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칭호-몽골 통치자,알탄 칸이 1578년 처음으로 부여
이치란 박사의 종교가 산책●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②‘달라이 라마’ 칭호-몽골 통치자,알탄 칸이 1578년 처음으로 부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로 계시면서도 달라이 라마께서 한국을 방문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달라이 라마와 만나려고 동북아 대사를 접촉했던 것은 노벨 평화상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고, 세계평화 운동가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해서 달라이 라마와 평화상 수상동지가 되었고, 이후 만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강원룡 목사께서도 동북아 대사를 수유리 크리스천 아카데미 하우스에 초청해서, 다와 대사와 우리 일행 3명은 강 목사와 대담을 나누었다. 알고 보니 강 목사님은 일본에서 신학대학을 나왔다고 했으며 영어가 유창했다. 목적은 달라이 라마가 오시면 한국 종교인들과의 모임을 갖고 달라이 라마와 세계평화에 대한 덕담을 나누자는 것이 취지였다. 강 목사께서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자 한 분이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 하도 자랑을 해서 도대체 달라이 라마는 어떤 분인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에 온다는 뉴스를 듣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3시간 정도 오찬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3시간 동안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오찬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다와 대사는 강 목사님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감탄했다. 우리는 종교지도자 모임에서 강 목사님을 좌장으로 모시기로 잠정 결정하기도 했다. 사실, 이 무렵 달라이 라마는 유럽과 미국에서 세계적인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면서 한창 인기 절정에 있을 때였다. 미국은 달라이 라마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중국의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달라이 라마 카드를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CIA가 1959년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길에 관여했다는 비화가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지만, 달라이 라마는 중국 견제용 카드로 그때그때 사용됐음은 사실이었다. 최근 AFP 통신사가 바티칸 발로, 로마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의 모임이 있으나 교황께서는 당초의 계획을 바꿔 달라이 라마를 만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달라이 라마의 행보는 전 세계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특히 중국 당국에서 그렇다. 이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강원룡 목사님 같은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추진위원회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오시면 잠실운동장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달라이 라마 환영대법회’란 주제로 집회를 열 것을 계획하고, 잠실운동장 현지답사를 수차례 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방한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자 우리는 방한에 대한 일정과 구체적인 방한절차를 협의하기 위해서 다람살라로 재차 향했다. 이번에는 故 박 회장과 금강경 독송회장인 강대관 사장과 나 이렇게 세 사람이 갔다. 일본에 있는 동북아 대사는 인도에 먼저 가서 달라이 라마와 망명 정부 그리고 인도 정부하고도 사전 협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 정부 수반으로서 인도정부의 신변보호를 받는 망명 정치인 신분이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달라이 라마로 집중해보자. 도대체 ‘달라이 라마’ 라는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신정(神政)의 왕과 같은 지존의 성하로서 하나의 제도가 된 배경과 역사는 무엇인가를 소개해 보겠다. 전회에서 잠깐 소개했지만,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정신적 지도자 서열은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그리고 젭춘담바 쿠투쿠(복드 칸)라고 말한 바 있다. 달라이 라마는 대승불교에서 자비보살인 아바로키데스바라(Avalokiteshvara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며,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그리고 제3 서열인 복드 칸은 몽골과 관련이 있다. 먼저 차례로 알아보자. 이런 사전 지식이 없으면 달라이 라마나 티베트 불교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제1세 달라이 라마는 겐둔 드룹(Gendun Drup 1391–1474)이며 그는 사후에 제1세 달라이 라마로 추존(追尊)된 분이다. 이 분은 목동 출신이었는데 지금 서장(西藏) 자치구 시가체시에서 네팔 가는 방향으로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나탕 사원에서 라마가 되었고, 후에 주지가 된 분이다. 나탕사원은 우장 지역에서 네 번째 큰 사원이다. 제2세 달라이 라마는 겐둔 갸쵸 팔장(Gendun Gyatso Palzangpo 1475–1542)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그가 제2세 달라이 라마라는 사실은 몰랐다. 그는 네 살 때 1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공포되었다. 1세나 2세의 전기(傳記)를 소개하려면 내용이 상당히 길다. 제3세 달라이 라마는 소남 갸쵸(Sonam Gyatso,1543–1588)로서, 그에게 처음으로 ‘달라이 라마’란 칭호가 부여된다. 이 칭호는 1578년 몽골국의 통치자 알탄 칸(Altan Khan)이 소남 갸쵸에게 부여했다. 알탄 칸 자신이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이 환생했다는 것을 소남 갸쵸가 선포해준 선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소남 갸쵸는 비로소 달라이 라마가 되고, 제1세와 제2세 달라이 라마는 사후에 추존됐다. ‘달라이 라마’ 칭호는 이렇게 몽골 통치자의 정략적 필요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제3세 달라이 라마인 소남 갸쵸는 2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라고 선택된 다음, 라싸에 있는 유명한 드레 펑 사원(Drepung Monastery)에서 판첸 소남 드락파(Panchen Sonam Dragpa1478-1554)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한다. 판첸 소남 드락파는 겔륵파 전통의 정신적 지도자인 제 15대 간덴 뜨리파(수장)였다. 겔륵파 소속으로는 3개의 사원 대학이 있었는데, 드레 펑 사원은 그 중 하나였다.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 된 판첸 소남 드락파는 겔륵파를 창시한 종가파의 환생으로 인정되고, 1539년 ‘툴쿠’라고 하는 화신(化身)으로 즉위한다. 판첸 소남 드락파는 2세와 3세의 스승이었고, 계속해서 판첸라마 환생의 법맥을 이어가게 된다.
