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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 계통에서의 불교 창종양상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11/18 [11:26]
무속단체를 운영하면서 종무정책에 허점을 이용해 불교 창종

민간신앙 계통에서의 불교 창종양상

무속단체를 운영하면서 종무정책에 허점을 이용해 불교 창종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11/18 [11:26]

▲ 장정태 논설위원(서경대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외래교수)     © 매일종교신문
지난 11월 15일 동국대에서 개최된 ‘2014년 추계한국종교학대회’에서 본지 장정태 논설위원(서경대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외래교수)이 한국 불교와 무속의 습합관계를 거론하면서 ‘민간신앙 계통에서의 불교 창종양상’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는 무속단체를 운영하면서 행정적인 지원이 미흡한 정부의 종무정책에 허점을 이용, 창종하는 종단의 실태를 지적해 관심을 끌었다. 요지를 정리하는 동시에 독자의 이해를 돕게 각주를 달아 게재한다. 한편 ‘추계한국종교학대회’에서는 기조강연 및 전체 15개의 전문 분과별 발표 및 토론이 있었다.(편집자주)
 
 
 
무당의 무(巫)는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工) 양옆에 두명의 사람(人 人)이 있는 모습이다.
혹자는 두명은 남녀를 상징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하는 것은 춤을 추는 행위를 하는것이 무당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정의를 한다.
무당은 글자에서 알 수 있듯 하늘과 땅,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간자,사제의 역활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다만 다른 종교 사제들과 다르게 「말씀」이 아니라 「춤」이란 의례를 통해 사람들에게 접근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아울러 또 다른 점은 미래에 대한 일반인들의 궁금증을 신에 이름으로 대리자가 되어 들려준다는 것이다.
 
춤을 춘다는 독특한 무속만의 의례를 굿이라고 한다. 굿은 재가집(신도 집)에서 치뤄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몇년전 부터 기도가 잘되는 영험한 곳,인적이 드믄 곳에서 치뤄지고 있으며 그런 시설물을 흔히 굿당이라고 한다. 대다수 굿당은 사찰에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사, **암 식으로 표기를 하고 일부는 정식종단에 사찰 등록이 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사암연합회등 지역내 불교행사에 당당하게 참석하기도 한다. 과거에도 일부 무속인들은 창건주 보살(주인보살)이란 이름으로 개인사찰을 꾸며놓고 스님을 고용하고 운영했다. 이처럼 직접 승려행세는 하지 않았다. 정식 서류상 사찰의 형식을 갖춘 경우 주인은 주지스님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발전을 하면 독자적인 종단을 창종 종정스님이 되고 신년법어는 물론 봉축법어도 내리고 있어 외형적으로 완벽한 불교의 한 종파로 행세한다. 교학적으로는 불교와 전혀 인연 없는 분이 하루아침에 대종사에 법계를 받고 금란가사를 입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은 외형적인 불교종단 창종에는 전문적인 조언집단이 활동중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를 비롯 다른종교를 신앙하기도 한다.
 
굿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흔히 당주라고 부르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편하게 사장님이라고 한다. 이곳 사람을 무속인들은 삼촌,조카,이모 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굿을 하는 무당에 입장에서는 잠시 굿을 하는 동안 장소를 제공받는 형식을 취하는데 방마다 홋수가 있어 언듯보게 되면 숙박업소 같다. 사실 숙박업처럼 운영한다. 하루 방을 빌리는데 얼마 하는 식이다. 그리고 저녁에 굿을 시작하면 적어도 다음날 오전 중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원칙이다. 여관운영 방식과 같다.
 
다만 다르다면 식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여인숙, 여관에서 아침에 떠나는 객을 위해 아침을 제공하기도 했으니 그런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무불습합의 발생원인 
 
‘습합‘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예기」이다. 즉 ‘천자가 악사에게 명하여 예악을 습합하게 한다’하여 습합을 ‘조절’의 의미로 썼다. 습합이란 두 문화가 절충하여 서로 변모하로는 제3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문화변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습합은 이질적인 외래문화와 특정지역의 전통문화가 만나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정리할 수 있다.
 
1392년 유교를 국시로 하는 정권이 탄생하면서 무속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백정, 창기와 함께 천민으로 분류되었으며 일제하에는 한국의 민족문화는 무엇이든 탄압하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해방이후에는 서구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미신시 당하며 기(氣)를 펴지 못하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된 새마을 운동으로 전근대적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게 된다.
 
