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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행복의 쾌감(大吉祥)을 상상하라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4/21 [09:29]
“신앙은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행위”

착한 행복의 쾌감(大吉祥)을 상상하라

“신앙은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행위”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4/21 [09:29]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인생을 산다. 학문은 행복을 만드는 도구이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성인들이 오셨고 거룩한 희생과 위대한 교훈을 남기셨다. 모두가 인간을 행복하게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영어 Happiness의 본뜻은 “행운”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영국 철학자이며 법학자 제레미 벤담이 1789년 저서에서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하면서 행복을 쾌락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번역하면서 ‘행(幸)과 복(福)’을 합성해 빚어진 말이다.
 
우리는 1886년 10월 4일자 한성주보(漢城週報)에 행복이란 낱말이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작가는 행복은 역사에 200년밖에 안된 발명품이다. 행복이 애초 인간의 본성과는 무관한 텅 빈 개념이라는 작가의 충격적 주장을 하기도 한다.
 
행복은 언어적인 개념을 넘어 한얼의 본성에서 느끼는 원초적 인생의 감성적 느낌이다.
옛 우리의 선조들의 행복은 함께 나누며 함께 베푸는 공생하는 서로의 상생의 두레정신이었다. 현대 사회가 물질만능의 이기적 삶이 팽배하고 집단적 이기심으로 가족 간에 사회 민족적 배타주의가 민족과 국가 분쟁을 넘어 세계의 전쟁까지 악의 축으로 극단적인 분쟁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의 원초적 신앙은 한얼이 주신 본성(本性)의 자리를 찾아 영구히 행복을 찾아 누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큰 덕으로 대길상(大吉祥)과 대광명(大光明)이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극치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헤르만 헤세는 행복의 예찬을 남겼다. ‘인생에서 주어진 의무는 아무도 없다네! 그저 행복이라는 한 가지 의무를 받고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라고 했다.
 
철학자 러셀은 말한다. ‘행복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치 중에서 가장 극적인 가치이다. 행복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이다.’ 그렇다 행복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치 중에서 가장 극적이며 존귀한 가치이다. 우리 신앙도 행복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한 끊임없는 신앙적 행위이다. 정성을 드리며 기도하며 친교로써 홍익하는 행복의 행위이다.
 
착함을 널리 퍼트리라. 착한 일을 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착한 말씀을 설명하라고 가르치신다. 즉 착함의 행위가 행복을 주기때문이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쁨으로 마음에 담아 그 행복의 쾌감을 상상하자. 내가 주신 바의 행복의 쾌감을 함께 나누자. 행복의 DNA가 주위를 감사와 기쁨으로 스미게 하자.
 
행복을 누릴수록 더 기쁨이 샘솟고 샘물처럼 계속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행복으로 날로 새로워질 때 결국 한얼도 기뻐하시고 우리 스스로 한얼 사람의 행복이 깊어질 것이다. 지난해에도 세월의 아픔 속에 침울한 한해를 보냈다.
 
정이 많은 우리 민족은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같이했던 동족의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평생 효도하겠다고 가족여행을 유럽으로 정해놓고 세월호의 참사를 맞았다. 여행사에 취소 신청을 했더니 우리가 빠지면 팀 전체가 무산된다고해서 여행을 했지만 좋은 것을 먹어도 신기한 것을 보아도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편치 않았다.
 
한 언론 조사기관인 갤럽이 143개국을 대상으로 행복순위를 조사했는데 우리나라가 118위로아프리카나 중동의 팔레스타인분쟁지역보다도 행복 순위가 뒤져 있다고 한다,
 
나만 행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야 행복한 두레 행복, 더불어 행복 쾌감이 작용한 듯도 하다. 이제 지난 아픔 훌훌 털고 내일의 아침을 맞자. 긴 시간 슬픔에 잠기는 것이 서로의 고통 일수도 있다. 이제 행복의 쾌감을 상상하라. (단군정신선양회장·전 대종교 총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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