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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25안거를 보낸 슈라바스티,《금강경》의 무대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3/31 [17:05]
불교성지를 가다(인도)⑥

부처가 25안거를 보낸 슈라바스티,《금강경》의 무대

불교성지를 가다(인도)⑥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3/31 [17:05]
▲ 사위성 기원정사에 있었던 부처의 토굴 물라간다쿠티(Mulagandhakuti)유적.     © 매일종교신문

사위성(舍衛城)은 고타마 붓다가 25안거(安居)를 보낸 곳이고, 가장 많은 경전을 설한 곳이기도 하다. 사위성은 한역(漢譯) 이름이고 산스크리트어로는 슈라와스티(Śrāvastī), 빨리어로는 사왓띠(Sāvatthī)라고 한다. 불교용어는 산스크리트어와 빨리어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대개 상좌부(上座部)인 테라와다(Theravāda) 삼장(Pāli Canon:Tipiṭaka경률론)은 경전어(經典語)가 빨리어(Pāḷi)이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인 사르바스티와다(Sarvāstivāda)는 산스크리트(Sanskrit)어이다. 빨리어는 인도유럽어계의 중부인도 아리안 언어로 프라크리트어(Prakrit:중부인도 諸語)가운데 하나이다. 부처가 실제 사용한 언어가 어떤 프라크리트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빨리어에 가까운 말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부처의 가르침이 빨리어로 결집(結集)되었기 때문에, 부처의 사용언어로 보는 것이다. 빨리어는 문자가 없었던 구어(口語)였는데, 실론에서 제4차 경전결집 때(기원전 1세기), 싱할라어(실론)문자로 표기(表記)되고 번역되어 삼장(三藏 Tipiṭaka)이 성립됐다. 산스크리트어는 1차로 힌두교의 예배언어이지만, 동시에 힌두교 불교와 자이나교의 철학(종교)언어이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문화계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였다. 고대인도 아리안어의 표준 통용어였다. 상좌부에서 분파했던 설일체유부의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결집(기원후 2세기)되었고, 이후 대승경전은 불교혼성산스크리트어(Buddhist Hybrid Sanskrit)로 결집했는데, 대표적인 경이《프라즈나파라미타(Prajñāpāramitā)》이다. 한역으로《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이다. 원래 이름은《바즈라체티카 프라즈나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인데, 한역은《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이다. 줄여서 《금강경》 또는 《금강반야경》이라고도 부른다. 사실성(史實性)을 떠나서, 대승 권에서는 《금강경》은 대승불교철학의 핵심인 공사상이 깊이 있게 다루어진 대승불교의 대표경전인데, 고타마 붓다에 의해서 이곳 사위성에서 설해졌다고 믿는다. 402년 중국의 쿠마라지바(鳩摩羅什)에 의해 한역되었고, 조계종 등 선종 계통의 종단은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다.
 