그 결과 무당이나 마을의 서낭당 신앙들이 차츰 비주류 문화로 전락하게 된다. 현재 무속을 종교로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 종교로 보기보다. 하나의 전통적인 민간신앙,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행해오던 하나의 의식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 실례로 문화관광부 산하 기관으로 불교를 비롯 기독교, 민족종교를 상대하는 종무실이 설치되어 있다. 그들의 주 업무는 불교, 기독교, 민족종교를 상대하는 일이다. 무속을 비롯 민간신앙은 지역전통문화과에 소관업무 배정된 것으로 추론할 수 밖에 없다. 정부의 무관심은 서울 근교에 수십개의 굿당이 미신타파라는 미명아래 강제철거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렇듯 어렵게 명맥을 이어오던 굿당들이 80년도 중반기부터 활발하게 들어서고 있다.
 
이들 굿당이 보존되어 영업을 지속적으로 가능한 것은 불교종단에 사찰로 등록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무당들이 당주라고 부르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주지임명장을 소지한 엄연히 주지승이다. 무당의 숫자는 대한민국 어느 기관에서도 정확한 통계치를 가지고 있지않기 때문에 단정 할 수 없지만 대략 몇 만정도는 될것이다는 것이 무속 연구자들의 생각이다. 무속인의 숫자와 관련 일부 단체와 언론들은 1백만 혹은 2백만 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주장을 근거로 복채 추정액을 산출하기도 하는데 년간 복채로 전국민이 사용하는 돈의 액수가 수조라고 한다. 무속인의 숫자가 정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와같은 추정액은 사실 근거없는 이야기다.
 
그 몇만 속에도 무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과 무속행위를 하면서 방편으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소속 종단, 민족종교단체 등에 가입 승려, 회원으로 활동하는 숫자가 다수 포함되어 정확하게 분류하고 통계하기는 어렵다. 무속인들의 최대단체 대한경신회에서 제공하는 자료에서도 정확한 통계를 가름할 수 없는 것이 무속인 숫자다. 대한호국불교미륵선종(사단법인 한국민속예술연구원), 대한불선불교 일심종(신무교총본산 계승종)의 경우 같은 사람(동일인)이 불교종단과 무속단체를 동시에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이 불교와 무속을 동시에 운영하는 사람들은 무속단체를 운영하면서 행정적인 지원이 미흡한 정부의 종무정책에 허점을 이용 창종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무불습합의 종단, 불교종단과 무속단체간 상호교류 통해 변형적 발전
 
