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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분이야기'●서로마의 멸망 이후②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0/21 [07:12]
유럽 세계의 성립-교회權限,世俗까지 확대

'역사 그분이야기'●서로마의 멸망 이후②

유럽 세계의 성립-교회權限,世俗까지 확대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0/21 [07:12]

중앙아시아로부터 흉노족이 대이동을 함에 따라 게르만 민족은 흉노족들에게 압박의 대상이 되자, 게르만 민족은 이들을 피하여 로마 영토 내로 침입하여 정착함에 따라 역사의 무대가 지중해 연안에서 유럽대륙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리스-로마문명과 기독교 사상에 게르만적 요소가 합쳐지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를 중세봉건사회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로마의 문화권이 유럽세계와 동로마의 비잔틴제국과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 중 유럽세계는 다른 두 세계에 비해 문화적 수준이 낮고 민족 대이동기 직후 혼란과 무질서상태로 인해 암흑시대였다. 이때 유럽세계를 지탱했던 두 기둥은 가톨릭과 봉건제도였다. 게르만민족은 목축업에 종사함으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잦은 이동을 했는데 이들의 농업기술 수준은 매우 낮아 비료를 만드는 기술도 없었다.
 
프랑크왕국 건설
 
라인강 하류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한 클로비스는 메로빙거 왕조를 창건하고 10여개 부족을 통합하여 통일국가를 형성한 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단인 아리우스파의 서고트를 에스파니아로 쫓아내고 오늘날 프랑스와 벨기에 지역을 차지했다. 클로비스가 죽은 후 4명의 아들들이 왕국을 분할하여 통치하다가 558년 막내아들 클로타 1세가 다시 왕국을 통합 운영하게 된다. 이후 왕족들의 내분과 혼란기를 지나, 정권은 지방귀족의 지지를 받는 궁제(宮帝)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732년 에스파냐를 점령한 이슬람이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을 침입했을 때 투르 근방에서 이들을 격퇴시킨 사람이 카를 마르텔이었다.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피핀이 궁제가 된 후 왕위를 찬탈하여 751년 카롤링왕조를 열었다. 피핀은 국토를 통합했다.
 
이태리반도에 있던 동고트왕국이 붕괴하자 이 지역은 동로마제국과 롬바르트왕국과 로마교황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때 피핀은 롬바르트왕국을 격파하여 이 지역을 교황에게 바친다. 그러나 롬바르트왕국은 세력을 남쪽으로 뻗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교황 스테파누스 3세가 753년 피핀을 찾아간다. 교황은 프랑크 왕국 왕위쟁탈전에서 피핀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고, 피핀은 롬바르트왕국의 침입으로부터 교황권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한다. 피핀은 롬바르트를 격파하고 라벤나 주변지역을 피핀의 기증지로서 교황에게 선사했다. 이렇게 해서 이 지역은 로마교황이 지배하는 영토가 되어 19세기까지 교황령 국가로 불러졌다.
 
이들이 협력한 저의는 로마교황이 동로마 황제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대신 프랑크 왕을 교회의 수호자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교황이 동로마와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한 이유는 동로마 황제 레오3세의 726년 우상 파괴령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로마교회는 성모 마리아상이 게르만족에 대한 선교의 좋은 방편이 되기 때문에 이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고 크게 반발하자, 동로마제국은 롬바르트와 연합하여 교황 측을 압박했다. 이에 교황은 프랑크 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프랑크가 이 요청을 받아들여 롬바르드를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교황은 만족하지 않고 동로마황제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왕이 아닌 황제와의 제휴가 필요했다. 교황의 이런 의도 아래 피핀의 뒤를 이은 카를(771~814)이 800년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고 서로마제국의 황제 위를 계승한다고 공표한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이다. 이렇게 하여 동로마의 그리스정교와는 성격이 다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신성로마제국이란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암흑의 중세로 돌입한 혼란의 유럽에 기독교를 기치로 내건 강대한 제국을 건설하려는 시도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 제국은 건설되지 못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고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한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재위 768~814)인 카를 대제.     ©

카를 대제는 어떤 사람인가?
 
