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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기석전대제부터 변하는 것들과 그 의의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8/28 [14:34]
9월 3일, 일자· 아악· 춤 등 복원해 성균관서 봉행

올 추기석전대제부터 변하는 것들과 그 의의

9월 3일, 일자· 아악· 춤 등 복원해 성균관서 봉행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8/28 [14:34]

▲ 예년의 추기석전대전 봉행 모습     © 매일종교신문
성균관에서는 공기(孔紀)2565년(2014년) 추기석전(秋期釋奠)을 9월 3일 오전 10시 성균관 대성전에서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지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한편 일자를 변경하여 봉행한다.    

문화재청의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지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라”는 요청에 따라 성균관은 올해부터 일무와 아악을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지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며, 예전부터 석전은 중춘(仲春), 중추(仲秋) 상정(上丁) 일에 변함없이 꾸준히 모셔온 예법에 따라 2᛫8 상정(上丁) 석전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원형복원에 가장 중요한 제례악무는 국립국악원, 국립국악고등학교, 문묘일무보존회가 참여한다. 이번 석전의 초헌관은 서정기 성균관장이, 아헌관에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종헌관은 조찬희 부관장이 맡아 거행된다.    

한편 석전은 중춘(仲春), 중추(仲秋) 상정(上丁) 일에 변함없이 꾸준히 모셔져 왔으나, 2007년부터 석전(釋奠)을 공자님 돌아가신 날(양력 5.11)과 탄강일(양력 9.28)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석전은 춘(春)에 관(官)이 석전우기선사(釋奠于其先師)한다고 <예기(禮記)>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종대왕 시대에 국법으로 춘추이중상정(春秋二仲上丁)으로 시일을 확정하였으며, <태학지(太學志)>에도 석전은 중춘추상순정일(仲春秋上旬丁日)이라고 분명히 밝혀져 있는 오래된 태학(太學) 전통의 헌장이다. 이에 성균관은 2᛫8 상정(上丁) 석전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문묘석전의 아악은 해방 이후 국립국악원 악사가 연주하였으나 2007년부터 중앙대 예술대학 전통예술학부 음악예술전공 학생들이 연주하였다. 그러나 30대 서정기 관장이 취임하여 올해부터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지정 당시 연주한 국립국악원 악사들이연주하기로 했다.     

석전대제의 춤(일무) 연행의 변경도 있다. 문묘석전의 춤은 공부자의 문덕(文德)과 무덕(武德)을 몸동작으로 형용한 것인데, 2007년부터 성대 무용과 학생이 춤추며 그 춤사위가 상당히 바뀌었다. 이 역시 문화재청이 요청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의 것으로 환원한다.     

석전의 교육적 의의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전(釋奠)은 성균관과 전국 234개 향교에서 공부자(孔夫子) 및 사성(四聖)과 우리나라와 중국의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육현(宋朝六賢), 아국십팔현(我國十八賢)께 올리는 제례의식이다.    

선성과 선현들의 학문과 인격과 덕행과 사상을 단순한 이론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숭모(崇慕)하고 존중하며 스승을 높이고 기리기 위하여 문묘에서 봉행(奉行)하는 의식이다.    

선성선현에 대한 제사의식인 석전이 예로부터 학교에서 봉행되어 내려온 것은 유학의 독특한 성인관(聖人觀)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누구든지 배워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의식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 똑같이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 같은 자질은 마치 씨앗과도 같은 것이어서 부지런히 배우고 노력하면 싹을 틔우고 결실을 맺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바탕으로 성립한 송대 성리학 역시 이 같은 기본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으며, ‘배움을 통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사상이다.    

이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표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인 도덕적 실천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주는 것으로서 유교 사상의 중심사상으로서 장구한 세월에 걸쳐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유학의 독특한 성인관으로 인하여 배움의 장소인 학교에서 석전을 봉행하는 의식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선성선사들은 배워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였거나 혹은 성인의 경지에 가깝게 도달하였던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현의 위패를 배움의 터전인 문묘에 모셔놓고 후학들이 성인이 되기를 다짐하는 의식이 곧 석전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태학(太學)에 들어온 사람은 반드시 선성선사에게 석전을 봉행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석전의 유래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太學)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이때 석전도 함께 봉행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신라에서는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인 서기 648년에 김춘추가 당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의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했고 신문왕(神文王) 2년인 서기 648년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성덕왕(聖德王) 16년(717년)에는 태감(太監) 김수충(金守忠)이 당으로부터 공자와 10철(十哲, 공자 제자중 학덕이 뛰어난 10인) 및 72제자의 영정(影幀)을 가져와서 국학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고려에서는『고려사(高麗史)』에 보면 국자감에서 석전을 행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성종(聖宗) 2년(983년) 박사 임성로(任成老)가 송으로부터 공자묘도(孔子廟圖) 한 폭과 제기도(祭器圖)1권,『72현찬기(賢贊記)』1권을 각각 가져와 성종에게 올렸으며 현종(顯宗) 11년(1020년) 8월에는 최치원과 설총을 동무서무 종향하였다. 예종(叡宗) 9년(1114년) 6월에는 사신 안직승이 귀국할 때 송나라 휘종(徽宗)이 신악기와 악보 및 지결도(指訣圖)를 보내 주었다.    

고려조에서는 이 악기를 받을 하례사(賀禮使)로 추밀원(樞密院) 지주(知奏) 왕자지(王子之)와 호부(戶部) 미중(微中) 문공미(文公美)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을 통하여 송나라에서는 휘종이 조서(調書)와 함께 대성아악을 보내 주었다. 충렬왕 30년(1304년) 6월에 고려의 국도 개경에 있던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였다.    

조선태조는 도읍지를 건설할 때부터 태학을 건립할 계획을 갖고 수도의 동북쪽 언덕에 학교부지를 골라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에게 명하여 관장토록 하였는데, 건물의 총 규모는 모두 96간이며 전토(田土)를 두어 제수를 공급케 하고 태학 생도가 청소하여 깨끗이 유지하는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교육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태조(太祖) 7년(1398),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해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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