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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담 스님(충남 금산 효심사 주지)의 법문

김정호 기자 정리 | 기사입력 2015/01/22 [14:41]
남을 의지하지 말고, 밖에서 구하지 말라

성담 스님(충남 금산 효심사 주지)의 법문

남을 의지하지 말고, 밖에서 구하지 말라

김정호 기자 정리 | 입력 : 2015/01/22 [14:41]


제가 충청남도 금산 시골에 20년 전에 들어갔어요. 사람들이 와서 물어봅니다. 올해 우리 집 수리해도 됩니까? 제가 말합니다. “마음먹기 달렸습니다.” 1년 내내 이것만 가르쳤습니다. 부처님은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지식에 끌려 다니니, 절에 다니는 거나 안 다니는 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절에서 삼재풀이 안 한다 하니까, 정초에 기도하러 아무도 안 옵니다. “왜 안 오세요?” 물었더니 삼재풀이를 안 해서 안 온다는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오늘은 제가 신통력을 부려서 제 실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솔깃해서 쳐다봅니다. 스님이 무슨 신통력을 보이려나? “올해는 아무도 농사를 짓지 마세요. 제가 부적을 하나 써 줄 테니 논두렁에다 묻어 놓으면 콩이 쏙 올라옵니다.” 그랬더니 다들 웃습니다.
 
‘착각’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
 
밥 한 그릇도 못 만드는 부적으로 어떻게 삼재풀이를 합니까? 삼재가 뭐냐고 물으면 모른대요. 삼재풀이 십년을 했다는 거예요. 이게 우리나라 불교의 현주소예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절에 다니면 법을 잘 배우고 힘이 생겨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누가 이 말하면 우르르 저 말하면 우르르…. 절에 다니나 안 다니나 뭐가 차이가 납니까?
 
‘문사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聞), 이건 듣는 겁니다. 사(思), 생각해 봐라. 이 말 맞나 틀리나 확인해 봐라. 용(用), 확인이 끝나면 사용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절에선 ‘문사수(聞思修)’라고 하는데, 이 닦을 수(修)가 감이 잘 안 잡혀 ‘문사용’으로 바꿔서 말하면, 잘 안 잊어버립니다. 방편도 잘 알아듣게 해야 합니다. 이게 맞춤식 서비스입니다. 만날 옛날 하던 대로 하면 못 알아들어요. 무아(無我)가 뭐냐? 몰라요. 공(空)이 뭐냐? 몰라요. 절에 수십 년 다녀도 불교의 핵심 중의 핵심인 ‘무아’와 ‘공’을 몰라요.
 
고속도로에서 추돌차고가 났습니다. 운전자에게 ‘삼재 들어서 박았어요?’ 물어보세요. 그럼 귀싸대기 맞죠. 또, 부도난 사람에게 ‘삼재 들어 부도났냐?’고 물어보세요. 너무 쉽잖아요. 이렇게 확인해서 아니면, ‘아, 거짓이구나!’ 간단해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깨달은 후에 나오는 힘을 법력(法力)이라고 합니다. 부동심(不動心), 깨달음의 힘입니다. 절에 수십 년 다녔으면 법력이 있어야지! 다른 종교는 절대적인 힘에 의존하라고 가르치지만, 불교는 자신이 법을 증득하여 자기 힘으로 세상을 꿋꿋하게 걸어가라 하므로 완전 차별화전략으로 우뚝 설 수 있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절에 다니면서 목표의식이 없어요. ‘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배우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절을 왔다 갔다 했다면, 지금쯤 여러분 가정엔 더 이상 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정확히 듣고, 생각해 보고, 적용시켜서 확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겁니다. 이게 깨달음인데, 깨달음이 거창한 줄 안단 말예요. 이런 걸 자기 스스로 한 번만 생각했다면, 사찰에서 삼재풀이 하는 건 사라진다 이 말예요!
 
깨달은 사람은 방향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게 대자유인이에요. 들어봤잖아요. ‘아, 동서남북은 각자 자기를 기준으로 하니까, 정해진 건 없구나!’ 딱 깨달으면 돼요. 방향이 본래 없으면 삼살방(三煞方- 세살, 겁살, 재살이 끼어 있는 불길한 방위), 대장군 방향도 없구나. 딱 알 수 있잖아요! 이렇게 구속에서 졸업하는 거, 이게 법력입니다. 깨달음의 힘, 지혜의 힘입니다. 삼살방, 대장군 이런 것은 지식입니다. 부처님께선,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절에 다니면 목표의식이 있어야
 
이사 가는 날짜, 손 없는 날이 좋다고들 그러죠? 음력으로 9일, 10일…. 절에 수십 년 다니면서도 아직 여기서 졸업을 못했어요. 아직 깨닫지 못했어요. 좋은 날 받아서 갔는데 왜 잘 살지 못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그랬을까요? 이렇게 확인을 해 보시라고요.
 
궁합을 보러온 사람에게 ‘궁합이 뭐냐’고 물으면 몰라요. 궁합이 뭔지도 모르면서 물으러 온다는 게 너무 웃기잖아요? 저는 이사 날 받아줄 때 “남편이 이사할 때 도움이 됩니까?” 이걸 꼭 물어봐요. 도움 안 된다면 남편 출근하는 날로 잡으라고 합니다. 깨달음이 이렇게 쉽다니까요. 이게 지혜입니다. 그 상황에 꼭 맞게 하는 걸 지혜라고 합니다.
 
