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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최초로 법륜을 굴려 불교역사가 시작된 사르나트

이치란 | 기사입력 2015/03/02 [04:44]
불교성지를 가다(인도)②

부처가 최초로 법륜을 굴려 불교역사가 시작된 사르나트

불교성지를 가다(인도)②

이치란 | 입력 : 2015/03/02 [04:44]

▲ 다메크 스투파(Dhamek Stupa)는 아소카 대왕이 기원 전 249년에 붓다의 사리를 봉안했던 탑으로 기원 후 500년경, 다시 건축된 탑으로 붓다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서 보수하여 복원했다(필자 촬영 2013년).     © 매일종교신문
▲ 붓다가 5비구를 만나 최초로 설법을 한 곳에 20세기 초에 세워진 녹야원 경내에 있는 스리랑카 대각회 사원(필자촬영 2013년).     © 매일종교신문

사르나트(Sarnath)는 녹야원(鹿野園사슴공원)이란 의미이다. 녹야원은 불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와 상징성을 갖는 불교성지다. 불교역사가 여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는 보드 가야의 보리수 아래인 금강보좌(金剛寶座)에서 무상대도(無上大道)인 정각을 이루었지만, 고타마 붓다는 21일정도의 기간 동안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자신의 깨달음을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남에게도 베풀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 때문이었다. 깨달음에 대한 점검과 동시에 이런 깨달음의 사회화에 대한 망설임 속에 있을 때, 하늘(梵天)에서 권청(勸請)의 향연 소리에 고타마 붓다는 전법륜(轉法輪)을 결심한다. 법륜(法輪)을 굴린다는 뜻이다.
 
불교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만족했다면 정각을 이룬 부처는 있을 수 있지만, 불교역사는 존재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점에서 불교는 깨달음을 사회화 하는 종교가 되는 이유근거가 된다. 이 문제는 불교 2천6백년사에서 부단하게 제기되는 화두(話頭)가 된다. 깨달음지상주의는 당위적인 과제이면서 동시에 경계해야할 궁극적 목적이다. 깨달음의 사회화가 요청되는 불교란 종교의 성격이 여기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적어도 일정기간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의 훈련이 있었다면 반드시 사회(중생)에 회향하는 전법포교의 보살행이 실천되어야 한다.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한국불교는 이런 사명에 더 투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타마 붓다는 법륜을 굴린다고 결심하자, 마음이 홀가분해 졌지만, 동시에 45년간의 또 다른 고행이 그 앞에 놓이게 되었다. 고타마 붓다는 법륜을 굴린 이 순간부터 열반(입적)에 들 때까지의 45년간을 중생들에게 그가 깨달은 법륜을 굴리면서 지혜광명을 주신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보드 가야에서는 법륜을 굴리지 않고, 사르나트까지 오게 된 것은 그의 최초 고행시절 도반이었던 5비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고타마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다음, 사문의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 자신에게 명상을 지도한 두 스승을 관(觀)해 보았는데 이 분들은 이미 열반에 들고 이 세상에 없었다. 다음은 5비구가 보드 가야에서 작별할 때 녹야원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성도 후, 5주 만에 길을 나섰다.
 
