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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65주기 맞는 ‘파란 눈의 한국 魂 헐버트’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7/30 [12:30]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해 양화진에 영면하다

서거 65주기 맞는 ‘파란 눈의 한국 魂 헐버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해 양화진에 영면하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7/30 [12:30]
 
1949년 7월말 인천항,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백발이 성성한 한 미국인이 들어선다. 국군의장대의 사열과 국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는 감격스럽게 해방된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된다. 그 미국인은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한국명은 割甫또는 訖法. 1863~1949).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 언어학자요 역사학자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전 생애를 한국을 위해 바친 분으로 그를 흔히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라고 이른다.

헐버트 박사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븐에서 아버지 칼빈 헐버트와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목사 출신 아버지는 미들베리(Middlebury)대학 총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다트머스(Dartmouth)대학 창립자의 후손으로 명문가의 집안이었다.

헐버트 박사는 엄격한 도덕성, 인간중심사상 및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가훈 속에 성장했다. 그는 디트머스대학에서 수학하고 1884년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후 해외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그는 1886년(고종 23년) 6월 육영공원(育英公院, Royal English School)의 외국어교사로 초청받고 취임하고자 인천 제물포항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는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 육영공원은 고종이 영어와 서양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왕립학교였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그때 청년 헐버트는 한국을 보는 눈이 남달랐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매우 가치 있게 여긴 것이다. 그는 일본 대신 다나까가 약탈해간 국보 제86호 경천사 십층석탑 반환운동을 전개, 되돌려 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한글의 우수성과 위대성을 역사상 최초로 발굴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1891년)를 저술, 한글전용을 주장했다. 士民必知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할 지식이란 뜻이다. 주시경 선생과 함께 띄어쓰기를 강조하며 한글보급운동에 앞장섰고, 한성사범학교, 관립중학교(경기고 전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이 나라 근대교육에 초석을 놓았다.
1896년 고종이 즐겨 구두로 부르던 아리랑에 음을 입혀 작곡을 해 음악으로 탄생시킨 이가 바로 헐버트다. 최초로 서양음악 악보를 넣어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이다”라고 칭송하며 아름다운 아리랑 선율에 담긴 한민족의 정서와 비극을 정확히 풀어냈다. 『한국의 소리음악(Korea Vocal Music)』이라는 논문을 번역 발간,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는 아리랑과 관련 “워즈워드, 바이런 같은 유명시인 못지않게 한국인들은 모두 은유시인인 것 같다”고까지 높이 평가했다.

그는 또한 역사학자로서 한국역사에 대해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자신이 창간하고 주필로 있던 『The Korea Reviw(한국평론)』지에 4년여에 걸쳐 연재했고, 1905년 최초의 영문역사서 『History of Korea(한국사)』와 1906년 위의 저서들의 내용을 더 보완하고 한국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한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를 출판했다. 이 책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길잡이이자 한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더 없이 소중한 책이 되었다. 

사회운동가로는 YMCA 설립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산파 역할을 했고 당시 유일의 영문 월간 학술지인 『Korean Repository(한국휘보)』의 운영책임자로 활동했으며 『독립신문』창간을 도우면서 영문판 주필을 담당했다. 그가 운영하던 ‘삼성출판사’의 활자와 인쇄시설을 이용해 발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여러 업적 중에서도 모국이 아닌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헐버트 박사의 업적은 단연 압권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특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임명돼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도와 일제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고발했다. 그는 피스 클럽(Peace Club)에서 이위종이 연설할 수 있게 주선했으며, 일제의 부당성을 성토하는 언론활동, 연설활동 등 보이지 않은 역할을 했다. 회의 의장인 렐리토프(러시아)를 만나려 했으나 외교적 문제로 마찰을 빚지 않으려는 당시 국제 분위기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일제에 의해 1909년 미국으로 강제 추방당하고 만다. 헤이그 회의에서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미국에서도 그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국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언론을 통해 “을사늑약은 황제가 서명하지 않았으며 옥새는 강탈당했다”는 등 일제의 부당성을 성토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했다. 3‧1운동직후 미국의회에 ‘한국을 어찌할 것인가’란 진술서를 제출,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했다. 또 뉴욕 타임스(1915.12.12.)엔 미국정부의 을사늑약 묵인에 대한 헐버트박사의 강력한 항의가 실리기도 했다.  

안중근의사는 1909년 여순 감옥에서 사까이 경사에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며 그의 업적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특히 감리회 선교사로서 한국에온 그는 우리민족의 고유 ‘하나님’을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으로 해석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여호와 또는 야훼라 하지 않고 고유 신관인 하나님(한얼님=하늘님=하느님=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한국 선교에 다대한 성과를 얻게 된다. 그는 『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인의 하나님 신앙’에 대해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 양화진 언덕에 있는 헐버트 박사의 묘지.  © 매일종교신문
“한사람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죽을 지경에 빠졌을 때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순수한 종교가 입에서 터져 나오며 부르는 신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사람의 경우를 보면 표면상에 나타내는 여러 가지 외래 종교의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 깊이 숨어 있던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신앙은 외래 종교와는 별도의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원시적인 신앙도 아니다.
 
하나님은 천제(天帝)를 뜻하지만 모든 한국인들이 우주를 주재하는 일위신(一位神)으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철저한 하나님신앙[一神信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신자들이 믿는 하나님과 그 신관이 일치되므로 개신교 외국인 선교사들이 ‘하나님’이라는 신칭을 보편적으로 쓰고 있다. …한국인들 중 한 유교신자가 죽을 지경에 빠졌을 때 과연 그는 ‘공자님 살려주소!’하고 절규 하겠는가. …절망적인 벼랑 끝에서 그들이 한결같이 ‘하나님 살려주소!’하면서 몸부림친다.”
그는 한민족의 하나님을 분명하게 유일신 하나님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1886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미지의 세계인 조선에 첫발을 내딛은 이래 문명개화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땅에 문명과 정의, 자유, 평화가 만개하기를 바라며 온 생을 바쳤던 헐버트. 교육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 한글학자, 선교사, 황제의 밀사, 항일 독립운동가 헐버트.

그는 일제로부터 강제추방 당한지 40년 만에 노구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으나 오랜 여독으로 그만 8월 5일 한국도착 일주일 만에 서거한다. 8월 11일 서울 시청 옆 부민관에서 외국인 최초 사회장을 치렀다. 정부는 1950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는 평소 “나는 웨스트민스트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고 했는데 그의 소망대로 이 땅 양화진 언덕에 영면한 것이다.  그의 서거 65주기를 추모한다.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그는 진정 한국인이었다.(김주호 민족종교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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