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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풍수●호남의 3대 영지 부안 월명암과 부설 거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0/12 [08:09]
변산반도 지기가 우뚝 멈춰 선 산상 최고의 양택지라

명당풍수●호남의 3대 영지 부안 월명암과 부설 거사

변산반도 지기가 우뚝 멈춰 선 산상 최고의 양택지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0/12 [08:09]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호남의 3대 영지로 손꼽히는 곳, 부안 월명암. 틈날 때마다 전국의 명풍수들이 다녀갔고, 근대에도 한암·용성·서옹·탄허 대종사 등 고승대덕들이 입산하여 찬탄한 명당이니 좌청룡, 우백호를 논하고 안산과 조산의 높이를 말함이 구차한데….
 
평생을 붙잡고 풀려 해도 해법이 없는 난제가 ‘사는 게 뭐냐’는 화두다. 그래서 옛 선지식善知識들은 섬광 같은 찰나의 깨우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육신공양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치열한 투신수행 끝에 얻어지는 한순간의 마음소리는 벽력같이 내지르는 외마디 ‘할’이었다.
 
“절간은 부처 잡아먹는 곳이다.”
1천3백여 년 전 부설浮雪 거사는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니라면서 이렇게 읊었다.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此竹彼竹化去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風打之竹浪打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粥粥飯飯生此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是是非非看彼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賓客接待家勢竹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시세대로市井賣買歲月竹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萬事不如吾心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보내세然然然世過然竹
 
가녀린 미풍에도 사각거리는 대나무에 인생을 견준 유명한 팔죽시八竹詩다. 대나무 소리 음운을 따라 ‘대로’ 읽은 재치와 일상적 삶을 초탈한 도통경지가 엿보이는 선시禪詩다. 국문학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생활상과 시장 모습까지 살필 수 있는 의미 있는 시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대 우리말 형태를 가늠해 볼 수 있게도 한다.
 
세파에 부대껴 마모된 흔적이 역력한 이 시를 쓴 부설 거사는 원래 불국사에서 출가한 걸출한 스님이었다. 서기 647년(신라 제28대 진덕여왕 1) 서라벌에서 태어났으며 해동성사로 일컫는 원효(617~686)·의상(625~ 702) 대사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런데 왜 역사는 원효와 의상만 전면에 부각시키고, 부설은 뒷전에 밀쳐놓았는가. 그가 변산반도 봉래산 쌍선봉 아래 월명암을 창건한 큰 뜻은 무엇이었을까.
 
▲ 지척을 분간 못 할 해무에 휩싸인 도량 경내. 서해낙조와 바다 안개를 품에 안을 수 있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예부터 고찰에 와서는 풍수를 논하지 말라 했다. 양기풍수의 명당 터와 관계없이 천지신명을 떠받드는 신장神將이 지키고 있어 일체 사기邪氣를 제압하기 때문이다. 욕심 없이 비워낸 수행심으로 산천을 관조하면 보이는 그대로가 혈처여서 절집은 늘 명당 위에 앉아 있다. 이래서 풍수 가운데 사찰풍수를 으뜸으로 여겨 왔다.
 
“올라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월명암 부처님을 친견하려면 정성을 많이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부설 거사의 수행혼이 곳곳에 스민 장엄도량이니까요. 순간의 의식을 끊어 생각을 내다버리면 그분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이곳입니다.”
 
주지 천곡天谷 스님이 반기며 하는 말이다.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호남의 3대 영지로 손꼽는 월명암은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로 다툼이 없는 곳임을 강조한다. ‘부설전(전북유형문화재 제140호)’을 내놓으며 1천3백여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부설의 속명은 진광세陳光世로 14세 때 불국사로 입산해 영조, 영희, 도반道伴과 함께 원정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6년을 공부한 셋은 뱃길로 중국 유학길에 나섰다가 표류되어 남해 바다에 정박하고 말았다. 전국 명산대천을 순례키로 마음을 바꾼 이들이 전북 김제군 성덕면 고현리(일명 부서울) 만경 뜰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앞을 분간하지 못할 폭우로 재가신도 구무원의 집에 묵으면서 부설의 구도수행은 지각변동을 맞는다.
 
구무원에게 스무 살 된 절세가인의 딸 묘화가 있었는데 벙어리였다. 묘화는 부설을 보자마자 말문이 트이면서 전생에 풀지 못한 인연이 있으니 결혼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고는 아버지와 부설에게 혼인을 승낙하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고 했다. 부설은 ‘보살의 자비는 곧 중생을 인연 따라 제도하는 것’이라 생각해 허락하고 말았다. 영조와 영희는 부설을 비웃으며 오대산을 향해 수행길을 재촉했다.
 
부설은 묘화와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 진세塵世에 묻혀 10년을 살았다. 어느 날 부설이 권속을 모아 놓고 수도를 계속하겠다며 작별을 고하고 입산했다. 서기 692년(신라 신문왕 12) 탈속의 기상이 뚜렷한 이곳에 암자를 짓고 일념정진에 매진하니 오늘의 월명암이다. 

“딸 이름과도 일치하지만 달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서 월명암月明庵입니다. 산태극, 수태극으로 굽이굽이 감싸안은 옥순 같은 군봉들로 환포를 이룬 곳입니다. 노령산맥의 서쪽 끝 변산반도의 지기가 우뚝 멈춰 선 산상 최고의 양택지지요.”
 