그들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변 모래사장에 있을 것으로 영감이 스쳤다. 고타마 붓다 시대에는 많은 무소유(無所有)의 사문들이 히말라야 기슭이나 갠지스 강변 또는 숲속에서 도를 닦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들 사문들은 주로 큰 도시에서 멀지 않는 이런 곳에서 수행을 했는데, 그것은 탁발하여 음식을 걸식해서 연명해야했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는 보드 가야를 출발해서 도보로 직선거리 2백km 가 넘는 길을 혼자서 가기 시작했다. 갠지스 강변 모래사장에는 많은 고행자들이 모여 있었다. 고타마 붓다가 나타나자 고행자들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覺者)가 된 것을 알 수 있었다고 경전에서는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논전(論戰)을 걸어온 자가 있었지만, 고타마 붓다는 가볍게 논박(論駁)해서 말문을 막아 버리고는 5비구의 행방을 물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이곳을 떠나 지금은 사르나트(사슴공원)에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갠지스 강변에서 13km 정도 동북쪽의 거리에 위치한 숲 속이었다. 고타마 붓다는 묵묵히 이들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역(漢譯) 대승 권에는 교진여라고 알려진 콘단나(Kondanna) 등을 만나서 최초의 설법을 하고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불교 공동체인 승가(僧伽 Sangha)가 결성되면서, 법륜(法輪=佛法)을 굴려서 불교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런 역사적 대(大) 사건이 일어난 이 장소가 바로 사르나트(녹야원)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가 최초의 설법한 진리를 전법륜경(轉法輪經Dhammacakkappavattana Sutta 담마차까빠와따나)이라고 경전결집(經典結集)을 했다. 고타마 붓다는 최초의 설법에서 고집멸도(苦集滅道)인 사성제(四聖諦), 중도(中道), 삼법인(三法印)과 연기법(緣起法)을 설한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사르나트는 미가다야(Migadāya)라고 해서 사슴공원의 뜻이 있고, 빨리어 경전에서는 이시빠따나(Isipatana)란 뜻으로 성인(聖人)이 발을 디딘 장소란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최초 5비구가 법륜(진리의 상징)에 존경을 표하는 모습. 법륜(法輪) 즉 부처님의 말씀이란 상징성을 갖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고타마 붓다는 5비구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여 승가 공동체를 형성하고, 최초로 안거(安居)인 우기(雨期)를 여기서 보내게 되고, 이후 이 지방 유력한 자의 아들인 야사(Yasa)와 그의 친구들이 비구가 됨으로 인하여 약 60명의 비구로 불어난 승가로 성장했다. 60명의 승가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공동체의 규범이 되는 계율(戒律)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탈리폿야자 잎으로 만든 신발을 금지하고 특정한 육식(肉食)을 먹지 않도록 했다. 이후 227개의 계율이 제정되었다. 고타마 붓다는 이 최초의 안거기간에《전법륜경》을 비롯해서 10개의 경을 설했다고 전해지며, 안거가 끝나자 고타마는 영취산이 있는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왕사성)로 향했다.
 
그 후 사르나트에는 승원(僧院)이 더욱 커져서 많은 수의 비구들이 수행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사서《마하왕서 Mahavamsa》는 기록하고 있는데, 기원전 2세기 경, 실론의 아누라다뿌라의 대탑(大塔) 기공식에 이시빠따나(사르나트)에서 1만 2천명의 비구들이 담마세나 대장로의 인솔아래 참석했다고 한다. 7세기 당나라 인도 구법승 현장이 이곳 사르나트의 성지를 찾았을 때, 1천 5백 명의 소승(테라와다 상좌부) 비구들이 수행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승원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지붕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법당 중앙에는 고타마 붓다가 법륜을 굴리는 소상이 있었다고 그의《대당서역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현장법사는 또 인도 최초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의 아소카(Ashoka Maurya अशोक मौर्य 304–232BCE))대왕은 고타마 붓다가 열반한지 약 2백년 후, 탄생지 룸비니, 성도지 보드 가야, 열반지 쿠시나가라와 설법지인 이곳 이시빠따나인 미가다야(사슴공원)를 방문하고 석주와 바위에 고타마 붓다의 성도와 활동을 찬탄하는 비문을 새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라나트의 인근에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바라나시라고 하는 고대시대부터의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사르나트와 바라나시는 불교가 흥성했으며 불교예술의 센터 역할을 했고, 이것은 굽타시기인 4세기에서 6세기경까지 이어졌는데, 이 도시에는 왕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고 불교를 적극 후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라나시 주위를 둘러 본 현장은 이 지역에는 모두 30여개의 승원과 3천명의 비구들이 수행하고 있었다고 기록을 남겼다. 초기 18부파 가운데 독자부에서 분파한 정량부(正量部 Sammatiya)의 본산(本山)이 사르나트에서 교세가 강했으며, 나중에는 금강승(밀교) 수행이 퍼지기도 했다. 이렇게 불교가 흥성했던 곳이 12세기 말 경, 터키의 무슬림에 의해서 파괴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이후 사르나트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다가 19세기 영국의 군인.고고학자인 알렉산더 커닝엄(Sir Alexander Cunningham,1814-1893)경이 1871년 고고 조사국 장관이 되어 인도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할 때 발견되었고, 실론 출신 인도불교성지 복원 운동을 펼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 의해서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바라나시는 기원 전 1200년경부터 형성된 도시이다. 바라나시의 이름은 강의 이름에서 유래하는데, 3천여 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여러 개의 이름을 갖게 된 이 도시는 고타마 붓다 시대에는 카시(Kāśī)라고 했다.《리그베다》에서도 카시라고 했는데, ‘빛나는 도시’란 뜻을 갖고 있다. 베다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가 바라나시이다. 불교경전인《자타카(본생담)》에도 바라나시가 자주 등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바라나시는 힌두의 시바신이 세웠다고 하며, 힌두 서사시《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영웅인 판다바들이 방문했으며, 힌두교의 7대 성지가운데 한곳이다.
 