여러분, 법회 끝나면 부처님 배꼽이 있는지 보세요. 너무 웃겨서 배꼽이 다 빠졌어요. 궁합이 뭔지도 모르고 궁합을 보러 다니고, 삼재가 뭔지도 모르고 삼재풀이 하러 다니니 부처님이 웃다가 배꼽이 다 빠져버렸어요. 마음으로, 보는 대로 보인다. 이걸 깨닫는 게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예요.
 
‘부처님이 깨달았다. 부처님 가르침 좋다.’ 아무리 떠들어대도 소용없어요. 내가 깨달아야지. ‘내가 실천해보니까 너무 좋더라.’ 이래야지. ‘윗집은 강남에 백 억짜리 빌딩이 있단다.’ 얘기하면 뭐해요. 내 통장에 돈이 있어야지! 이런 이야기로 10년 20년을 보내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중에 하나라도 내가 먹어보고, ‘야 정말 이 세상에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구나.’ 하고, 내 자식들에게 ‘내가 이 땅에 와서,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이 이것이다’ 하고 턱 내놔야 합니다. 돈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마하반야바라밀의 지혜를 줘야 합니다. 지혜 중의 지혜, 마하반야바라밀. 이것으로 끝내지 않은 부처님 없었고, 이것으로 끝내지 않은 보살님 없었으니, 이걸로 끝내라 이 말이에요!
 
마하반야가 얼마나 쉬운지 압니까? 내가 며느리에게 ‘저게 나쁜 년이다.’ 이게 색(色)이에요.
 
그런데 ‘애고, 내가 안 좋게 봐서 그러네. 착각이었다. 나쁜 년은 없구나.’ 이게 공(空)이에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마하반야라고요. ‘아, 내가 알던 게 옳지 않구나.’ 이게 무아(無我)를 체득한 거예요. 이렇게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이 말입니다.
 
내가 안 좋게 보지 않는 한, 절대 좋아지지 않고, 내가 좋게 보면, 무조건 좋게 보이는 거예요. 제법(諸法)이 무아(無我)다 이겁니다. 이게 ‘일체유심조’입니다. 원효 스님은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깨달았는데, 오늘 여러분들은 그냥 깨달았잖아요. 꼭 화두참선하고, 염불삼매에 들어야 깨닫습니까?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법문 들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법문 들으면서 삼재가 없네, 좋은 날은 이런 거네, 궁합도 별 게 아니네. 이렇게 깨달으면 거기서 자유롭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는 자는 괴로움에서 즉시 벗어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다음 생에 좋아진다.’ 이런 말 하나도 없어요. 부처님이 늘 쓰시던 말. ‘와서 보라’ 안 온 사람은 못 보죠. 부처님 가르침은 이런 거예요!
 
부처님 깨달음 보다 내 깨달음이 중요
 
사회에서도 싸우다가 안 되면 법에 가서 심판받죠?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판단해야할 기준을 법(法)에다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네 가지를 기준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지식에 의존하지 말고, 지혜에 의존하라.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법에 의존하라. 말이나 언어나 문자에 의존하지 말고 그 뜻에 의존하라. 불요의에 의존하지 말고 요의에 의존하라.’
 
요의(了義)는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고, 불요의(不了義)는 ‘관세음보살만 하면 된다, 지장보살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한 개씩만 일러주는 것입니다. 요의가 딱 서 있고, 맞춤식 서비스를 해야 하는데, 어떤 절에 가면 ‘지장보살만 하면 된다.’ 어쩐다 합니다. 이건 틀렸다가 아니라, 온전한 깨달음을 얻기 어렵습니다. 요의에 의존하라는 말씀은, 원력과 회향으로 딱 중심이 서고, 지혜를 증득해서 자비를 행하시는 분을 만나 묻고 배워라, 눈 밝은 선지식에게 배우라는 말입니다.
 
절에 안 오더라도 이렇게 법의 당체가 딱 서면, 여러분 집이 법당이고, 부처님 모신 곳이에요. 법이 서지 않으면, 법당에 와도 법당이 아니에요. 그래서 한 번 절에 가더라도 그런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저를 만나 깨닫지 못했다면, 다 제 잘못이에요.
 
깨달음은 ‘착각’임을 아는 거예요. 거창하게 보지 말라고 그랬죠? 자기모순을 발견하는 게 깨달음이에요. ‘안 좋게 보니까, 정말 안 좋게 보이는구나.’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게 공을 체득하는 거예요. 그게 마하반야라니까요. 그걸로 해결 안 되는 게 있습니까?
 
자, 정리해 봅시다. 자기 속에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남을 의지하지 말고, 밖에서 구하지 말라. 오직 자신을 믿고 의지하라. 이 세상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긴다. 이것이 진리이니, 이 진리를 믿고 의지하라. 세상에서 자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속에 보배가 있는 줄 모르고 밖에서 찾는 사람이다. 자기 마음 밭에 생각의 씨앗을 뿌려라. 그러면 싹이 나와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어 나도 먹고 남도 줄 수 있다.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자신이 가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이 가르침을 믿으라. 이것이 길이다. (녹취 및 정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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