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그분 이야기-종교개혁①
기독교가 등장하게 된 종교개혁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마치 성경 말씀“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처럼. 그중 열 명의 순교자들을 살펴본다. (1) 존 위클립(John Wycliffe 1324~1384) (2) 얀 후쓰(John Huss 1370~1415) (3) 제롬(Jerome Von Prague 1365~1416) 1365년 보헤미아 귀족의 아들로 출생,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위클립에게 감화를 많이 받았다. 그 후 파리에 유학하면서 개혁정신을 강하게 품게 됐다. 1407년 후쓰와 친교를 맺으면서 로마법왕권의 타락과 모순을 지적하는 웅변적인 설교자로서 그에겐 제자가 특히 많았다. 1415년 후쓰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호출되어 위기를 맞아 잠시 자기의 개혁적인 주장을 포기하는 듯한 처신을 하기도 했으나 1416년 후쓰가 화형당한 장소로 끌려 나갔다. 그는 불길이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을 때 이렇게 기도드렸다고 한다. “주여 전능하신 아버지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항상 당신의 진리를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아시나이다.” 마침내 그의 음성은 그쳤으나 기도는 그치지 않고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4)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84~1536) (5) 토머스 크림머(Thomas Crammer 1489~1556) 1489년 영국 노팅험샤 애스덕튼에서 출생, 캔터베리에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감독이었다. 1500년경 캠브릿지대학에서 수학, 일찍이 처자를 잃고 수년간 수도사가 되기도 했다. 후년 모교의 명예교수와 신학박사학위도 얻었다. 1529년 국왕 헨리8세의 부탁으로 ‘이혼’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드워드6세 때는 교회의 개혁을 단행하고 혁신운동을 추진했으나 왕의 죽음으로 뒤를 이은 메리 여왕의 미움을 사 반역자, 이단자로 몰려 1556년 3월 26일 죄수로서 성마리아성당 앞에서 대중들에게 그의 잘못을 고백하도록 내세워졌으나 그는 오히려 “내 뜻을 굽혀 내 주장을 고친 것을 일평생 행위 중 가장 아프게 후회하고 있다”라고 소리쳤다. 그는 화형을 당하였는데 불속으로 끌려 들어갈 때에 손을 높이 들고 “이 더러운 손이 죄를 범하였다”라고 외치며 운명했다. (6) 휴라티머(Hugh Latimer 1490~1530) 1490년 영국 사르가스톤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한 설교가. 14세에 캠브릿지대학교에 입학, 문학석사 학위를 받기도 한 그는 근엄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졸업연설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열렬히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자기 연설을 들은 비르니와 회견하고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고백을 듣게 된 후 로마법왕권의 모순과 부패와 타락을 새삼 숙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자 지금까지 법왕권에 대한 충성을 거두고 비판과 공격을 가하게 됐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설교 금지령을 받게 됐으며 후에 우스타 감독이 되었으나 헨리8세의 친 가톨릭 정책에 반발하여 은퇴한 후 두 번이나 투옥됐다. 그 후 런던에서 열린 종교개혁정신 지지 연설을 한 이유로 메리여왕 때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죽기 직전 동지 리드레이를 향해 “리드레이군, 용기를 내시오 사내답게 죽읍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다 횃불을 지른 거요. 이 불은 결코 꺼지지 않으리다”라고 외쳤다. (7) 요한 프랏토 폴드 (John ~1555) 영국 헨리8세 집권 초기에 출생, 법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졌으나 신학에 흥미를 가지고 캠브릿지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목사가 됐다. 영국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유력한 선교자 중의 한 사람으로 메리여왕이 집권했을 때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런던탑에 갇힌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회유와 협박이 심하였으나. 1555년 진리를 위하여 화형의 괴로움도 기쁨으로 여기면서 순교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8) 니콜라스 리드레이 (Nicholas Ridleys 1500~1553) 영국 월만스톡에서 출생한 고명한 감독이며 순교자. 캠브릿지의 벰푸록대학을 졸업하고 1522년 교직을 받았으나 다시 연구의 길을 떠나 파리에서 연구 후 캠브릿지로 돌아왔다. 1540년 왕실 목사가 된 것을 시작으로 1541년에는 캔터베리, 1547년에는 로체스터 감독, 1553년에는 런던 감독이 됐다. 그는 1545년 만찬화체설을 공공연하게 부인하고 교회의 모순과 부패를 추방하는 데 앞장선 위험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1553년 라티머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10월 16일 파리오에서 화형으로 순교했다. 그는 처형당하던 전날 밤 가까운 친구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제 침상으로 자러 갈 터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편안히 잠들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9) 존 후퍼(John Hooper 1495~1555) 1495년 영국 서머셋 샤이어에서 출생, 캠브릿지의 멜튼대학을 졸업하고 시토우 교단에 가입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던 중 특히 츠빙글리 및 브린겔의 바울서한을 정독하여 개혁주의자가 됐다. 그에 대한 영국내의 박해가 심해 유럽으로 건너가 수년간 방황하기도 했으나 1549년 귀국하여 눈부신 활동을 했다.1550년에는 왕 앞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설교를 했고 그라우세타지방 감독에 선출되고 1552년에는 칙선 감독에 선임되어 모범감독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신부의 제복(祭服)은 구약의 아론적이며 미신적이라 입기를 거절해 투옥되기도 했다. 복직 후 직무를 수행하던 중 메리여왕의 등장으로 구속 수감되어 1555년 그로스터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탄식하는 친구들을 향하여 “죽음은 괴로운 것이요 삶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오는 죽음은 더욱 괴롭고 다음에 오는 삶은 더욱 좋다는 것을 생각하라.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죽음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그 주장을 버리고 죽음을 면하라고 권면하는 이들에게 “나의 영혼을 사랑하거든 나에게서 물러가라”고 거절했다. 화형에 쓰는 나무가 생나무라 불에 잘 타지를 않아 그가 당하는 죽음의 고통은 더욱 심하여 오랫동안 괴로움을 당하다 죽었다. (10) 존 로저스(John Rogers ~1555) 영국 캠브릿지에서 공부한 후 성직을 얻었고 후일 앤트워프 소재 영국 공장에 속한 목사가 됐다. 틴데일과 사귀면서 그의 지원을 받아 성경의 영어역의 완역을 출판했다. 그 후 영국에 돌아가서 성바오로 회당에 속한 목사가 되었다. 메리여왕 즉위 직후 일요일에 그는 회중을 향해 모든 가톨릭의 형식과 교의를 부인한다고 말하였다. 이를 빌미로 심문을 받고 체포, 수감되어 메리여왕 최초의 순교자로서 화형 당했다.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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