▲ 한 요기가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 백사장에서 요가를 하고 있다(필자촬영 2013년).     ©매일종교신문
▲ 바라나시 갠지스 강 축제에 참가하고서 영감을 얻어 시크교를 창시한 그루 아낙(Guru Nanak 1469–1539).     ©매일종교신문

기원 전 마우리아 왕조시대에는 지금의 파키스탄인 탁실라에서 마우리아 왕조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현 파트나)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바라나시는 이 간선도로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연유로 12세기 말 경, 터키 무슬림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게 되기도 했다. 터키 무슬림 통치자는 1천개의 불교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도록 했고, 3세기동안 암흑기를 거쳐서 아프칸의 점령 이후인 13세기부터 다시 사원들이 복원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이 힌두사원이었다. 하지만 14세기 말경에 이르면 힌두 사원은 또 파괴당한다. 무슬림 지배하에 있었지만, 바라나시는 중세시대 지식인과 철학자들의 활동무대였다. 박티(Bhakti헌신)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이곳 바라나시에서 출생했다. 1389년에 탄생한 성자 시인 카비르(Kabir 1440–1518))는 박티 운동가였으며, 15세기 인도의 신비주의자이자 사회종교 개혁가인 그루 라비다스(Ravidas 1450–1520)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인도전역에서 많은 학자 설교자들이 바라나시를 찾았고, 힌두교와 이슬람의 융합 종교인 시크교의 창교(創敎)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도 바라나시다. 그루 나낙(Nanak 1469–1539)은 1507년 바라나시의 마하 쉬바라트리(Maha Shivaratri)축제에 참가했다가 영감을 얻어서 펀자브에서 시크교를 창종(創宗)했다.
 
16세기 무슬림 무갈 왕조의 황제 악바르(Akbar1542–1605)가 바라나시를 방문하고 시바와 비슈누 힌두 사원을 건립하도록 했다. 바라나시는 고대시대부터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성지로 유명하다. 16세기 북인도에 수리 왕조를 세운 술탄 세르 샤 황제는 콜카타에서 페샤와르까지 바라나시를 경유하는 간선도로를 건설, 통치의 효율화를 이룩하기도 했다. 나중에 브리티시 통치 때는 이 도로는 중요한 기간도로로 활용되었다. 타지마할을 세운 샤 자한의 아들로 52년간 제6대 무갈 황제였던 술탄 아우랑제브(1618-1707)는 1656년 힌두사원과 모스크를 파괴하도록 명령하는 등, 바라나시는 홍역을 치루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역경 속에서도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영성(靈性)의 도시로서의 명성을 유지한 것은 바라나시가 3천 년 간 인도의 성시(聖市)이며 종교도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힌두 자이나 불교의 성지였기 때문이다. 자이나교의 사원도 바라나시에 소재하고 있고,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空衣派) 소속의 나신(裸身) 승려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아소카 대왕의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Chandragupta Maurya 340 BC–298 BC)는 자이나 교도였다.

