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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중용, 양시양비(兩是兩非)의 논리가 그리워진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4/20 [08:56]
진영간 극단적 투사 정신에 길들여져 중도가 비난받는 사회

중도·중용, 양시양비(兩是兩非)의 논리가 그리워진다

진영간 극단적 투사 정신에 길들여져 중도가 비난받는 사회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4/20 [08:56]
종교와 역사 속의 중도

 
불교에서 극단을 떠나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행법을 중도라고 한다. 유(有)나 공(空)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또는 고락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을 중도라고 했다. 이를 실천하는 팔정도(八正道)는 공명한 길이다. 유아(有我)·무아(無我), 생명의 영속·단멸, 육체와 마음의 일체성 논란 등 다양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한 중도사상으로 극복하려 했다.
 
유교의 중용사상은 이해하긴 어려우나 ‘일상에 멀어져 도의 실현을 소홀히 하거나 일상을 포기하고 고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는 중도주의를 이르는 말임에 틀림없다. 원불교에서도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圓滿行)’을 주요 교리로 삼는데 원만행이 바로 중도이다. 즉 중도는 ‘정의롭게 하는 것, 또는 가장 타당한 방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선조 때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져 사사건건 다툼을 벌이자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李珥:1536∼1584)는 양시양비(兩是兩非)의 논리를 내세웠다. 양시양비를 적용, 비생산적 논쟁을 접고, 함께 막중한 국사와 민생문제에 중지를 모으자고 당부한 것이다. 공연히 사소한 일에 옳고 그름만 꼬치꼬치 따지다가, 정작 큰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역시 중도라 할 수 있다.
 
극단에 물들여져 중도가 비난받는 시대
 
중도·중용, 양시양비의 논리가 비난받는 시대이다. 이들 용어가 책임을 회피하고 눈치를 살피는 행위로 치부되고 있다. 모든 종교가 한결같이 하늘의 뜻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것인데 사소한 교리문제와 배타적 태도로 논쟁을 벌이고 급기야 종교가 가장 금기시하는 미움과 갈등, 다툼과 분쟁, 테러와 전쟁까지 일삼고 있다. 각 종교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세상에서 뜻을 이루기는커녕 세상의 걱정거리로 널려지게 된 것이다. 종교에서도 중도·중용, 양시양비의 논리가 사라지고 자기 진영의 논리만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의 그러한 모습이 우리 정치·사회에서도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불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정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무장됐다. 마치 자기 종파의 교리가 아니면 모두 이단이라고 치부하는 것과 닮았다. 중도·중용, 양시양비의 논리를 취하는 것에 회색분자라며 비난한다. 자기 편 논리가 객관, 상식적이며 유일한 정의라는 신념에 차 있다. 양시양비론, 중립적 사세는 비겁하며 사회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비판한다. 상대진영의 목소리에 귀를 닫을 뿐 아니라 중도, 중립에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일례로 어느 한편에 기울은 사람들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시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진보적 투사, ‘일베’와 같은 보수적 투사의 행동과 논리에 경도된다. 자식이 죽어가는 상황을 생중계로 지켜본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되 ‘스스로 슬픔을 승화시켜 군중심리와 선동에 휩쓸리지 말라’는 종교적 충고를 할라치면 비정한 사람이 된다.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괴담과 억지’라는 극단적 주장을 제기하는 자들은 부도덕, 비윤리, 파렴치, 몰상식의 표상이 되고 만다. 이에 맞서 집단적인 분노로서 격렬한 투사가 되지 않으면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개조·개혁은 이룰 수 없다는 확신에 차 있다. 그 반대 진영도 같은 신념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는 시각뿐만이 아니다. 시비판단의 소지가 있는 사사건건에서 모두 진영으로 나뉘어 그런 극단적 투사의 모습이 보여진다.
 
▲ 언론도 보·혁진영으로 나뉘어 자기 진영의 독자를 형성하고 타 진영의 논조에는 무작정 비난하는 극단적 풍토에 젖어들었다. 중도도 제3의 진영, 회색분자로 으로 비판받는다.     © 매일종교신문
 
진영 간 투사적 다툼-양시양비의 진영논리 밖에서 해법을 모색해야
 
중도정론지를 표방하고 나선 한 신문이 의욕적으로 독자권익위원회를 신설하고 회의를 가졌다. 이 신문은 대체적으로 비판할 것은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중도,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중도비판적 성향의 지면에 대해 ‘불편한 신문’ , ‘젊은 층에 소외된 신문’, ‘새로움 없다’, ‘독자들에게 와 닿지 않는다’, ‘물타기’라는 등 위원들의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어느 한편 진영의 극단주의적인 논조가 아니면 성에 차지 않게 길들여진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한 교수는 “중도라는 신문의 방향은 맞다. 그러나 이분화된 여론구도 속에서 중도의 길은 험난하다”고 했는데 극단주의 진영으로 갈리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하다. 언론도 보·혁진영으로 나뉘어 자기 진영의 독자를 형성하고 타 진영의 논조에는 무작정 비난하는 극단적 풍토에 젖어들었기 때문이다.
 
극단주의 양진영에서 중도자세를 취하고 양시양비의 논리를 편다면 양 진영에서 애매하고 모호하다는 비판과 배척을 받을 수 있다. 혹은 이러한 중도의 정도(正道)가 옳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또 다른 제3의 진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율곡의 말대로 ‘막중한 국사와 민생문제에 중지를 모으기’ 위해선 양시양비, 중도의 논리가 절실히 요구된다.
 
중도를 내세운 신문의 외부 칼럼의 내용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치·사회가 진영논리에 갇혀 있어 국민들 생각을 둘로 나눌 때 이 진영논리 밖에서 양시양비의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사회에 부여된 과제”라는 말이다. 둘다 옳고, 둘다 그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함께 공유한다면 극단주의, 배타주의에 치우쳐 미움과 갈등, 다툼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사회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공동선을 찾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극단주의, 배타주의에 휩싸여 테러와 전쟁까지 불사하는 종교사회도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본연의 종교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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