이곳을 상좌부에서는 사왓띠라고 부르며, 인도나 중국 티베트 권에서는 슈라와스티라고 부르는데, 이처럼 인도의 불교관련 지명이나 인명 등, 모든 불교용어는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혼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불교에 문외한인 분들에게는 다소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뜻은 같다. 바이샬리(바이살리)도 빨리어로는 베살리라고 한다. 고타마 붓다 당시에도 슈라와스티와 사왓띠가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슈라와스티는 고타마 붓다와는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슈라와스티는 고타마 붓다 시대, 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라로서 마가다와 함께 쌍벽을 이룬 코살라 국의 수도였다. 당시 왕은 파세나디(Pasenadi)로서 고타마 붓다를 적극 후원한 재가제자였다. 5세기 상좌부 대주석가요 학승으로《위숫디마가Visuddhimagga 淸淨道論》의 저자인 붓다고사(Bhadantācariya Buddhaghoṣa 覺音)는 말하길, 슈라바스티는 5만 7천 세대가 사는 이름다운 도시였다고 묘사했고, 대승반야 중관사상의 대가인 나가르주나는, 슈라바스티는 90만이 사는 당대 6대 도시가운데 하나였고, 코살라 국은 8만4천개의 마을에 총 2백 만 명의 나라로서 마가다의 라자그리하나 밧지 족과 리차비 족의 연맹국인 바이살리 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고 하며, 고타마 붓다는 이곳 슈라바스티에서 25안거를 보냈는데, 젯따와나(Jetavana 기원정사)의 물라간다쿠티에서 19안거를 보냈고, 슈라바스티 근교 푸바라마(Pubbarama)의 미가라마투파사다(Migāramātupāsāda)에서 6안거를 보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고타마 붓다가 슈라바스티에 처음 오게 된 것은 왕사성에서 슈라바스티에서 온 부상(富商)인 아나타핀다카(Anathapindika 給孤獨)의 초청에 의해서다. 고독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분이란 의미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수닷따Sudatta須達多)長子라고도 한다. 수닷따 장자는 젯따(Jeta) 왕자의 공원을 거금을 주고 매입하여 고타마 붓다께 젯따와나(기원정사)를 건립하여 헌증한 사원이다. 서구의 한 불교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네 니까야(Nikayas 漢譯 四阿含)의 경장(經藏) 871경 가운데, 기원정사에서 844경을 설하였고, 푸바라마에서 23경을 그리고 슈라바스티 교외에서 4경을 설했다고 한다.《디가 니까야(長部 Digha Nikaya, 漢譯 長阿含經》에 6경,《마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 Nikaya,中阿含經)》에 75경,《상윳다 니까야(相應部 Samyutta Nikaya,잡아함경(雜阿含經)》에 736경,《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Anguttara Nikaya.增一阿含经》에 54경을 설했다고 구체적인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슈라바스티는 남.북방을 가리지 않고 많은 불자들이 찾는 불교 8대 성지가운데 매우 인기 있는 불적지다. 남방불교도들에게는 고타마 붓다가 25안거를 이곳에서 보냈고, 877경을 설했기 때문에 부처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어서다. 북방 불교도들에게는《금강경》의 무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4세기 동진의 인도구법승 법현법사와 7세기 당 현장법사도 이곳 사위성을 순례하고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슈라바스티는 고타마 붓다가 살인마 앙굴리말라(Daku Angulimala)를 교화시켜 승가에 귀의하게 하여 아라한과를 얻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테라가타 Theragāthā 長老偈経》와 《마지마 니까야》의《앙굴리말라경》의 내용을 보면, 앙굴리말라는 살인마로서 자기가 죽인자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할 정도로 잔인한 자였고, 고타마 붓다까지도 해치려고 했지만, 고타마 붓다의 법력에 감화되어 참회하고 승가에 들어와서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고타마 붓다 당시에 이곳에는 세 개의 승원이 있었는데, 고타마 붓다는 오전과 오후 두 곳의 승원을 번갈아 가면서 다니셨고, 또 한곳은 비구니 승원이었다고 하며, 고타마 싯다르타의 부인이었던 야소다라가 이곳을 찾아왔다는 정도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 고타마 붓다가 19안거를 보낸 기원정사 경내모습.     © 매일종교신문
 
슈라바스티는 8대 성지로서 세계의 많은 불자들이 순례하는 곳이다. 고타마 붓다는 이곳 슈라바스티에서 25안거를 보냈기 때문에 붓다의 체취가 남아있다는 믿음으로 여러 나라의 사원들이 건립되어 있다. 특히 티베트 중국 한국 베트남 대만의 불자들은《금강경》의 무대가 슈라바스티이기 때문에 이곳을 특히 좋아하는 것 같다. 고타마 붓다의 전생이야기를 모아 놓은《자타카(본생담)》내용에도 젯따와나(기원정사)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고타마 붓다가 성도(成道) 후, 45년간의 생애에서 25안거를 이곳 슈라바스티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만큼 붓다와의 관련된 스토리가 많은 것이다. 또한 슈라바스티는 고타마 붓다의 고향인 카필라와스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금은 네팔 령이지만, 룸비니나 카필라와스투는 항상 인도권내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팔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다음에 룸비니와 카필라와스투를 묶어서 소개하겠다.
▲ 아난다 존자가 주로 머물렀던 보리수로 기원정사 경내에 있다.     © 매일종교신문
▲ 고타마 붓다의 대 후원자였던 아나타핀다카의 스투파.     © 매일종교신문