▲ 바라나시의 디감베르 자이나교 사원.     © 매일종교신문
 
아우랑제브가 죽고 나자, 인도의 대부분 지역은 힌두 왕들의 동맹이 되었고, 지금의 바라나시의 모습은 이 기간에 지어진 건축물들이다. 18세기 특히 동부 인도의 힌두 왕 부미하르와 서인도의 마라타 황제에 의해서였다. 본격적인 브리티시 통치는 1775년부터 1947년까지였지만, 브리티시 인디아 정부는 허수아비이지만 형식상의 힌두 왕과 무갈 왕을 인정해 줬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에는 많은 계단과 건물들이 지어졌는데, 이것은 갠지스 강에서 힌두 신에게 침례(浸禮)의 정화의식(淨化儀式)을 거행하기 위한 가트(Ghat)라는 계단이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아침 일찍 인도의 전역에서 몰려 온 힌두교도들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려고 이곳을 찾는다. 한편에서는 아직도 숨이 붙어있지만, 오직 내생에는 좋은 지위로 태어난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체념한 시신이 있다. 그나마 가난하기 때문에 좋은 장작이 아닌 보통의 나무 장작더미 위에 누워서, 부자의 시신이 오기 전 막간을 이용하여 화장을 기다리는 인간의 마지막 숨결을 보면, 누구나가 ‘인생의 허무함’속에 생과 사를 생각하면서 선(善)하게 살아야지를 다짐하게 되는 순간을 맛보게 된다. 3천년의 시공(時空)이 혼재(混在)하는 영감(靈感)의 거리에서는 누구나 성자가 된다.
 
바라나시는 이런 종교적인 도시이면서 교육도시이기도하다. 바라나시 힌두대학은 힌두철학과 문학연구로 유명하며 산스크리트대학 등이 있고, 티베트 중앙종합대학도 사르나트에 있어서 학구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인도를 찾는 방문객들은 바라나시의 갠지스강변을 보고서야 비로소 인도를 봤노라고 말하게 된다.  
▲ 바라나시의 왕궁 람나가르 성, 갠지스 강변에 있다.     © 매일종교신문
 
인도마니아로 유명했던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베나레스는 역사보다도 더 오래되고, 전통보다 더 오래되었고, 전설보다 더 오래된 그리고 이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두 배나 더 오래된 도시다.”라고 찬탄했다. 브리티시 인디아는 1910년 바라나시(영국인들은 베나레스로 부름)를 인도의 하나의 주로 만들었다. 사법권은 없었지만, 바라나시 주의 본부를 람나가르성(城)에 두고 카시 나레쉬 왕이 살도록 했다. 나레쉬 왕은 시바신의 화신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다. 바라나시는 1948년 인도연방으로 인정되었고, 비부티 나라얀 싱 왕이 죽고 2000년 그의 아들 아난트 나라얀 싱은 명목상이나마 왕으로 등극해서 바라나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축제 등의 의무를 이어가고 있다.

▲ 강가에는 100여개의 가트(계단Ghats)들이 건물과 함께 있다. 죽은 자는 이곳에서 화장하여 한줌의 재로 갠지스 강에 뿌려지는 것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는 생과 사가 공존하는 삶의 현장이다. 필자(이치란 박사)2013년 1월.     © 매일종교신문

사르나트에는 보드 가야와 마찬가지로 인도와 해외에서 세계의 많은 불교도들과 일반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고타마 붓다의 활동과 최초의 설법에 귀 기울인다. 주변에는 스리랑카 태국 일본 티베트 미얀마 부탄 한국에서 세운 사원들이 자기 나라의 전통과 문화라는 건축의 옷을 입고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관람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녹야원의 숲에는 사슴까지 기르고 있는데, 옛 역사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눈요기가 충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타마 붓다의 최초 설법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여주는 사라나트 박물관이 바로 녹야원 앞에 있어서 모든 것을 유물로서 말해준다.
 
다음은 고타마 붓다가 최초의 설법과 첫 안거를 마치고 마가다의 수도였던 라자가하(왕사성)로 갔던 길을 찾아가 보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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