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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길 '역사 그분이야기'●서로마의 멸망 이후①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0/17 [13:07]
그리스化와 이슬람에 의한 종말까지

심재길 '역사 그분이야기'●서로마의 멸망 이후①

그리스化와 이슬람에 의한 종말까지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0/17 [13:07]

중세의 시작-열국시대
 
375년 중앙아시아로부터 이동해온 훈족(흉노족)이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이곳에 살고 있던 서고트인(게르만족의 일파)이 쫓겨났다. 이들 서고트인들은 로마제국의 영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로마제국에 이주 신청을 거듭 요청한 끝에 트라키아로 이주 허가를 받고 정착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관리들의 어리석은 조치를 취했다. 서고트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민족들이 삽시간에 로마제국 영토 안으로 몰려들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정한 바렌스 황제는 378년 이들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그의 군대도 전멸 당하고 만다.
 
발렌스 황제를 격파한 서고트인들에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2년 도나우강 남쪽 황무지에 정착을 허가한다. 뒤이어 반달족과 프랑크족들도 자치정부를 수립한다. 이런 혼란과 제국의 위기에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이단으로 정죄, 모든 도시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신전을 파괴하고 영지를 몰수한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죽으면서 로마제국을 동⋅서로마로 분리(395년)하고 그 아들들에게 제국의 통치를 맡겼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제국의 힘을 분할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제국멸망의 원인이 되게 하였다.
 
410년 서고트왕 아라릭이 서로마제국 영내로 침입하고, 훈족(흉노족) 앗틸라가 본격적인 침공에 돌입하자 서로마 제국은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서고트인들과 프랑크족의 연합군이 앗틸라 저지에 성공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반달족이 침공하는 등 혼란은 계속되었고, 결국 게르만족의 용병(傭兵) 대장 오도아케르의 침공으로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은 첫째 도덕적 타락, 둘째 동서로마의 분리로 인한 국력약화, 셋째 계속되는 전쟁으로 중소 자영농민층 붕괴, 넷째 건전한 중산층 부재, 다섯째 게르만족의 침입 등이었다.
 
결과적으로 서로마의 멸망은 고대(古代)가 끝나고 중세(中世)가 시작됨을 의미하였고, 역사의 무대가 지중해 연안에서 알프스 북서쪽 주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도래함을 의미하였다.
▲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의 특수부대     ©

외환(外患) 연속의 1000년 동로마제국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발칸반도의 끝 비잔티움으로 330년 천도를 하고,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을 분리하여 자기의 아들들에게 통치하게 함으로써 외환은 시작되었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하지만,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망할 때까지 약 1000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때는 게르만민족 국가들과 이슬람의 세계가 정립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년~565년) 때는 서로마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정복을 펼쳐서 반달을 멸망시키고, 아프리카를 되찾았으며, 이탈리아반도에 있는 동고트를 정복하고,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동로마제국은 8세기에서 11세기까지는 발칸반도와 소아시아에 근거지를 두고 남⋅북에서 침입해 오는 강적을 잘 물리쳤다. 그러나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셀주크 투르크족과 서로마로부터 4회에 걸친 십자군의 횡포로 많은 고통을 받아 국력이 약화되었는데 이것이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어서 오스만 투르크가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발칸반도를 정벌한 후 1453년 5월 29일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므로 1000년의 동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동로마제국과 서로마 회복사업
 
발칸반도, 소아시아반도, 시리아와 이집트 등 4개 지역으로 구성된 동로마제국은 여러 가지 복잡하고 위험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민족주의운동이 교회의 교리논쟁으로 발전되면서 제국이 해체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특히 이 지역은 단성론파(單性論派) 세력이 많았다. 단성론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다 갖고 계신다는 정통파의 주장을 부인하고, 다만 신성(神性)만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451년 칼케돈(Chalcedon)공회에서 Nestorius(景敎)파와 함께 이단으로 처리되었다.
 
