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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수행으로 장애를 넘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8/23 [21:06]
현대불교 제6회 공모대상 수상 산행수기(임순기)

절 수행으로 장애를 넘다

현대불교 제6회 공모대상 수상 산행수기(임순기)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8/23 [21:06]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여름 방학 때의 일이다. 동생이 며칠 동안 절에 갔다 오더니 집에 와서 절을 하고, 벽을 보고 앉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를 취했다. 사찰 여름수련회에 가서 배운 절과 면벽좌선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불교와 접한 것은 금산군 보석사의 육바라밀 학생회에 나가면서부터다. 고3 가을이 돼서야 집안이 어려워 대학에 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장학생으로 뽑힌다면 보내줄까 하여 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나는 미대에, 동생은 야간대 전산과에 시험 봐서 합격했지만 대출을 받고 소까지 팔았으나 한 사람의 등록금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만 대학에 입학시켰다. 동네 사람들은 ‘형을 보내야지 동생을 보내느냐’고 말렸지만, 아버님께 여쭤보지도 않고 동생을 학교에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화실에 가고 싶다고 아버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다. 아버지는 형편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나에게 물려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버텼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간절했다.     

가난으로 화가, 장애로 스님의 꿈 접다    

그 이듬해 동생이 군에 가게 되어 대학시험을 다시 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런 현실에 눈앞이 캄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보석사 스님을 찾아가 머리를 깎겠다고 했더니, 스님은 그 자리에서 책 한 권을 건네주셨다. 나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은 스님이 될 수 없었다.

그 후 답답하고 힘들면 부처님을 찾았고, 불교에 관한 책은 잡히는 대로 읽으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1년 후 자립할 길을 찾기 위해 서울삼육직업훈련소에 입소해 1년 동안 귀금속세공기술을 배웠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최우수 수련생이 되어 압구정동 귀금속공장에 취업하였다.

삼육직업훈련원은 안식일교회 재단이라 일주일에 두 번씩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취업한 공장의 사장님도 집사님이라 매주 월요일이면 직원들이 예배를 드렸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참여해야 하는 예배시간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던가. 지루한 고통에서 헤어나는 나만의 방법을 생각해 냈다. 예배드리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끝나기가 무섭게 옥상에 올라가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가게 사장님께서 “네가 교회에 다니면 공장이 더 잘 될 텐데….” 하시면서 교회에 나갈 것을 은근히 강요할 때는 당장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견뎠다. 서울 금방에 취직했다고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물러날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을 바꿨다. ‘할렐루야’나 ‘아멘’이 ‘관세음보살’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글자나 소리에 너무 얽매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예배시간에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기독교 교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13년간의 예배시간이 지금 내가 포교사의 길을 가면서 타 종교인들을 포교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직장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함께 일하는 기술자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어렸고, 중증장애가 있는 나는 사람들의 눈총을 많이 받았다. 척추장애에다 우측다리가 10㎝ 짧고 신경이 거의 없는 나에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심한 말을 들어도 부처님께 의지하며 참고 참았다. 밤에는 주로 불교 책을 읽었다.    

기독교예배 참석 포교활동 도움 줘    

월급 8만 원을 받았다. 백반 한 그릇이 1300원 할 때다. 공장바닥에서 잤기 때문에 방값 걱정은 안했으나 교통비와 책을 사노라면 밥을 사 먹을 수 없었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라면을 끓여 도시락을 싸온 동료와 나누어 먹고, 저녁은 밥을 해서 점심 때 남은 동료들의 반찬을 모아 국을 끓여 먹었다. 주위에선 더러운 것을 어떻게 먹느냐고 했지만 <반야심경>의 불구부정(不垢不淨)을 염하고, 선지식들의 걸림 없는 의식주를 많이 접해서인지 이겨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불규칙한 식사와 과로로 신경성 만성위염 진단을 받았다. 약도 먹어야 하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야 낫는다고 했다. 직장 근처에 있는 압구정동 동산반야회 포교당을 찾아가 <천수경>을 아침저녁으로 독송하기 시작했다. 100일을 하고 나니 마음도 편안하고 소화도 잘됐다.