이와같은 무불습합적 종교 현상은 1987년 11월 28일 전통사찰 보전법으로 대체입법이 발효되기전 한국불교의 자율권을 심하게 규제하던 불교재산관리법 폐지는 한국불교의 자율성과 함께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다만 대체입법 이후 불교 본연의 모습에 이탈된 불교종단의 창종 현상에 대한 대비가 미흡했다. 현재와 같은 무불습합의 종단, 불교종단과 무속단체간 상호교류를 통해 승려증 발급, 기성 불교종단 고위인사의 무속종단 설립과 같은 변형적 발전하는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불교의 자율권 획득은 종단난립과 무자격 승려의 대량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을 비롯 수개의 종단을 제외하고 변변한 교직자 양성 프로그램도 운영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상당수의 승려들이 배출되는 이면에는 이와같은 무불습합적 승려들의 대량유입을 통한 외형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한국불교가 유지되었을 때 종교로써 불교의 위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각주>
1.고승대덕을 일컫는 존호
2.금실로 지은 가사, 석가모니의 이모였던 마가파도파제 부인이 석가모니에게 금색의(金色衣)을 한 벌 지어올린데서 유래하였다. 이때부터 금색가사는 국가적 차원의 행사에서 당대 최고의 고승인 증명법사 한 사람만 입는법의였다.(구미 금강사 금란가사 설명)
3.굿당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봉급개념이 없다. 기본급외 수당하는 임금체계가 아니라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을 굿당이 책임지고 나머지는 굿당을 찾아오는 무속인들 팁으로 생활하게 된다. 근로계약서 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늘 생활이 불안하다. 무당들의 한 마디에 실직과 직결된다.
4. 최래옥, 「한국민속과 기독교의 습합양상」, 『비교민속학』, 제23집 비교민속학회, 2003, p.118.
5. 김용표, 『포스트모던 시대의 불교와 종교교육』, 정우서적, 2010, p.71.
6.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하여 소집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근면·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경쟁적·선별적 방식으로 점화된 새마을사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이것이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이 아니라 공장·도시·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은 그 정신적 기조로서 근면·자조·협동을 설정하게 되고 그 추진 방법으로서는 우수한 지도자의 헌신적 봉사를 기조로 하고 동시에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지원이라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의 절대적인 후원과 우수한 남녀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정부(공무원과 정부지원)라는 3자의 연합이 핵을 이루면서 추진된 국민운동이었다. (두산백과)
7. 2014년 10월 14일 오후 04시 문화관광부 종무실 직원과 통화내용을 참고삼아 결론내린 것이다.
8. 대한승공경신연합회 1971년 조직 전국 1백 95개 지부에 무당, 역술인 등 약 8만여 명 회원을 두고 있다.(한경 Business, 1997년 09월 16-23일, p22)
대한경신연합회 가입회원 10만여명을 합쳐 대략 25만명 정도(시사월간 WIN 1997년 7월호 p.156)최대 규모의 무속인 단체 사단법인 한국경신연합회는 23만~25만 명의 무당이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경신연합회에서 공식적으로 무당에게 발급해주는 등록증은 지난 1971년부터 현재까지 약 8만 장에 이르고 현재 공식적인 활동을 해 매년 발행되는 수첩과 신분증을 받아가는 무속인은 1만5000명 정도가 된다.(문화일보, 2012년 09년 05일)
9. 무교신문, 2014, 09,15일자.
10. 한국민속예술연구회 주최 제3회 한국민속(팔도굿)경연대회에서 대회장은 “100만 전국 무속인 대표”라는 표현을 통해 참가자들을 독려했다. 이 대회장은 1-2회 경연대회에서는 “200만 전국 무속인”으로 주장했다.(장정태, 『무속현장』, 민속원, 2004, p.219)
11. 국내역술,점술가 수는 적개는 30만명에서 많게는 60만명까지 보고 있으나 대략 40만 정도로 추산된다. 복채 1만원에 하루 1명씩 만 본다해도 연간 1조 4천억 시장이다. (뉴스메이커, 1998년 01월 22일, p.32)
12. 1967년 5월 이청담(조계종), 박대륜(태고종), 김운운(법화종), 김혜공(진각종), 이홍선(관음종)과 최영희, 김선규 등 국내 불교계 대표 75명이 모여 불교계의 대동단합과 총화를 기하고 호국불교의 사명을 다하고자 대한불교총연합회를 발기하고 1969년 3월에는 12개 종단 대표 발기인 200명이 모여 한국불교총연합회를 창립했다. 1973년 10월, 19개 종단 대표자 및 지도자 300명이 모여 한국불교총연합회와 한일불교 친선협회를 통합한 한국불교회를 결성하여 조직이 확대된 후, 1974년 대한불교총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다시 1980년 11월 한국불교종단연합회로 명칭을 바꾸고 1989년 현재의 명칭인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되었습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2012년 8월 현재 27개 회원종단으로 확대되었다. 또, 협의회는 매년 한·중·일 3국 불교도들의 국제회의인 한중일불교우호교류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봉축위원회 활동을 통해 ‘부처님 오신 날’ 연등축제를 주최 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홈페지 참고)
13. 1950년대 말 무속인들의 모임 경신회가 만들어졌고 1971년 공식적으로 대한경신승공연합회가 출범했다. 대한경신승공연합회는 2000년도 남북화해의 흐름을 타면서 ‘승공(勝共)’을 뺀 대한경신연합회(이하 경신회)로 행정자치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됐다. 경신회는 독자적인 종교단체를 구성하기 위해 1988년 5월 경기도 남이섬에 모여 ‘천우교’의 창종을 선포 「천우교 교리서」발간(박일영, 『한국 무교의 이해』, 분도출판사, 1999, p.18)하기도 한다. 이 단체외 <한국무속협회>,<한국민속문화경신회>,<한국설화신화토속문화진흥협회>,<한국무속인총연합회>,<한국민속문화예술원>,<한국무속인협의회>,<무교교단>,<한국전통무속문화총연합회중앙회>, <무신교총연합회>,<사단법인 한국무속종단>,<사단법인 한국무신교총연합회>,<한국문화무속총연합회>,<무속인협회>,<동방무속진흥원>,<한국전통문화무속협회> 불교와 민속(무속)의 습합단체로는 <한국불교자유총연합회>,<사단법인 민속불교 삼보종>,<대한불교 민속종>,<세계민속불교 칠성종>,<천우종>,<단군신앙불선종>,<한국토속불교 천신종>,<무불종>,<대한토속불교 금강종>이 있다.
14. 무속단체는 1920년 6월 1일 숭인조합이 “무녀들을 통제하여 종래 자칫하면 풍속을 문란케 하고 위생에 장애가 된 무녀기도의 폐를 제거”하고 “기도를 일정한 장소에서, 조합원은 모두 영과 신을 존승하고 풍속을 문란케 하거나 비위생적일 수 있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목적으로 창립된 이루 신리종교(1922년 신리교 교정원으로 출발) 문화연구회(1927) 성화교(1931) 서선신도회(1929) 등이 해방전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는 무량천도(1945)가 있다.(장정태, 『무속현장』, 민속원, 2004, pp.147-148)
15. 불교의 포교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전개 된 문화현상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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