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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듣는 다석강의●얼사랑(仁愛)에 관하여
하느님이 眞我…자꾸 거듭 나야 참나에 이르러
기사입력: 2014/10/10 [08:29]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이중목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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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이해타산으로 싸우기를 좋아하는데 싸울 대상은 자기이지 남이 아니다. 자기를 이겨야지 남을 이기면 무얼 하나. 그런데 세상에는 남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온 세상을 깔고 앉아 보아도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얼나)은 멀다.
 
남을 이기는 것은 나와 남을 죽이는 일이요 나를 이기는 것은 승리요 생명이다. 참을 찾아 올라가는 길이 나를 이기는 승리의 길이다. 남을 비웃고 사는 것을 자꾸 익히고, 남 위에 서기를 자꾸 익히고 있다. 우로(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옳은 일을 버리고 남 비웃기를 익히는 씨알들이 뭉친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 이 나라가 그러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베드로전서 3:17)
 
좋은 일하고 곤란을 받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므로 그리 알라는 말이다. 잘하는데 욕을 보다니 그러한 말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이것이 하느님의 깊은 뜻이다. 이 편지에 이 같은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편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악을 행하여 고난을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하여 곤란을 받는 것이 낫다고 했다. 타락된 사람에게는 특히 잘 보아둘 구절이다.
 
이때까지 선을 행했는데 대접이 겨우 요것뿐 인가? 나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왜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나? 성경을 읽거나 기도할 때에 이런 생각이 따라와서는 안 된다. 아무 집사람은 부자가 되고, 아무 집 아들은 유학을 가고, 아무 집 사람은 장관이 되고 이런 생각은 바로 나아가는 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딴 뜻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곤란 받는 것이 악을 행하여 받는 고통보다 낫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나를 높은 생각의 지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 열성을 낸다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베드로전서 3:13) 17절에는 선을 행하면 곤란을 받는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누가 해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는 필시 해를 입어도 이것이 해가 아닌 것을 결정 내리자는 것이다. 참나(얼나)를 낳아 영원한 생명(얼나)에 이르는 데는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순이 있다.
 
구정 설날이 되어서 길에는 아이들이 울긋불긋 설빔을 차려입고 다닌다. 어른들은 얼근히 취해서 호탕하게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한 반면에 신문보도에 의하면 섣달그믐에 살기가 어려워 목숨을 스스로 끊은 이가 있었다 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편에서는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편에서는 음식을 많이 차려서 지나치게 먹고 배탈이 나서 소화제를 찾고 의원을 부르고 야단법석을 한다. 사람의 수는 점점 많아지는 형편인데 물욕은 격증하고 서로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해서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사회가 유기체(有機體)로서 그 기능을 잊어버린 지 오래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에는 옛날보다 유기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자살과 같은 슬픈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유기체가 어디에 고장이 나거나 어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답답해서 말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본래의 나인 참나(얼나)를 모르고서는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겠는가? 참나(얼나)를 모르고서 어떻게 사회에 사랑이 깃들 수 있겠는가? 사랑이 있어야 유기체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근본 나(얼나)를 모르고 있는 이 사회가 유기체가 될 수 없다. 어디가 아픈 곳인지? 어디가 쓰린 곳인지? 어디가 가려운 곳인지? 어디가 한스러운 곳인지? 전혀 모르면서 어떻게 사회가 유기체로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참나 모르면 이웃 사랑 못해
잘하고 욕보는 게 하나님 뜻
악행 후 고통 받기보다 나아
 
▲ 얼마나 거듭나야 참나에 이를 수 있을까. 언제나 묵묵하고 정중동의 저 산이 그 답을 알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은 늦가을의 서울 관악산 전경.     ©


사람은 누구나 빈 맘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空心觀世]. 맘을 비우고 세상을 보면 복음(福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상을 바로 보는 사람에게는 복된 소리가 들려야 한다. 어느 의미로 보아서는 정말 남의 선생 노릇을 하는 지도자는 선지(先知)의 성격을 꼭 가져야 한다고 본다. 선지의 삶을 사는 이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없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을 바로 보게 된다. 세상을 바로 보는 가운데 생각이 나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 관세음(觀世音)이다. 이렇게 되어야 참으로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도와 줄 수가 없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이다. 마음이 깨끗하고 바르게 살면 복을 받게 마련이라는 것은 히브리 사람의 신앙이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축복하시거늘’(시편 73:1)이라 했다.
 
