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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多勿)정신을 되살리자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0/17 [14:37]
1500여 년간 만고풍상을 겪어온 광개토대왕비를 보라

다물(多勿)정신을 되살리자

1500여 년간 만고풍상을 겪어온 광개토대왕비를 보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0/17 [14:37]

고구려의 건국이념은 다물(多勿) 이었다. ‘다물’이란 ‘따물으다’ ‘되물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땅을 되 물려 받는다(찾는다)’는 뜻의 고구려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여어위 복구토위 다물(麗語謂 復舊土爲 多勿)”이라고 했다. 이를 풀이하면 “다물이란 옛 땅을 되찾는다는 고구려 말”이라고 했다. 또 ‘새 우리말 큰 사전’(신용철·신기철 편저)에는 “다믈: 옛땅을 다시 돌이킴”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이밖에도 다물이란 말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환<한>단고기(桓檀古記)에 합편된 신라의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삼성기(三聖紀)’나 조선조 연산군과 중종 때의 사람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고구려국 본기(高句麗國 本紀)’ 등에 자주 나온다.
 
이상에서 다물이란 단군의 고조선과 부여를 이은 고구려가 영광스러웠던 고조선의 옛 땅을 다시 찾겠다는 뜻의 고구려 말을 한자의 음을 취해 ‘다물(多勿)’이라고 적게 됐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바로 이 다물정신으로 건국된 나라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高朱蒙)은 건국연호를 ‘다물’이라고 했다. 이처럼 다물은 건국이념이자 국가목표였던 것이다. 이로보아 고구려가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겠다는 영토회복의 의지가 얼마나 강열했는가를 알 수 있다. 또 고구려에는 이 다물정신이 국민들 속에 널리 심어졌던 것 같다. 이른바 국민정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맥의 ‘태백일사’에 보면 “조의선인(皁衣仙人)의 무리 3천이 가는 곳 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多勿興邦)의 노래를 제창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 노랫말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다만 내가 스스로 있음이여,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天上天下 唯我自存兮 多勿 其 興邦)”.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 했으니 옛 땅을 회복하면 곧 흥방 이라는 뜻이다. 융성하는 나라는 옛 땅을 모조리 회복하는 나라인 것이다.
 
그럼, 단군조선의 통치영역은 어디까지였을까. 한단고기나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오사(二十五史)’ 등을 종합해 볼 때 중국의 양자강 이북, 산동반도, 요동, 요서, 만주, 동몽골 일대, 시베리아, 한반도 그리고 동해 건너 큐우슈(九州)를 포함한 일본 서부 일대와 대마도(對馬島)를 망라하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고조선 영토였던 지금의 중국 북경지역, 요동, 요서 및 산서성 지역까지 회복했던 것이다.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자 30년만인 698년 고구려의 구장 대조영(大祚榮)에 의해 세워진 발해(渤海)도 동으로는 연해주, 북으로 흑룡강, 남으로 대동강과 원산, 서로는 요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대륙을 지배한 발해의 영토는 사방 5천리라고 했다.
 
하지만 남조(南朝) 신라와 북조(北朝) 발해로 갈라져 동족이면서 서로 적대시 했을 뿐 서로 왕래 하거나 교류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나라나 일본 같은 남의 나라와 교류하는 관계를 맺었다. 지금의 남 북 관계도 동족끼리는 멀리하고 서로 남의 나라하고 교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이때 신라와 발해가 단군왕검조선의 후예로서 동일혈륜(同一血倫)의 동족애를 회복해 하나로 결합하는 지혜를 발휘했더라면 대륙회복은 물론 강성한 국가로서 역사는 달리 쓰여 졌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발해가 망하면서 만주대륙도 잃어버리게 됐다.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은 만주를 상실한 이후부터 반도로 밀려 났고, 점차 약소민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민족사는 교훈경전(敎訓經典)이 되어 후대를 일깨우고 있다. 그런데 중화사대주의 사가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발해를 제외시키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이 삼국사기를 기본으로 한 국사교육을 받은 국민이기에 대륙회복의 웅지를 펴겠다는 역사의식을 가질 수 없음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우리는 통일에 대한 원대한 이상과 꿈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에 다물정신을 되살리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반도사관에 얽매어 ‘한반도 통일’만을 부르짖는다면 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선조들이 지하에서 통곡 하시며 대노하실 것임을 알아야겠다.
 
▲ 고구려의 고토인 만주 즙안현 통구의 언덕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사진은 실물과 동일한 축척으로 제작해 국가정보원 뜰에 있다가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뜰로 옮겨 세운 것이다.     ©

 

만주 즙안현 통구의 언덕에서 1500여 년간 만고풍상을 겪어온 광개토대왕비를 보라. 지난날 말채찍을 울리며 드넓은 중원천지를 누비던 고구려인의 씩씩한 민족기상, 그 영광을 되찾아 주길 기다리며 오늘도 외로이 만주벌판을 지키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만주와 간도 땅을 우리 땅이니 돌려 달라고 대놓고 말 할 수 없는 지경이니 안타깝다. 오히려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고구려가 자기네 변방사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소가 웃을 일이다. 차제에 우리 역시 제정신을 차려야한다. 역사를 빼앗기면 땅도, 조상도, 혼도 모두 빼앗기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근세에 들어서도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결코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정도가 아니다. 이는 오직 과거 청·일간의 국경협정이요 일제 식민지 시대의 경계선일 뿐이다. 1712년 5월15일(숙종38년) 청 태조가 보낸 오라(지금의 길림)총관 목극등과 우리 측 접반사 박권, 군관 이의복, 통역관 김응헌 등이 백두산 꼭대기 압록강과 토문강의 분수령에서 백두산 꼭대기 동남쪽 4km, 해발 2,200m 되는 지점에 양국의 대표가 합의하여 세운 정계비가 한 중 양국의 최초이자 최후의 국경협정이다.
 
이 정계비대로 압록강→토문강→송화강→흑룡강의 국경선을 명백히 하고 있다. 두만강이니 석을수 따위의 이름은 거론 되지도 않았다. 일본이 남의 나라 국경선을 제멋대로 압록강→석을수→두만강으로 정해 간도 땅을 청나라에 내어 주고 반대급부로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는 것은 오직 침략을 위한 파렴치한 만행이다. 억울하고 원통하게 우리의 북방강역인 두만강 북쪽이 잘려 나간 것이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 되면서 1965년 일본정부는 “과거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행한 간도협정은 이를 무효로 한다”고 선언 한 바 있다. 내년이면 한일국교 50주년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우리정부나 북한조차 이 불법 간도협정에 한마디 언급도 없는가.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과거 청일간의 간도협약이 불법무효임을 확실히 하는 정부차원의 소송을 접수시킬 용의는 없는가. 자기 땅 찾는데 무슨 시효기간 운운인가.
 
유대민족은 2천년 만에 자기 땅을 되찾아 이스라엘을 건국하지 않았는가. 여기엔 민족주체신앙인 유대교와 이스라엘 선민사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오니즘운동은 곧 이스라엘 복귀운동 이었다.
 
다물은 우리민족의 복귀정신이요, 부활사상이다. 고구려의 다물정신이 부활 될 때 빼앗긴 옛 땅 대륙회복의 신념을 불태울 수 있을 것이다. 다물정신을 되살리고 이를 신앙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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