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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가톨릭, 진리는 성경 중심적인 성공회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1/17 [08:23]
역사 그분 이야기●더 큰 인간의 욕망⓶

의식은 가톨릭, 진리는 성경 중심적인 성공회

역사 그분 이야기●더 큰 인간의 욕망⓶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1/17 [08:23]

신대륙 발견
 
1492년 8월 3일 크리스토퍼 콜럼부스는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냐호 등 3척의 배에 160명의 선원을 싣고 신대륙 탐험에 나선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땅은 대륙이 아닌 섬들로서 오늘날 서인도제도의 쿠바, 아이티, 그리니다드, 산살바도르 등이었지만 그는 이곳을 인도의 서쪽으로 굳게 믿었다. 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500년 10월 30일 본국으로 송환되는 수모를 당한 후 죽는다. 그 후 미 대륙은 1497년~1503년까지 이태리 사람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발견되어 신대륙으로부터 많은 물품이 유입되어 상업혁명과 가격혁명이 초래되는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 이민이 시작되었다.
 
영국 국교회(Anglican)와 엘리자베스1세 여왕
 <영국 국교회의 발족>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는 일명 영국 성공회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성공회인 이 교파는 헨리8세가 아들을 못 낳는 부인과 이혼하고 새로 결혼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 독립하여 탄생한 기독교로서 의식은 가톨릭을, 진리는 성경 중심적으로 믿고 행하는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전 세계 160여 국가에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관구 교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자는 약 7,00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 교회의 출발 배경을 알기 위해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509년 헨리 8세는 18세에 왕위에 오른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형 아서의 미망인 아라곤 캐서린과 결혼했다. 1516년 이들 사이에 딸 메리튜더가 출생한다. 이 딸이 후일 메리 1세 여왕이 된다. 1527년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아들을 못 낳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젊고 활달한 궁녀 앤 불린에게 매혹되어 자신이 아들을 못 낳는 것은 성경 레위기 20장 21절에 기록돼 있는 “누구든지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는 말씀을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헨리 8세는 대신(大臣) 울지에게 명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재혼을 허락해 줄 것을 탄원했으나, 교황은 다음 3가지 이유를 들어 이 탄원을 거절했다.
 
(1) 캐서린과의 결혼을 승낙한 사람이 자신인데 이제 와서 이혼을 허락하고 재혼을 승인할 수 없다.  
(2) 교황은 신성로마의 황제이자 에스파냐 왕이며, 캐서린의 조카 되는 카를 5세에게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3) 캐서린이 이혼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캐서린의 부모는 1469년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합을 낳은 세기적 결혼의 주인공인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였다. 이들의 결혼으로 에스파냐가 탄생했다. 1529년 헨리 8세는 이혼재판을 강행했으나, 교황의 포고령이 없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 황제인 카를 5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혼요청을 거절했다. 한편 헨리 8세는 명령이행을 주저하는 대신 울지를 해임하고, 1532년 토머스 클롬웰을 임명하여 이 문제를 신속히 추진한다. 클롬웰은 로마교황청과 결별하고 헨리 8세가 신임하는 캔터베리 주교에게 교황의 권위를 주었고,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한다. 그러니까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헨리 8세가 아들을 못 낳는 현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새 왕비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하여 로마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생시킨 독자적인 교회였다.
 
이, 1533년 9월 헨리 8세와 앤 불린과의 사이에 엘리자베스 튜더(엘리자베스 1세)가 출생했다.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首長令)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회 수장에 즉위했다.
 
헨리 8세는 1536년 앤 불린이 아들을 못 낳자 반역죄를 씌워 5월 19일 처형하고, 그 이튿날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와 결혼했다. 이렇게 되자 엘리자베스 튜더는 의회에서 사생아로 규정된다. 1537년 제인 시모어가 병약한 아들 에드워드 튜더(에드워드 6세)를 낳았다. 그러나 제인 시모어는 출산한지 11일 만에 죽고 말았다.
 