알탄 칸이 등장할 때 까지 몽골제국은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가 알탄 칸에 의해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다시 몽골제국인 원을 세웠는데, 이를 북원(北元)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그는 칭기즈칸의 황금가지 직계인 쿠빌라이 후손이었지만 몽골 국민들은 확실하게 믿어주지 않았다. 이런 문제가 항상 북원을 통치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능력 있는 장군으로서 여러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다스려서 북원을 세워 권태중래의 야망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황금가지에 대한 불신으로 민심을 얻는데 다소 장애가 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칭기즈칸의 황금가지라고 증명하는 어떤 극적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쿠빌라이 칸의 환생이라는 정통성 입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티베트 불교의 고승으로부터의 황금가지 정통성을 증명하는 의식이 필요했다. 알탄 칸은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종가파가 창종한 겔륵파를 선택하고, 당시 겔륵파의 수장인 소남 갸쵸를 몽골 고원에 초청하여 국민들에게 법문을 내려달라고 했다. 소남 갸쵸는 알탄 칸이 쿠빌라이 칸의 환생임을 선포했고, 알탄 칸은 소남 갸쵸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전임의 두 분에게도 제1세와 제2세의 달라이 라마 칭호를 추존했다. 알탄 칸의 통치는 중국 북부 지역을 비롯해서 티베트까지도 영향력이 미쳤던 것이다.
이에 사절단은 이런 풍습을 중단하고 동물 살생을 자제하는 등의 조건을 내세웠지만, 알탄 칸은 기꺼이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끝내 소남 갸쵸 겔륵파 수장이 직접 와야 한다는 강한 요청에 의해서, 별로 긴 여행을 내키지 않은 소남 갸쵸를 측근들이 설득하여 1577년 몽골을 방문하여 권위를 맞교환 한 것이다. 이후 알탄 칸은 황금가지로서의 신분을 확실하게 인정받고 통치하다가 1582년에 서거 했다. 소남 갸쵸는 제3세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여 신정에 가까운 권위가 부여됐다. 1585년에 다시 몽골에 와서 몽골 국의 왕자들과 부족들을 불교로 개종시키는데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 제3세 달라이 라마는 명나라로부터도 중국에 남아있는 몽골 족을 위하여 콜(초청)을 받는 등 주가가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3세 달라이 라마는 명나라 방문을 앞두고 1588년 45세의 나이로 몽골에서 티베트로 돌아가는 길에 입적하게 된다. 티베트는 몽골과 지리적 교통로가 뚫려있었다. 당나라 때도, 당번고도(唐藩古道)라고 해서, 지금의 사천성 지역이 아닌 청해성의 시닝(西寧)을 지나서 청장고원(靑藏高原)을 넘어 토번(吐藩 티베트)의 서울 라싸로 갔던 것이다. 당나라 때, 문성공주가 송챈 감포 왕에게 시집갈 때도 이 당번고도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 3세의 긴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다만 제4세 달라이 라마는 알탄 칸의 직계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제4세 달라이 라마 욘텐 갸쵸(Yonten Gyatso 1589–1617)는 몽골에서 태어났으며, 제3세 달라이 라마의 측근들에 의해서 제 3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되고, 이런 사실을 티베트에 통보하고 욘텐 갸쵸를 옆에서 보호하게 된다. 욘텐 갸쵸는 알탄 칸의 증손자뻘이 된다. 욘텐 갸쵸는 10세 때인 1599년 티베트를 향해서 출발하게 되고, 티베트와 몽골은 더욱 가까워지면서 티베트 불교는 몽골 지역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제 4세 달라이 라마는 라싸에 도착해서 겔륵파의 수장에 의해서 제4세 달라이 라마로 등극하고, 드레 펑 사원 대학에서 제4세 판첸 라마의 제자가 되어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되면서 1614년 구족계(비구계)를 받는다. 그리고 나중에 드레 팡 사원의 주지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티베트인들은 그가 몽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616년 동굴사원에서 특별 수행정진을 하다가 1617년 27세의 나이로 일찍 죽고, 역대 달라이 라마 가운데 가장 막강했던 제5세 달라이 라마로 환생하게 된다.
우리 일행 3명은 1992년 5월 인도 수도 델리를 경유하여 다람살라에 도착해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했다. 두 번째 친견(親見)이어선지 달라이 라마께서도 아주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친견을 마치고 우리는 보다 구체적인 방한일정과 프로그램을 갖고 성하(聖下)의 비서진과 동북아 대사와 인도정부 공안 담당 등과 사안별로 실무 논의에 들어갔고, 무려 일주일 동안 세부일정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논의 결정하고 최종안을 성하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귀국해서 문제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계속)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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