천곡 스님은 “소납이 무슨 풍수를 알겠느냐”며 한발 빼더니 월명암 운해당 상량문을 ‘부설전’에서 찾아 보여준다.  

수태극 산태극으로 감아돌아서水水山山
기운차게 맞물려진 곳 명당이 분명해各各宛然
가는 곳마다 주主가 되고 닿는 곳이 모두 진眞일세隨處作主
선객의 맑은 법규 길이 끊이지 않을러니禪衲淸規  

이곳은 틈날 때마다 전국의 명풍수들이 다녀갔고, 근대에도 한암·용성·서옹·탄허 대종사 등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며 찬탄한 명당이란다.
 
이런 자리에서는 좌청룡, 우백호가 어떻고, 안산과 조산이 높으니 낮으니 운위하는 자체가 구차해져버린다. 그래도 대웅전 방향은 확인해야겠기에 나경을 꺼내니 경좌(서에서 남으로 15도)갑향(동에서 북으로 15도)으로 정동향에 가깝다. 언뜻 서해낙조의 절경을 바라보는 월명암이 동향이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천곡 스님의 산세설명이 지독한 해무海霧로 보이지 않는 사신사를 짐작케 해준다.
 
“만학천봉을 뚫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월명암의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산세 따라 동향을 놓아 대웅전 앞에서 붉은 해를 보고, 돌아서면 변산팔경 중 이경二景인 서해낙조와 바다안개를 품에 안을 수 있는 명당입니다. 부설 거사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그러면서 이틀 전에 직접 찍은 일출 사진을 내보인다. 오늘 같은 해무도 만나기 어려운 광경이란다. 지금 월명암에는 부설 거사 창건 이래 최대의 중창불사가 진행 중이다. 사성선원을 크게 넓혀 재가신도와 일반 참배객들의 수행정진도 계도할 예정이다.
 
설악산 봉정암, 여수 향일암, 도봉산 천축사, 거제 보리암 등 명산기암에 자리한 사암에 오를 때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 옛날 이토록 깊고 높은 산 정상에 목재나 기왓장을 어찌 운반하여 지었을까. 월명암도 변산에서 남여치를 오르는 최단거리가 1.7킬로미터로 1시간 30분이 걸리고, 내변산 능선(2.5킬로미터) 2시간, 내소사에서 넘어오는 길(6킬로미터)은 3시간 30분이나 걸린다. 그러나 현재 중창불사에는 모노레일이 대신하고 무거운 자재 운반에는 헬기가 동원되고 있다.
 
오대산에서 20여 년을 수도한 영조·영희 스님은 불현듯 부설이 궁금해져 다시 부안을 찾았다. 속세의 인연 가운데 가장 얽맴이 심한 애욕연을 스스로 취한 부설이 어떤 몰골로 변해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들은 파계승 부설을 얕잡아 보고 있었으며 도력을 시험하려 했다. 그때 부설은 무문관無門關에 들어가 햇빛도 안 보며 10년 이상을 안거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영조와 영희를 맞은 부설이 아들 등운을 시켜 호리병 세 개에 물을 담아 처마에 매달도록 했다.
 
“문수보살이 머무시는 오대산에서 큰 도를 깨우치셨겠지…. 저 물병을 막대기로 내리쳐 병은 깨지고 물만 남아 있게 도력을 시험해 보세!”
 
영조와 영희가 차례로 내려치자 병이 깨지면서 물도 쏟아졌다. 그러나 부설이 내리친 물병은 깨졌지만 병 모양으로 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두 스님이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과하려 하는데 부설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생사를 넘었네. 벌써 열반에 들려 했으나 자네들을 만나려고 여태 미루었네. 이렇게 만나 봤으니 육신을 벗고 이승을 떠나겠네.”
 
영조와 영희가 몇 번을 조아리고 참회하며 마음 돌릴 것을 간청했으나 부설은 등운과 월명을 부탁하며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읊조렸다.

눈에 보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에 소리 없는 참소식을 들으니 시비가 끊이는구나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고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며 스스로 귀의를 하소 

기척이 없어 부설을 건드려 보니 이미 육신의 옷을 벗은 뒤였다. 이후 등운은 영희를 은사로, 월명은 영조를 은사로 득도하여 어머니 묘화와 함께 온 가족이 도통하는 불교사의 이적을 성취한다.
 
“월명암은 환난이 많은 절입니다. 임진왜란 때 전소 이후 1908년에는 항일의병 근거지로 모두 불타는 비운을 맞습니다. 6·25전쟁 때는 여순 반란군이 진입해 화마에 휩싸이고…. 이번 불사에는 상수도 공사와 함께 화재대비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월명암에 몇 시간을 머무는 동안 훼방을 놓던 해무가 비가 내리면서 걷힌다. 일출과 낙조는 다음에 보고 해무만 보고 가라는 대웅전 관세음보살의 묵시인가.
 
하산 길 내소사 옆 지장암에 들러 주지 김일지 스님한테 들은 얘기다.
 
“저 월명암 불사는 천곡 스님의 황소 불심 아니면 엄두도 못 낼 대작불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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