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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料수난과 식민사관의 해독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0/13 [14:57]
우리 역사를 말살한 침략적 식민사관 벗어나야

史料수난과 식민사관의 해독

우리 역사를 말살한 침략적 식민사관 벗어나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0/13 [14:57]

우리민족의 상고 사료가 멸실된 내막을 보면 외세의 침략에 의한 원인(전란에 의한 방화, 탈취 등)과 내부 통치 권력자의 정치적 의도, 종교적 외세에 의한 핍박과 사대 곡필 등이다.
 
가장 큰 원인인 정치적 외세에 의한 사료 멸실은 줄잡아 ‘10대 수난사’를 들 수 있다.
①고구려 동천왕 20년(246) 10월 위장(魏將)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환도성을 공함하여 많은 사서를 소각함
②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에 사자성이 함락 되면서 사고가 소진됨
③고구려 보장왕27년(668) 당나라 장군 이적(李勣)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典籍)들을 모두 탈취해 감
④신라 경순왕 원년(927) 후백제의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의 서적들을 전주(당시 完州, 후백제 수도)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멸 당할 때 방화 소각됨
⑤고려 인종4년(1129) 금나라에 상국(上國)의 서표를 바친 후 주체서적을 가져 감
⑥고려 고종 20년(1233) 몽골의 침략으로 홀필렬(忽必烈)에 의해 소각 됨(삼한고기, 해동고기가 이때 없어짐)
⑦조선 태종11년(1411) 5부 학당을 송나라 제도에 따라 설치하면서 유학을 장려 하고 비 유학 서적 일체를 소각함
⑧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들이 방화에 의하여 소실됨
⑨병자호란(1636) 때 귀중한 사서들이 수없이 잿더미가 됨
⑩일제 강점(1910)이후 식민지 정책(조선사편수회 사업)의 일환으로 군경을 동원 탈취, 날조, 소각 등 만행.
 
외세에 의한 10대 사료 수난사
 
이상에서 보듯 우리민족의 사료수난사는 눈물 겹다. 그중에서도 수탈, 소각, 인멸 등이 가장 극심했던 암흑기는 일제 강점기 이다. 그들은 한일합병이 되던 1910년부터 조선사 편찬사업이 완료되기 1년 전인 1937년말 까지 장장 27년간에 걸쳐(조선사 편찬사업은 1916년 1월부터 시작) 사료모집이라는 명분아래 헌병, 경찰 등을 동원하여 규장각 소장 사적(史籍)은 물론 서울 종로 일대의 서점들을 비롯, 전국의 서사(書肆), 향교, 서원, 사찰, 서당, 고가, 권문세가 등을 급습, 단군과 관련된 사서 또는 우리민족의 정신이 곁들여진 고유 사서들을 닥치는 대로 압수, 탈취해 갔다.
 
일본이 패망 할 때 모든 근거자료를 불태워 없애 버렸기 때문에 그 자세한 내막은 알기 어려우나 1910년11월부터 1911년12월 까지 1년2개월 동안 조선총독부(취조국)가 탈취 소각해 버린 사서만 약51종 20여 만 권에 달한다. 그러니 27년 동안 말살시킨 사료가 얼마인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일제는 이러한 서적의 판매를 엄금하고, 그 소지자와 열독 자를 처벌했던 것이다.(1910년11월~1911년12월 관보, 김진학·한철영 공저 ‘·제헌국회사’ 22쪽, 문정창 저 ‘군국일본 조선강점36년사’ 상권80쪽, 중권455쪽).
 
이상시(李相時)의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53~54쪽)에 따르면, 현존하는 고사(古史) 가운데 단군에 관한 기사는 한마디도 없는 고려시대의 어용사서이며 사대주의 사서의 표본인 ‘삼국사기’와 단군을 불교색채로 윤색해 놓은 불가사서류인 ‘삼국유사’, 단군에 관해 비합리적이고 객관적 타당성이 결여된 존화사대적 사서 내지 어용사서(‘東國通鑑’등 약 15,6종)등 20여종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일제는 식민정책의 하나로 우리가 상고사를 찾는데 오히려 혼란을 초래 할 수 있는 책들만 몇 권 남겨 놓았던 것이다.
단군과 단군조선을 합리적, 객관적이고 타당성 있는 즉, 사실(史實)을 기초로 하여 실사로 편찬 저술된 이른바 도가사서(道家史書)들은 거의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기적적으로 전해 오는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한단고기(桓檀古記) 등 몇 권이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가 상고사 복원에 애로를 느끼는 사료 빈곤이 바로 이러한 사료 수난사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공분심을 갖고 역사회복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식민사관 복사판, 국사광복을 절감
 
반만년 문화민족사를 말하면서 어찌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국한 할 수 있겠는가. 정사라 일컫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식민정책의 일환일 뿐이다. 단군조선을 비롯한 고대 한국사를 사실(史實)로서 기록해 놓은 사서라면 존재 할 수 있었을까.
 
현행 ‘고등학교 국사’(32~33쪽) 교과서를 한 예로 보자.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 아니 “하였다고 한다.”라니. 남의 말 하듯이 기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 하면 연나라 사람으로 고조선에 망명 귀화 했다가 준왕을 내 쫓고 기자조선의 왕 자리를 찬탈한 인물인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이 우리 고대사의 첫 머리인양 기술 하고 있다. 이야말로 식민사관의 복사판 아닌가. 단군 고조선과 기자조선은 아예 빼 버린 채 말이다.
 
아직도 일제가 철저히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 심어 놓은 침략적 식민사관의 해독(害毒)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야 말로 개탄할 일이다. 단기 4347년 개천절을 맞으며 국사광복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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