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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리더십과 세종대왕

김재홍 | 기사입력 2015/03/02 [12:13]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

한국적 리더십과 세종대왕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

김재홍 | 입력 : 2015/03/02 [12:13]
우리는 오래전부터 리더십의 부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특정인들을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회가 어려울수록 이 난국을 해쳐나갈 진정한 리더십의 출현에 갈구하며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사극史劇 드라마가 인기가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어려운 난국에 처해있을 때 등장했던 역사속의 리더십을 통해서 대리 만족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나 사회정의 실현과 나라를 발전시켜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여망이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역사상 리더십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대표적인 인물로 세종대왕을 지목한다.
 
필자는 조선실록과 역사적인 기록 등에서 나타난 세종의 리더십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잠시 위안과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과연 세종대왕은 어떤 식견識見을 가지고, 어떻게 나라와 모든 백성들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었으며, 무슨 고민을 하였고,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이를 통해서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을 가장 잘 경영했던 인물’에 대한 모범적 모형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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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시대의 대변혁을 꾀한 리더였다
 
세종世宗의 인간적 특징은 수기지학修己之學을 통해 자기절제와 인내가 몸에 밴 사람으로 자신을 다스림에 뛰어났으며, 평생토록 단 한순간도 게으름을 보인 적이 없는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역사는 적고 있다. 특히 그는 시대時代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하고, 그 주어진 사명使命을 명확히 인식했던 사람이었다. 세종은 조선朝鮮이 건국된 지 겨우 18년이 됐을 때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새 왕조가 들어선 뒤 인재 부족 해결하기 위한 인재수급을 위한 체제를 갖추고 인재를 등용하고자 노력하였고, 새 왕조에 대한 백성의 기대에 부응한 민생고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우렸다. 그 결과 조선건국 초기 피바람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상황을 딛고 넘어서서 조선사회를 굳건한 토대위에 올려놓았다. 세종은 시대적인 요구사항을 인식하는 혜안(慧眼)과 대의(大義)로써 변혁에 성공한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고자 노력하였다 

세종은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要諦는 먼저, 마음을 닦는 것으로 보았다. 백성과 신하를 다스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었다. 즉 자신에 엄격하여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교화해 나가고자 하였다. 세종은 신하들과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경우 스스로가 누리는 왕위王位도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국가의 존속과 안정을 위해 첫째, 충분한 군사력(족병足兵), 둘째, 충분한 먹을거리(족식足食), 셋째, 백성의 신임과 민심을 얻어야 한다고 보있다. 그러나 만약 부득이 하게 이들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군사를 버려야 하고, 다음은 먹는 것을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백성의 신임과 마음임을 강조한다. 세종世宗은 백성들과의 마음의 화합이 더 본질적이요 더 우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세종世宗은 백성들이 자기 곁으로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그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임금이었다. 고려 왕조가 망한 원인에 대해 세종世宗은 태조太祖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왕조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 보았다. 
 
세종은 인재 발굴과 활용의 극대화를 통한 개혁의 리더였다 

세종이 인재人才를 선출하고 키우는 과정에는 유난히 배울 점이 많은 리더였다고 한다. 첫째,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세워도 재능 있는 부하에게 관대하였다.
 
둘째, 세종은 국왕의 권위가 아닌 토론을 통해 결정을 내렸다.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 장 영실의 등용 과정에서 고리타분한 양천이원론良賤二元論의 신분제에 대한 신하들의 반박과 설득,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반대 상소上疏의 논박과 설득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세종世宗의 학식이다. 그는 풍부한 독서량을 자랑했다. 왕의 신분에서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기에 당시 세종世宗의 학식學識을 따를만한 신하臣下가 없었던 것이다.
 
셋째, 사람에 대해 편견偏見을 갖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세자에서 폐위廢位하고 충령대군인 세종을 세자위에 세우는 일에 반대하였고, 세종에게 늘 비판적이었던 황희黃喜를 영의정에 임명하고, 그를 예禮로써 예우하며, 황희黃喜의 거침없는 비판 속에 자신의 초심初心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리더였다.
 
넷째, 작은 재능이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등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여 포용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혹독하게 신하를 훈련시킨 강유剛柔를 겸비한 임금이었다.
 
다섯째, 세종은 자신의 말과 의견을 내세우기 이전에, 남의 얘기를 먼저 들을 줄 아는 지도자 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먼저 잘 들어주기 위해서는 수기修己로 통한 심성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반대 의견에도 분노하지 않는 끈기가 있어야 하고, 다양한 지식과 지혜의 우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세종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효율적으로 경영한 리더였다 

많은 사람들은 세종의 인재관리법은 한국인의 특색에 적합한 방식이라 평가한다. 그 이유는 첫째, 그는 인재들 간에 선의善意의 경쟁을 통한 긴장감을 유발시켰다. 이것은 신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자발적인 열의를 이끌어내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둘째, 노·장·청老·長·靑의 조화를 잘 이끌어내었다. 노신老臣들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 장단기적인 목표를 세워 두고 조화로운 인사를 단행했다.
 
셋째, 끊임없는 독려와 사후점검으로 목표달성을 추구했다. 세종世宗은 일회적인 목표 제시로 끝내지 않고, 끊임없는 사후점검을 통해 아랫사람들을 독려하였다. 그는 상급 관청과 하급 관청에서 점검과 잔소리에 지쳐서라도 일을 이행하게 만드는 임금이었으며, 부하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부 보고자들의 은밀한 비공식 보고에도 귀를 기울였다.
넷째, 인재人才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체하고 공정한 인사관리를 했다. 세종世宗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 적재적소에 인재를 투입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고양시키기 위해 늘 고민했다. 또한 왕실王室의 종친宗親이라도 사사로이 특혜를 주는 경우가 없이 늘 공평하게 인재人才를 관리하였다.
 
세종은 시대와 역사의 요구에 노력하는 진정한 리더였다
 
세종世宗은 천명天命에 눈뜬 임금이었다. 세종世宗은 백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모든 문제를 먼저 자각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서 파수꾼처럼 늘 깨어있는 임금이었다. 또한 논쟁에 있어서도 모르는 것이 없어야 했고,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임금의 24시는 아파서도 안 되었다. 세종은 지칠 줄 모르는 독서와 늦은 밤 호흡을 가다듬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정신수양을 통해서 임금의 사명을 다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와 힘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일생을 백성을 위해 기꺼이 헌신했던 훌륭한 임금이었다.
 
또한 국방에 임해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는 사령관이자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엄격한 지위관이 었다. 신하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열정과 깊은 겸손의 덕으로 한없는 본보기가 된 국가의 최고 경영자였다. 무엇보다 세종世宗은 시대정신을 읽을 줄 아는 임금이었다.
 
육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세종世宗의 리더십은 21세기의 대한민국과 국민들이 갈구하고 원하는 바람직한 리더십의 모형이 아닌가 한다.(철학박사 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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