시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소.”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속칭 비장산(臂長山)이라고 했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의 해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니, 나는 앞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고개에 사신할 것이니 법사는 거기에 와서 영원히 가버리는 내 영혼을 보내 주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다려서 가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한 것과 같고 숨조차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원광의 유학을 알선하고 수행에 방해되는 스님을 주살하면서까지 살펴준 산신(靈)이 늙은 여우의 모습으로 생의 마감을 보이는 것은 한 생명의 단순한 생의 마감을 보이기보다는 고유신앙이 불교로 습합되어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신은 생의 마지막을 눈앞에 두고 “법사에게 계를 준다.”며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원광과 주술승 그리고 삼기산신은 불교의 정착기에 보인 다양한 종교인들의 모습으로 고유신앙에서 불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과정을 짐작케 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신령은 불교와 무관한 고유신앙이다.

고유신앙의 토속신이 원광의 불교수행을 돕고 그와 세세생생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결의의 모습은 단순히 고유신앙을 대표하는 산신과 불교 수행자 원광과 두 사람사이의 언약이 아니라 재래의 고유신앙과 새로운 사상, 종교인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 습합(習合)하려는 고유신앙의 주류세력의 의지라 할 수 있다. 불교 공인이후 국가불교로서, 정교일치의 형태로 확산되어 오는 불교에 압도된 채 각기 불교를 채득하여 생존의 길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단계이며 토착신앙이 불교계에 압도되면서 대결의 과정 속에서 도태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의 전환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 안에는 불교와 고유신앙의 주체가 되는 산신과 다툼과 갈등 상호보완적 습합현상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교가 고유신앙을 수용하던 포용성의 자세로      

우리민족에 있어 산은 전통적인 취락구조에서 발견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공간개념이 아니라 삶과 죽음 이후를 이어주는 종적인 구조로 인식되어 있다. 산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자연재해, 동식물로 인해 피해는 두려움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같은 이중구조는 산에 대한 종교의식(宗敎意識)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 민족의 근원신화인 개국주 단군사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는 불교 전래 이후 산신을 호법선신으로 불교가 포용하게 된다. 고유신앙에서 산신의 존재는 호랑이 형상으로 표현되기고 했다. 불교세력의 정착기에는 사람형상을 띠게 되면서 기존의 호랑이 형상은 산신의 수호자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호법선신으로서의 산신이 불교화한 모습으로 다시 독립된 신앙의 모습을 갖추게 되어 사원 내에 산신각을 짓고 산신탱화를 봉안하게 되는데, 하단신중탱화의 하단 위목에 ‘봉청만덕고승성개민적주산신(奉請萬德高勝性皆閔寂主山神)’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산신탱화의 도설은 산신의 인격신과 그 화신인 호랑이가 그 내용이다. 산신의 화신으로서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일은 재래의 고유신앙이나 설화에서 자주 산견되는데 불교는 이러한 발상법을 받아들여 산신신앙으로 수용한 것이다.

아울러 도교,유교의 산신에서 불교 승려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통도사 산신의 경우에서 보이듯 산신이 호랑이를 한 발로 지긋이 누르는 모습은 고유(족)신앙의 흥기에 대한 경계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불교에서 산신신앙의 도입은 교세와 무관치 않다. 지금까지 산신도를 살펴보면 산과 무관하게 특정 산신도를 모사하는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산에 흐르는 기운에 의해 산신을 숭배하던 우리전통신앙과 배치되는 도상이였다. 불교가 산신을 비롯 고유신앙을 수용하면서 받아들였던 포용성의 자세로 일반인들의 신앙형태에 맞는 도상으로 신앙공간(산신각,산령각)을 내어줄 필요가 있다. (논설위원·삼국유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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