불교 8대 성지에 포함되는 산카사(Sankassa)는 인도 고대시대, 특히 고타마 붓다가 생존했던 시대에는 큰 타운은 아니었지만, 고타마 붓다가 열반에 든 후, 아소카 대왕에 의해서 발전된 도시였다고 한다. 지금은 조그마한 타운이지만, 이곳에는 산카사 스투파(塔)와 아소카 석주가 있는데, 산카사 스투파는 고타마 붓다가 3개월간 도리천(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서 설법하여 아라한이 되게 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이런 전설이 있었기에 아소카 대왕도 이곳을 순례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 타운을 발전시키고 이곳에 석주를 세웠다. 그리고 승원을 건립해서 많은 비구들이 이곳에서 수행하도록 했는데, 지금은 고타마 붓다의 석가 족으로 알려진 후예들이 주로 이 지역에 집단으로 살고 있음도 특이한 일이다.
 
▲ 산카사에 보존된 아소카 석주의 코끼리 주두.     © 매일종교신문

특히 이곳의 아소카 석주의 주두(柱頭)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사자주두 대신 코끼리 주두를 세웠는데,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순례 객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산카사는 오랫동안 파묻혀 있다가 1842년 영국의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험(Alexander Cunningham)이 발견했고, 한참 후에 실론출신의 인도성지복원 운동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가 이곳을 방문한 후에, 1957년 실론 출신의 판디타 마다바윗타 위제소마라는 비구가 와서 천일기도를 봉행하고, 불교학교(Wijesoma Widyalaya)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산카사가 불교도들에게 어필되는 것은 고타마 붓다가 도리천(忉利天 Trāyastriṃśa)에서 마야부인인 어머니에게 아비담마(論藏 Abhidhamma Pitaka)를 설하고 지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비담마란 불교경전인 삼장가운데 불교철학 심리학 분야를 다룬 이론을 총 집약해 놓은 경전인데, 남방 상좌부 전통에서는《법집론 法集論 Dhammasaṅgaṇi》《분별론 分別論Vibhaṅga》《계론界論Dhātukathā》《인시설론人施設論Puggalapannatti》《논사論事Kathāvatthu》《쌍론雙論Yamaka》《발취론 發趣論:Paṭṭhāna》등 이른바 아비담마 7서(書)라고 해서 상좌부 비구들에게는 필독서이다.
 
북방으로 전해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논장論藏은《품류론品類論Prakaraṇa-pāda-śāstra》《법온法蘊Dharmaskandha-pāda-śāstra》《시설론施設論Prajñapti-śāstra》《집이문론集異門論Saṅgītī-paryāya-pāda-śāstra》《계신론界身論Dhātukāya-pāda-śāstra》《장신론識身論Vijñānakāya-pāda-śāstra,》《발지론發智論Iñānaprasthāna-śāstra》《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Mahāvibhāṣā Śāstra》등이다.   
 
이런 고차원의 불교철학 심리학을 하늘세계인 도리천이란 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 설했다고 하는 불가사의한 기적적인 내용에 관심이 큰 것이다. 사실성(史實性) 여부를 떠나서, 이 내용은 불교의 우주론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매우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불교의 우주론에 의하면, 도리천은 6욕천(六欲天) 가운데 두 번째 하늘(天)로, 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미산 정상에는 동서남북 4방에 천인(天人)들이 사는 각각 8개씩의 천성(天城)이 있고, 중앙에는 제석천(帝釋天 Indra, 인드라)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어 33천이라고 한다. 도리천에 사는 천인들의 수명은 1,000세이고, 도리천의 하루가 인간세상의 100년이라고 한다.
 
남방불교의 전설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죽은 뒤, 다시 태어난 곳이 바로 도리천이다. 고타마 붓다는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 우기(雨期)에 도리천으로 올라가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석 달 동안 설법하였고 또한 이 기간 동안 잠시 지상에 내려와서는 10대 제자 중, 지혜 제일인 사리불에게 그 설법의 요약 을 설법했다고 하며, 이처럼 우기의 석 달이 지난 후, 고타마 붓다는 산카사(Sankassa)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는 전설 같은 내용이다.
 
