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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 무엇이 문제인가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1/10 [16:38]
영적욕망과 육적욕망의 타협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의 욕망, 무엇이 문제인가

영적욕망과 육적욕망의 타협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1/10 [16:38]

인간은 살면서 늘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고 발버둥 친다. 정치와 경제, 과학과 종교, 예술 등 여러 학문을 발전시킨 것도 모두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일환이다. 그런데 욕망이란 쉽게 채울 수도 없거니와 설령 채운다 해도 비극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삶에서 욕망은 분명 발전의 원동력이 돼 왔음에도 왜 부정적인 인상으로 더 각인돼 있는 걸까.
 
종교에서는 욕망을 죄악시 한다. 성경은 죄와 사망의 근원(약 1:15)이라고 했고,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고(시 10:3),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게 한다(딤전 6:9)고 기록해 놓았다. 실제 자신의 육적욕망을 추구한 나머지 은 삼십 냥에 스승 예수를 판 가룟 유다나 권력에 눈이 먼 사울왕, 쾌락의 늪에서 헤맨 솔로몬왕의 말로는 비참했다.
 
불교는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삼독(三毒, 貪瞋癡:욕심•성냄•어리석음)’의 으뜸자리에 욕망을 배치해 놓았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삼독을 멸하여 고통을 해결하고 열반을 얻어야 하는데, 마음을 죽이는 이 세 가지 독 때문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자에게 욕망이란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욕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 욕망인가가 중요하다. 인간에게는 육적욕망과 영적욕망의 두 가지 욕망이 있다. 육적욕망은 물질적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며 오로지 자기 혼자만 잘 되고 잘 살려고 하는 욕망이다. 반면, 영적욕망은 정신적 기쁨과 바른 몸가짐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욕망이다. 전자는 사적욕망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공적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 두 욕망 사이에서 고뇌한다. 철학자 빠스칼은《빵세》에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아, 나의 가슴속에는 두 개의 혼이 살며 서로 떨어지려하고 서로 반발한다. 한 혼은 강한 애욕에 사로잡혀 억센 관능으로 현세에 집착하고, 또 한 혼은 억지로 이 속세를 떠나서 높은 선인들의 영계로 올라간다.” 영적욕망은 아무리 지나쳐도 잘못 될 것도 없고 후회할 일도 없지만, 육적욕망은 지나치면 후회하게 되고, 고통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육적욕망도 하나님이 준 것이 분명한 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자신을 주관하지 못 하는 것이 주원인이고, 이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어둠의 기운(마귀)이 편승하여 홀리기 때문이다. 육적욕망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탐욕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이 육적욕망 앞에서 고뇌하지만, 강력한 마력(魔力)의 작용에 의해 자기 제어력을 잃고 무릎 꿇기 일쑤다(롬 7:22). 선을 추구하지만 내면에는 탐심이 들끓고 있다. 인간은 마음이 바라는 것보다 육신이 바라는 대로 따라가는 나약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신앙생활이나 수행생활은 육적욕망의 절제와 주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육적욕망의 절제와 주관을 인간행복과 평화의 관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왜 사람에게는 이런 두 욕망이 존재하게 된 것일까. 성경은 처음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성품만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악한 성품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정신 체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즉, 불완전한 인간이 되었고, 악의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본연의 사람노릇을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부처인데, 마음에 때가 끼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불교의 가르침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욕망과 육적욕망, 이 두 욕망의 공존이 가능할까. 타협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야생마 같은 육적욕망이 일방적으로 날뛰기 때문이다. 두 욕망의 격위(格位)가 정립되지 않는 한 마음 속의 평화와 행복은 물론 지구촌의 평화와 행복은 요원하다.
 
