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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함석헌이 말하는 행복의 관성법칙
함석헌평화포럼-김대식 박사
기사입력: 2015/01/29 [14:4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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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종교신문

뉴턴(Issac Newton, 1642-1727)의 운동법칙 중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모든 물체는 외부에서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을 경우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해서 정지해 있으려고 하고, 운동을 하는 물체는 등속 직선운동을 지속하려고 한다.
 
실례로 누구나 한번쯤은 운행 중이던 버스나 지하철이 갑자기 급정거를 하면 몸이 진행 중이던 방향으로 넘어지려고 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 반대로 정지해 있던 버스나 지하철이 출발할 때도 운행하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몸이 기우는 것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전자는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 때문에, 후자는 정지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관성법칙의 요지는 바로 물체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행복의 관성은 불행의 관성을 벗어나려는 것
 

물리학에서 관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생물학에서는 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것이 있다. 외부환경과 생물체 내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순간순간 생물체 내의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현상이다. 얼음물을 마시거나, 혹은 뜨거운 물을 마시거나 할 때 우리 몸의 체온이 36.5℃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생명체가 지닌 항상성의 원리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의 공통점은 자신이 처한 상태를 그대로 지속하려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특성은 반드시 물리적 대상이나 생명 존재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 즉 인간이 행복이라는 것을 좇는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행복은 불행에 저항하여 안정, 평온, 기쁨, 웃음 등의 긍정적 감정과 상황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욕구임에 틀림이 없다. 행복의 관성은 불행의 관성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문제는 행복의 관성법칙은 지나친 행복 추구라는 관성에 과속도를 더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불행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삶에서 그 저항력이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서양 근대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에 의하면, 행복과 불행은 애착을 갖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인간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사랑하고 집착할 때 불행해진다는 것이며, 반대로 영원하고 무한한 것을 추구할 때 강렬한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관능적 쾌락이나 재물을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적, 영적, 초월적 삶의 가치, 이상적 삶의 목표 등을 추구하는 것이 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관조적 삶의 철학은 함석헌에게서도 나타난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 없는 것이 씨알이다’, ‘욕심 없이 하늘의 참을 그대로 살려는 씨알이 되라’, ‘욕심이 없어야 본다’, ‘생각이 깊어야 한다’ 등은 모두 그의 행복철학과 관련된 말들이다. 그는 “탐심을 내지 않으니 어둠속에 금과 은의 기운이 드러난다”(不貪夜識金銀氣)는 옛말을 인용하면서 요행의 생각을 경계한다. 또한 자본주의를 흉내 내어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욕심도 비판한다. 행복에 대한 그의 단적인 생각은 행복이란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함석헌전집9, 씨알에게 한길사, 2009, 21-23쪽). 따라서 씨알의 근본 성격은 불욕심이다. 욕심을 채운 후 그 욕심으로 인해서 찾아오는 또 다른 근원적 불행과 행복하려는 욕심은 행복의 등속 운동을 방해한다. 욕심의 존재론적 화근은 자아의 인식론적 망각에서 비롯된다. 본래 그 자아 인식의 출발은 ‘나는 벌거벗은 씨알이다’는 데서 싹트게 되어 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제 ‘기본적인’ 의식주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을 위해 더욱더 마음 쓰는 것을 그쳤다는 의미다. 이렇듯 하늘의 참을 실현하려는 씨알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
 
욕심 버리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자 완성
 
이것은 스피노자와 맞닿아 있는 생각이다. 영원한 것, 영원한 정신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함석헌이 말한 “생각”이다. 생각을 깊게 해야 지금 내가 더 이상 하고자 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살필 수 있다. 생각을 깊게 해야 불행으로 가려는 관성 혹은 너무 행복에만 집착하려는 관성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유의 지향은 타자가 행복을 느끼도록 정당한 기회를 줄 수 있는 삶을 통한 ‘사회적 항상성’에 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타자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될 때 타자는 불행의 관성에서 벗어나서 나라는 외부적 환경의 힘에 의해서 행복의 관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함석헌은 욕심이 없어야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세계-내-존재는 의식주의 문제를 완전히 넘어설 수 없는 실존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의식주의 문제가 극복되거나 과잉 만족되면 그를 통해서 또 다른 욕망을 맘에 둘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행복 추구권은 반드시 보장되어야만 하지만, 그것이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으로 변하게 된다면 제어하기 어려운 사태에까지 이를 수가 있다. 사회가 고루 행복질 수 있는 가능성이 무너져서 쏠림 현상이 일어나, 이른바 사회적 항상성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가 욕심을 비우고 좀 더 초월적인 가치로 향할 수 있는 관성이 발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 전체에 행복이 사라지거나 치우치기보다는 재배치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스피노자나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내가 평소에 갖는 애착과 욕심을 없애는 데서 시작한다고 본다. 욕심이나 애착이 지나치면 중독이 된다. 분명한 것은 중독은 심리적 질환이지 행복의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개별적 존재의 애착이 사회적으로 파급되면 사회는 결국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요 완성이다’는 단순한 논리가 우리 삶에서 실현가능한 모토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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