11549년 엘리자베스 튜더는 에드워드의 왕위를 노린다는 누명을 받고 가택 연금 당한다. 1554년 메리 1세가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인 에스파냐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여 영국을 다시 로마 가톨릭국가로 환원하려고 신교지도자 300명을 처형하는 만용을 저질렀다. 종교불안으로 영국은 내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이때 토머스 와이엇이 켄트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이 난의 배후인물로 엘리자베스 튜더를 의심하여 런던탑에 감금시켰다.
 
1558년 11월 17일 메리 1세가 죽고 엘리자베스 튜더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엘리자베스 1세다. 그녀는 25세에 즉위하여 70세에 죽을 때까지 45년간 독신으로 가난한 섬나라를 세계 중심의 부강국으로 만든 여왕으로 영국을 신교국가로 유지시켰다.
 
<팔방미인 엘리자베스 1세>
 

오늘의 영국이 자랑스럽다면, 그것을 과거의 영국 특히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서 찾아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녀의 치세에서 배울 교훈은 다름 아닌 리더십이다.
 
그녀가 즉위하기 전의 영국은 1295년 에드워드 1세가 소집한 모델의회(Model Parliamentary)로부터 시작된 300년의 역사를 가진 의회국가였지만 이것은 영국이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은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유럽의 변두리 섬나라에 불과했으나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와 결탁한 스코틀랜드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리는 처지였다. 지리적 장점을 살려 국력을 키워 프랑스에 도전했던 100년 전쟁의 실패는 장미전쟁이라는 내전을 초래하였다. 이 전쟁의 실질적인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랭커스터가의 헨리 7세와 요크 왕가의 엘리자베스의 결합은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헨리 8세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헨리 8세는 대륙의 간섭에서 보다 자유로운 독립적인 종교개혁을 이루었으나, 이것은 개혁이라기보다 기형적인 것으로 헨리 8세가 죽자마자 후유증이 터져 나왔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의 치세 때는 영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했을 때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첨예한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신교에서 구교(로마 가톨릭)로 컴백한 데서 비롯된 종교적 위기로 내전 일보 직전의 상태였고, 강력한 의회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격심한 무역수지 불균형과 인플레이션에 허덕이고 있었다. 국가부도 직전이었다.
 
이와 같은 영국을 구해낸 사람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그녀는 즉위하자마자 개혁에 착수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개혁한 신교(영국 국교회=영국성공회)를 지지하였고, 의회와 타협하여 국정을 안정시켰으며, 화폐개혁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았다. 집권 전반기에는 국내문제 해결에 진력(盡力)하였고, 집권 후반기에는 대외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녀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하여 신대륙 발견으로 한껏 상종가를 구가하던 에스파냐를 굴복시키고, 제임스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의 오랜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기도 하였다. 또한 에스파냐 보물선을 강탈한 해적 드레이크를 적극 옹호하는 한편 그에게 투자하여 나라 경제를 튼튼하게 한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하였던 군주였다.
 
친어머니 앤 불린이 처형당하고 그녀 자신도 핍박과 위해를 당하기도 했지만 이 일로 복수하지 않았고, 정치적 라이벌을 탄압하거나 의회의 권한을 축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원만히 해결하였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원칙과 도덕을 존중하고 국가 이익도 중요시하는 군주였다. 때론 타협과 술수에도 능하였으나 늘 겸손하였고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투명하게 했다.
 
그녀에게 이런 일화(逸話)가 있다. 그녀가 13세 때 윈저궁에 있던 어느 초상화가가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그림을 이복언니인 메리 1세에게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은 창피하지만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창피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아한 그림은 세월이 가면 색깔이 바래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겠지만 그 마음만큼은 아무리 빠른 세월이라도 따라잡을 수 없고, 아무리 낮게 깔린 구름이라도 어둡게 할 수 없으며, 아무리 빠른 발이라 해도 밟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세상 이치를 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 초상화에는 성경을 품에 안은 채 곁에 또 다른 한 권의 책이 놓여 있다. 이것은 언니가 얼굴에 관심을 갖지 말고 마음 즉, 내면적인 삶에 집중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그녀는 난세의 군주, 난세의 CEO, 난세의 리더였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버지니아’주 이름이나 서인도제도의 ‘버진 아일랜드’는 모두 처녀여왕에게 받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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