육적욕망의 과다분출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다. 마음을 혼탁하게 하고, 눈이 밖으로 튀어나와 물질과 권력, 쾌락에 집착하게 하여 파멸로 이끌어간다. 사람의 불행의 근원은 대부분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함에 있다. 이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윤리와 도덕을 팽개치고 사람이 짐승처럼 살게 마련이다. 육적욕망이 우리 마음의 눈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육욕은 어느 정도 충족돼야 하지만,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고, 후회한 뒤에도 반복된다는 것이 큰 문제다. 맹목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자꾸만 엑셀레이더를 밟으려고 하고, 끝없이 위로 치솟으려고 한다. 이 때문에 인간에게서 고통이 떠나지 않는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런 말을 했다. “육체의 욕망, 교만, 욕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악덕이다. 이것 때문에 갖가지 불행이 인류의 어깨를 짓누른다.” 육적욕망의 추구대로 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중독성이 강해서 파멸에 이르기 전까지 멈추는 법이 없다. 자기만 최고가 되려 하고, 자기만 귀하게 여긴다. 좋은 것은 자기만 갖고 싶어 한다. 물질을 고루 돌지 못하게 하고,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육적욕망이 강하고,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한다. 편안함과 쾌락에 자신을 내맡겨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 샤갈作 ‘도시 위에서’     ©


肉慾은 인간의 선한 심성 파괴자
영적욕망대로 사는 것이 참된 삶
인류 미래는 욕망의 전환에 달려
 
인류가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물질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욕망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다. 육적욕망은 우리 삶과 발전에 일정부분 원동력이 돼왔다. 육적욕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생명은 욕망으로 존재한다는 말도 있다. 육적욕망을 지양하고 영적욕망에 의해 살아야 행복이 찾아온다. 따라서 영적욕망을 주도적인 위치에 세우고 육적욕망을 주관해 나가는 이것이 인생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는 “자유롭고자 한다면 자기 욕망을 누를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라”고 조언한다. 성경은 “육신대로 살면 죽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롬 8:13)고 말한다. 육적욕망에서 벗어나 영적욕망을 따르라는 것이다. 육적욕망의 무절제는 우리의 열매인 영혼을 부패시키고, 우리를 멸망의 길로 몰아간다.
 
인류는 예수와 석가 등 큰 스승을 만나면서 욕망을 절제하는 법을 터득했고, 욕망과 맞서 투쟁해 나왔다. 이들은 물질과 쾌락, 권력에 집착하지 말고 유유자적하게 살라고 가르쳤다. 불필요한 것을 바라지 말고, 정신적 평안을 유지하며, 외물에 끌려 다니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예수의 욕망은 사람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나라에서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예수는 “크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돼야 한다.”고 질타했다. 예수는 삶의 목표를 육신과 지상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는 먹고 마시는 것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가르쳤다. 세상과 반대의 길로 가라고 타이른 것이다.
 
사람들은 육적욕망에 따라 자기 확대의 즐거움에 산다. 그리고 힘이 생기면 교만해져서 문제를 일으킨다. 예수는 이렇게 권면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3∼14) 외적 자기 확대는 허망한 것이고, 되려 자아를 축소하는 것이며, 자신을 쭉정이로 만든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도와 구제는 은밀히 하고, 늘 온유하고 겸손하며, 마음을 청결히 하라고 가르쳤다.
 
육적욕망의 집착은 부자유이고, 결박이다. 마음의 작용에 역행하여 자연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이에서 괴로움이 시작된다. 예수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고 했다. 즉, 마음을 비우라고 했다. 비워야 충만해진다.
 
육적욕망의 끈을 놓고 영적욕망을 붙들 때 마음이 청결해져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인간성이 살아나서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게 된다. 영적욕망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서로 나누며 화평하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 영적욕망대로 사는 것이 본연의 삶이자 행복의 길임을 잘 알고 있다. 신앙의 궁극의 목적은 육체와 나 중심의 욕망을, 영(靈)과 타인 중심의 욕망으로 승화시키자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닮고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예수처럼 살아야 가능하다. 육적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구원이란 어려운 것이다. 가진 게 많은 데도 마음의 평안이 없고, 누리는 게 많은 데도 마음에 기쁨이 없다. 육체중심, 나 중심적인 삶에서는 선과 사랑이 나올 리 만무하다. 종교가 육욕과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마귀의 본성은 욕심(요 8:44)이라고 말한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수단에 목숨을 걸게 한다. 물질과 권력과 쾌락 등 외면적인 가치에 삶의 목적을 두게 하고는 경쟁심을 유발시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몰아댄다. 종교단체도 부자가 되고 세력을 가지면 세상의 또 하나의 문제 집단이 되기 쉽다. 영적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회칠한 무덤’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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