생명을 가진 이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하여 나가는 것이다. 내가 바로 되고 안 되고는 무엇에 달려 있느냐 하면 영원한 님(하느님)을 찾는 사랑의 힘을 가졌느냐 못 가겼느냐에 달려있다. 제 속에 속알(얼나)을 찾아 얼의 나라(하느님)를 찾으면 얼사랑(仁愛)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낳아서(重生) 하느님 나라를 찾자는 것도 근본은 얼사랑을 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자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을 자꾸 거듭나는 길밖에 없다.
 
다섯 자(尺) 몸End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게 우로 솟나자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 되시는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두는 것이다. 머리는 생각한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을 내 머리로 받드는 것이다. 하느님이 참나(眞我)이기 때문이다. 얼나로 으뜸이 되어야 하는데 철이 없어서 이 세상에 머리(元首)가 되려고 한다. 그러다가 머리가 무거워서 감당을 못하여 굴러 떨어진다. 주역(周易)에는 이 세상에서 머리(지배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예수도 섬기는 이가 되어야지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석가는 세상의 머리(임금)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접과 공경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대접이란 고이는 것이고 공경이란 높이는 것인데 고이면 높아지고 높아지면 고여야 한다. 공경이 없는 대접은 쓸데없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고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필요하면 고인다. 그것은 이용이지 공경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실정은 먹을 것을 많이 갖다놓는 것이 공경인 줄 아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많이 먹여 배탈 나게 하는 것은 공경도 대접도 아니다. 가축으로 대접하는 것밖에 안 된다. 참으로 공경하고 대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온 하느님의 아들인 속사람(얼나)을 알아주는 것이요 내 속에 속사람(얼나)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인(聖人)은 그의 속나가 하느님의 얼이라 얼나로는 하느님과 하나이다. '내가 이만하면 제법 크지'라고 말하는 이는 다 같잖은 이들이다. 이 조그마한 사람에게도 신령(얼나)한 게 있는데 이 우주에는 더 큰 신령한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유교의 하느님 사상이다. 사랑(仁)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성경에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하느님께서 무슨 꼴(형상)이 있을 리 없다. 그 꼴(image)이란 사랑(仁)인 것이다. 사람이란 하느님을 찾아 마침내 제 맘속에 있는 얼나를 밝히는 것이다. 성경에 예수가 구하라, 찾아라 두드리라는 게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얼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기도는 영원한 진리(얼나)를 추구하는 것이다. 유교도 계시 받을 것 다 받았다.
 
아무리 오래 같이 있어도 남의 영혼을 못 본다. 이것이 서러운 일이다. 눈은 들창이고 코는 굴뚝이다. 남을 안다는 것은 결국 들창 보고,굴뚝 보고서 그 사람을 알았다는 것이다. 들창이야 종이로 발랐건 유리를 끼웠건 또 굴뚝이야 옹기로 했건 벽돌로 쌓았건 무슨 상관인가? 사람을 알았다는 것은 결국 어느 집에 가서 들창과 굴뚝을 한 번 보고서 그 집을 알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건 알았다고 할 수 없다. 서로의 속알을 내놓는 것같이 좋은 일이 없다. 동지(同志), 지기(知己)라는 게 서로 속알을 내놓는 것이다. 얼의 골짜기라고 얼굴인데 얼 굴 속의 얼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남의 얼을 못 보고 그저 가긴가?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할 것은 이 사람도 아무도 못 만나고 갔구나. 나도 누구하나 못 만나고 갈 건가 하는 생각이다. 누가 남의 속을 아는가? 가장 가깝다는 부부사이도 서로 모르고 산다.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도 못 만나고 그저 왔다 간단 말인가? 남을 알아주려면 먼저 자기를 알아야 한다. 제 속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인 얼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얼나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을 알면 남의 얼나도 알 수 있다.
 
얼이 얼려야 어른이다. 하느님과 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 마음에 하님의 성령이 충만한 어른이 돼야 한다. 하느님께 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생명인 얼을 넣어준 것은 얼을 빠뜨리라고 넣어 준 게 아니다. 얼나가 임자 된 어른 되라고 얼을 넣어 준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귄다는 게 낯바닥 익히는 데서 그친다. 깊이 얼을 알려고 안 한다. 이게 기가 막힌다. 그저 얼굴이 훤히 생기면 그게 좋단다. 얼굴이 보살같이 생겼으면 그대로 믿어버린다. 우리가 얼굴에 막혀서 이런 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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