▲ 도리천(忉利天)에서 아비달마를 설하고 있는 고타마 붓다.     ©매일종교신문
▲ 불교의 우주론을 설명하는 그림.     © 매일종교신문

이야기가 조금 무겁게 소개되었는데, 불교란 종교가 출발할 때부터 교주인 고타마 붓다는 인간심리와 철학적인 고차원적인 형이상학을 담론 형식으로 설파했기 때문이다. 고타마 붓다 이전에 이미 인도는 다양한 사상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을 62견(見)이라고 했는데, 군소 이론가들이 일종의 수행단체인 제각기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이런 군소 철학가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자연적인 조건인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진 기슭이고 갠지스 평원이 풍요를 주는 이상향이었다. 세속적 부귀보다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어떤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세계에 몰입하여 전지(全知)의 지혜를 얻는 것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 수행자들이 무소유의 삶의 방식을 택해서 살아가기가 좋은 지역이었다. 주위에는 16대국의 큰 도시들이 있어서 탁발을 하기가 용이했고, 숲과 강을 갖춘 자연공원이 있어서 이들에게는 너무나 적합한 수행공간이었다. 또한 당대 군왕들은 이런 고행수도자들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지혜를 갖춘 스승을 왕사로 삼아서 정신적 의지자로 삼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재벌급인 거부 장자들도 이름난 철학가들인 이런 스승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타마 붓다가 대도(大道)를 이루고 당대 그 나름대로 이름 있는 철학가들과 쟁론(爭論)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고타마 붓다는 이들의 사견(邪見)을 격파하고 휘하로 받아들였다. 당대 고행수행자들은 서로를 보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정신적 경지의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었기에 결판은 쉽게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자이나교의 마하비라 같은 경우에는 고타마 붓다와 쌍벽을 이루는 지혜의 강자였는데, 자이나교는 이미 어느 정도 체제가 이미 잡혀 있는 수행단체였다. 마하비라는 자이나교의 중흥조(中興祖)였다.
 
고타마 붓다는 스스로 고타마 붓다 승가(수행공동체)를 창시했던 분이다. 인도 철학사상에서 힌두 주류는 브라만교인 힌두교를 정통(아스티카āstika)으로 불교와 자이나교를 비(非) 정통(나스티카 nāstika 異端)으로 정의하는데, 서양철학에서 정통(orthodox)과 이단(heterodox)을 구분했던 것과 같다. 힌두 정통 6파 철학이 아닌 자이나교는 불교와 함께 공존했던 비정통 인도철학 종교였다. 불교는 인도 밖으로 퍼져 나갔지만, 자이나교는 아직도 인도 안에서 생존하고 있는 종교로서 존재하고 있다. 힌두-자이나교-불교를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인도철학사상의 근저를 파악할 수 있으나, 이제 불교 철학이나 사상은 인도를 떠나고 그 유적만 남아있는 것이다. 불교사상이나 철학은 인도 밖으로 나갔지만, 그 토양과 유적은 인도에 남아있다. 그 유적이 불교성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불교성지를 순례하는 것은 어떤 정신적 영감을 얻으면서 불교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이다. 특히 교주인 고타마 붓다의 숨결이 스며있다고 사실적(史實的)으로 확인된 불적지(佛跡地)를 고타마 붓다와 직접 관련된 불교성지로 인증하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와 직접 관련된 중요한 곳을 4대 성지라고 하고 4곳의 부가성지를 포함하여 8대성지라고 하여 불교도들은 순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네팔에 소재하는 룸비니는 탄생 장소이고, 카필라와스투는 29세까지 성장한 고향이었다. 물론 이 두 곳도 고타마 싯다르타와 직접 관련된 곳으로서 의미 있는 성지이긴 하다. 보드 가야도 깨달음을 이룬 장소이고 쿠시나가르는 열반한 곳으로서 의미 부여가 되겠지만, 왕사성(라자가하)과 사위성(슈라바스티)은 고타마 붓다로서는 담론을 설파했던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운영되었던 곳이다.
 
슈라바스티는 고타마 붓다가 25안거를 보낼 만큼 오랫동안 머무르신 곳이기에 그리고 많은 경을 설했던 곳이기에 8대 성지의 하나이지만, 의미상으로는 매우 중요한 장소라고 하겠다. 더욱이 동아시아 불교권인 중국 일본 한국의 불교에서 비중 있게 생각하는《금강경》의 무대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더욱 가슴에 다가오는 불교성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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