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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하는 마음마저 초월한다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5/20 [08:05]
장자 쉽게 읽기

분별하는 마음마저 초월한다면

장자 쉽게 읽기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5/20 [08:05]

一受其成形, 不亡以待盡. 與物相刃相靡, 其行盡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人謂之不死, 奚益!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人之生也, 固若是芒乎? 其我獨芒, 而人亦有不芒者乎?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以無有爲有. 無有爲有, 雖有神禹, 且不能知, 吾獨且奈何哉!
 
사람이 한번 사람으로서 형상을 받고 태어나면 자신의 생명을 해치지 말고 그 몸 그대로 자연스럽게 죽음을 기다리도록 하라. 그런데 주위의 사물에 거역해서 서로 해치고 마찰을 빚으면서 그 몸을 소진시킨다면 그의 일생은 말 달리듯 지나가버려 막을 도리가 없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닌가. 평생 속 썩이며 허덕여도 그 성공을 보지 못하고, 고달파 쓰러지면서도 돌아가 쉴 곳(죽음)을 알지 못하니 애처럽지 아니한가. 세상 사람들은 ‘인간은 덧없이 죽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미 그 몸이 늙어버리면 그 마음도 따라 시들어 버린다. 어찌 큰 비극이 아닌가. 사람의 생애란 본래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이 허망한 것인가. 나만 홀로 혼미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 것일까?
 
[역시 신체에는 주재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마음에서 찾아보자]
대체로 자기중심적으로 굳혀진 관념인 성심成心에 매달린다면 어느 누군들 자신의 주관이 없겠는가. 눈앞에 차례로 나타나는 감정을 지적으로 판별하는 현자라야만 자기 주관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자기의 견해는 있는 법이다. 아직도 마음에 일정한 기준이 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시비의 판단이 생긴다함은, [이는 궤변론이니] ‘오늘 월越나라로 떠났는데 어제 거기에 도착했다’는 것과 같은 억지 논리이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셈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다고 한다면, 비록 신묘한 지혜를 발휘했던 우禹임금 같은 뛰어난 인물이 나온다 해도 도저히 그것을 진실로 인정할 수 없으리라.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어찌 알겠는가?
 
成形(성형): 이루어진 형체, 곧 사람의 몸.
不亡以待盡(불망이대진): 생명을 해치는 일 없이 저절로 죽기를 기다리자.
相刃相靡(상인상마): 사물과 서로 해치고 마찰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관계를 맺음.
行盡如馳(행진여치): 인생은 달리는 말처럼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다.
役役(역역): 신경을 써서 마음이 피로해지는 모양.
?然疲役(날연피역): 지치고 수고하여 애씀.
其形化 其心與之然(기형화기심여지연): 늙어서 체력이 차츰 쇠약해지면 그 마음도 그와 함께 변화함.
芒(망): 어둡고 몽매함.
成心(성심): 무엇인가 일정한 의견을 갖게 된 마음, 사적인 견해. 일정하게 굳어진 마음. 是非(시비), 善惡(선악)이 생겨나는 근거로써 부정적 의미로 풀이함.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해필지대이심자취자유지): 밤낮 우리 앞에서 교대로 일어나 변화하는 감정의 원인은 보통 때는 모르지만 知(지)를 작용하여 그것을 알려 함은 賢者(현자)를 자처하는 자들이 하는 것으로 공연한 행위라는 장자의 생각임.
今日適越而昔至也(금일적월이석지야): 오늘 월나라로 떠나 어제 도착함. 불합리함, 詭辯(궤변)을 말함.
無有爲有(무유위유):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다는 말임.
吾獨且奈何哉(오독차내하재): 난들 유독 이를 어찌할 것인가.
 
성심成心은 사회 공동체의 규칙 속에서 내면화 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고착된 마음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작고 큰 자신의 식견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자기 지식에 스스로 사로잡혀 이를 고집함으로써 여러 가지 시비와 갈등이 일어난다. 자기의 주관적 관념에 의해서 아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으로 분별해 놓은 것을 실재라고 착각하여 이에 집착한다.
 
장자는 말한다. 사람들 간에 숱하게 벌어지는 다툼은 고착된 마음[成心]으로 상대를 대하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어떤 의견이나 생각으로부터 좀 더 여유롭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시비와 다툼에 빠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장자는 이런 사실을 ‘오늘 월나라로 갔는데, 어제 월나라에 도착했다’는 것에 비유한다. 성심 때문에 빚어진 궤변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현명한 사람은 인간의 지식을 근원적으로 반성하여 분별하는 마음조차도 그 근원이 공허한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의 행동의 진정한 주인은 우리 자신이라기보다는 삶 속에서 길들여진 성심이 아닌가. 자기 나름의 오랜 생활 속에서 지우기 힘들어진 흔적이요 주름으로 내면화 되어 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작용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미 이루어진 성심을 스승으로 삼지 말고 과감히 벗어나서 지금 직면한 현재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라고 권유한다.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성심을 자유롭게 이루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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