카를(불어: 샤를마뉴, 영어: 찰스)이 왕위를 계승하자 왕국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카를은 영토를 확장시키고 색슨민족을 정벌하여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교황 레오3세는 크리스마스 전날 미사에 참석한 카를에게 서로마 황제 관을 씌워 준다.
 
카를은 교황과 결탁하여 황제가 되었고, 그 뒤를 이은 루이 경건왕은 베르딩조약에 의해 자신의 3명의 왕자에게 영토를 분할하여 준다. 장남 로테르에게는 이태리와 중부 프랑크 왕으로 정하고 자신의 황제 칭호를 물려주었고, 차남에게는 동부 프랑크를 주고, 막내에게는 서부 프랑크를 주었다. 그러나 장남 로테르가 일찍 죽자 메르센 조약을 맺었고, 중부 프랑크를 나누어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태리 3국 형성의 기초가 된다.
 
異民族의 침입
 
9세기 후반부터 북쪽에서 노르만족, 동쪽에서 마자르족, 남쪽에는 이슬람 제국의 침입을 받게 된다. 서프랑스는 911년 세느강 하구일대의 영토를 노르만족에게 하사하고, 봉신국으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노르망디 왕국이 건설된다. 동 프랑크왕국은 마자르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국왕 하인리와 그의 아들 오토가 10세기 중반 모두 격퇴하였다. 이 공적으로 오토는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무렵 이슬람군의 침공으로 이태리반도와 로마시가 불에 탔고, 이때 베드로 성당과 몬테카시노 사원 등이 소실되어 후일 십자군 원정의 단초가 되었다.
 
이후 16세기 독일은 개별적이고 지방분권적인 연방국가들이 모여서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이름뿐 강력한 통치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때문에 지방의 제후들은 자기 영토 내에서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했다. 신성로마 황제는 7명의 선거제후에 의해 선출되는 선거황제였다. 이들 선거제후의 권력도 대동소이했다.
 
봉건시대와 가톨릭
 
정치체제는 지방분권적으로 지방 영주들의 권한은 막강한 반면 중앙정부의 권한은 미약하여 왕의 명령이 지방 영주들에게 먹혀들지 않은 시대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민족 단위로 구분되는 이런 정치체제를 초월하여 초국가, 초민족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확립하였다. 즉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 아니라 기독교인가 기독교가 아닌가가 문제가 될 뿐이었다. 보편적 세계관을 확립시킨 가톨릭의 업적은 전 유럽 사람이 우리의 유럽이라는 인식을 지니게 만든 점은 오늘날의 유럽공동체(EC)와 북대서양 동맹기구(NATO)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양 중세시대 가톨릭교회는 바로 세계였다. 로마 교황청은 세계의 정부였으며, 교황은 서유럽 전체국가들의 원수(元首)였다. 13세기 들어 교회의 권한은 절정에 달했다. 교회의 권한은 세속에까지 확대되어 교회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세 말 이후 왕권중심의 강력한 중앙정부와 통일국가가 형성되자, 보편적인 가톨릭 세계관을 내세우는 가톨릭의 기반은 약화되기 시작한다. 14세기에 일어난 교황의 바벨론 유수나 교회의 대분열은 교황 권을 제압하는데 성공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 결과 가톨릭과 교황권은 실추되었고, 각국에서는 국가가 종교를 장악하는 현상이 벌어져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이런 외적 영향 외에 가톨릭교회 내부의 부패와 모순이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형식만 강조하고 세속화된 가톨릭에 염증을 느낀 개혁세력들은 가톨릭교회 조직과 대립하게 된다.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영국의 위클립, 보헤미아의 후스,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 독일의 루터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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