<금강경>에 심취하여 금강경독송회에도 열심히 다녔다. 야근을 마치고 밤 11시에 집에 와서 자다가 새벽 3시 30분까지 법당에 가기 위해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곤 했다. 한 달이 지났을까. 목이 이상해 병원에 갔더니 몸 상태가 최악이라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정상인과 다른 내게 맞는 기도법을 찾아야 했다.

주위에선 나에게 절 잘하는 장애인이라고 했다. 내 몸으로 3천 배를 했다고 하면 믿질 않았다. 동산반야회에서 기초교리를 배우던 14년 전 조계사 대웅전에 들어가 3배를 한 후 7배를 하고 21배를 하다 보니 108배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 108배를 하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양팔과 성한 다리가 후들거려 굴렀다. 다음날 땅바닥을 기어 다니다시피 했지만 부처님 전에 108배를 했다는 뿌듯함에 마음이 즐거웠다. 이런 체험 덕분에 절을 자주 하게 되었고, 요령이 생겨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5년 전 동산법당에서 여름과 겨울 한 달간 3천 배 정진할 때 퇴근 후 매일 200~700배를 하여 총 1만 500배를 하고부터 절에 자신감을 가졌다.

지난해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KBS방송국 PD로부터 “부처님 오신 날 특집으로 화계사에서 개최하는 3천 배 정진법회에 동참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 때까지 한번에 700배 정도는 했으나 그 이상은 자신이 없었다. 또 척추에 특별한 이상은 없으나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척추에 파스를 붙이고 자던 때였다.     

3000배 한 최초 장애인    

PD는 다양한 사람들의 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래서 500배까지 하고 가능하면 1080배까지 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앞에서 절하는 스님 속도에 맞추어 절을 했다. 50분하고 10분 쉬었다. 500배를 지나 1천 배를 하고 1500배를 넘어서자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하나 남은 다리마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때부터 앞에 있는 카메라가 보이지 않았다. 무릎 감각이 없어지더니 따끔거리고 척추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PD가 말했다.

“힘들어 보이는데 그만 하시지요.”

나는 그때 “불교에는 백척간두에 진일보하라는 말이 있지요. 지금 한 배 한 배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절하고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PD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한 배만 더 한 배만 더’ 하다 보니 쉬는 시간이 되었고, 새벽 4시가 되어 끝마쳤다. 지도하신 스님은 죽비를 내려놓으시며 화계사에서 3천 배 정진법회를 시작한 이래 끝까지 마친 장애인은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묘한 일이었다. 3천 배를 마치고 나니 몸이 가벼웠다. 그 후부터 척추에 파스를 붙이지 않고 있다. 요즘도 장애가 생겨 힘들 때가 많지만 절에 가서 기도하고나면 고통이 사라져 행복을 느낀다.

몇 년 전부터는 월 1회씩 군부대를 찾아가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처음 창고를 개조한 법당에서 시작할 때는 20명이 채 안 되던 군인이 요즘은 100명이 넘어 법당을 신축하고 있다.

내가 만일 부처님 법을 만나지 않았다면 가진 것 없고 몸이 부자유한 장애인으로서 삶의 여유를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내 주위를 원망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지난여름 한 달간 인도 배낭여행을 가서 ‘장애인의 몸으로 남은 생을 무엇 하며 살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컴퓨터를 배워 작은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나의 신행경험이 삶의 고해에서 방황하고 있는 중생들에게 한 방울의 맑은 물방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홈페이지 이름도 ‘장애바라밀’이다. ‘장애를 넘는다’는 뜻이다. 사실 난 육체적인 장애보다 내 안에 있는 나와의 싸움이 더 힘들다. 하지만 그 장애를 넘을 때까지 수행하며 이 길을 가련다. (정리: 이화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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