아타나시우스 황제는 교회정책을 단성론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정책을 펴며 정국안정을 위해 고심했다. 그 후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 재건과 전통계승을 추진했다. 반달족과 동․서고트족들과 18년에 걸친 투쟁 결과 이들을 물리치고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다. 이 황제는 법전(法典)편찬과 소피아성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황제는 현명하고 유능한 황비 데오도라의 내조에 힘입어 제국의 통치를 지혜롭게 운용해갔다. 그러나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단성론파를 지지하는 듯한 처신으로 콘스탄티노플교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단성론파들은 오히려 더욱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한편 526년 테오도릭이 어린 손자 아타라릭을 후계자로 지명해 놓고 죽자 섭정을 하게 된 그 어머니는 친 로마정책을 취했고, 이에 부족 내 불만이 고조되었다. 534년 아타라릭이 죽자 불만세력은 그 어머니를 살해함으로 국정은 혼란에 빠져들었고, 이는 곧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동고트정복의 기회로 다가왔다. 이미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정을 체결하여 동쪽 국경선을 안정시켜 배후의 위협을 처리한 황제는 역시 친 로마적인 국왕을 폐위시킨 반달왕국의 내분을 구실로 베리사리우스 장군을 파견하여 반달왕국을 정벌하고 여세를 몰아 535년 시리아를 정복한 후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여 나폴리마저 정복했다.
 
이에 로마인들은 크게 환영했다. 540년에는 동고트의 근거지 라벤나를 정복했으나 페르시아와 국경충돌로 베리사리우스 군대가 철수하자 동고트는 세력을 재편성하여 550년 이탈리아 전 국토와 시칠리아, 사르데냐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동로마제국은 나르세스 장군을 파견하여 동고트를 정복하고 555년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동로마제국 영토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537년에는 로마시가 동고트의 침공을 받을 때 수도시설이 파괴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의 도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죽은 3년 후인 568년 롬바르드족은 지도자 알보인 족장의 지도 아래 아펜니노산맥 이북 파이아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로마인들에게 통치자로 행세했다.
 
그러나 알보인 족장도 결국 왕비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쳐들어갈 때 게피다에족이 저항했다. 이때 롬바르드족은 아시아 유목민 아바르족과 합세하여 게피다에족을 격파하면서 족장 알보인은 게피다에족의 왕 쿠니문트의 딸 로자문트를 왕비로 삼았다. 그런데 알보인은 자기 장인에 해당하는 쿠니문트의 두개골에 술을 따라 마시고 그 술을 왕비 로자문트에게도 마시게 하는 등 횡포가 심했다. 이런 연유로 로자문트는 알보인을 살해하고 말았다.
 
롬바르드족은 그 후 10여 년간 혼란의 공백기간을 거쳐 북부이탈리아에 롬바르드왕국을 세웠다. 이 무렵 동로마제국은 라벤나에 총독부를 두고 있었다. 한편으로 롬바르드왕국과 협정을 맺어 라벤나, 베네치아, 로마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지역과 나폴리, 제노바 부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긴 했어도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상태였다.
 
동로마제국에 있어서는 이탈리아반도 문제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이집트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위태한 상황이 되었다. 북방에서는 아바르족, 슬라브족들이 위협을 가해왔다.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는가 싶으면 이슬람세력이 침공해왔다.
이때부터 동로마제국은 본격적인 외침을 받기 시작한다. 헤라클레이오스 황제는 아바르족을 매수하여 화평을 맺고 627년 니네베에서 페르시아군과 일대격전을 벌린 끝에 이들을 격퇴시키고 화평을 맺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지방귀족의 발호와 당쟁과 내란 등이 빈번하였고, 수도와 여러 속주에서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마 영토였던 이탈리아 대부분을 롬바르드족과 프랑크족에게 빼앗겼다.
 
아프리카는 제대로 관리를 못하여 황폐화되었고, 동쪽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그 뒤를 이은 이슬람에 의하여 시리아와 이집트 등 동방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마침내 수도가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동로마제국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프랑크왕국(582년~602년)과 동맹을 맺어 제국을 보전하려고 노력하였다. 동지중해에서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던 동로마제국은 새로운 적과 마주치게 된다. 다름 아닌 이슬람세력이었다. 이들과의 오랜 투쟁으로 국운이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고, 소망하던 서로마의 옛 영토를 찾으려던 노력도 무산되었다.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국방을 유지하기도 힘에 겨워 급속히 그리스화 되었고, 결국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에게 1000년의 제국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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