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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⑤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5/22 [10:07]
천조대신 신화. 우리의 고유 광명사상 영향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⑤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천조대신 신화. 우리의 고유 광명사상 영향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5/22 [10:07]
神宮은 신라 소지왕 때 처음 건립, 日에 유입
신라 백제 가야 등 왕족 귀족들 일본문화를 개창
 
우리는 여기서 일본의 국조신이 한민족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조대신은 남동생인 스사노오와의 사이에 5남3녀를 낳았고 또 출운국(出雲國)에서 구시이나 다히메(奇稻田姬)를 낳은 스사노오는 본국인 네노구니(根國)로 돌아갔다. 이 네노구니가 바로 한국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스사노오의 본국이 네노구니로서 한국이라면 누이 역시 한국이 본국일 수밖에 없다. 천조대신의 신화 또한 한국 고대조상들이 일본열도에 건너가 세력을 펼치면서 형성됐으리라는 점도 부인 할 수 없다. 번조선, 예맥조선 등의 고조선인들이 자기 나라가 붕괴 되면서 각각 한반도 내륙으로 유랑해 들어갔고, 일부는 바다 건너 대마도·구주지방으로 들어갔다고 본다. 이때가 서기전 3세기경이다. 이들이 들어갈 때는 자기들의 고유문화 특히 고유신앙을 지니고 들어갔음이 틀림없다.
 
천조대신의 신화는 단군의 광명사상(光明思想)과도 관계 되고 있다. 즉, 천조대신이 천석굴(天石屈)에 들어가 사방이 캄캄해지도록 나오지 않자 큰 나무에 방울을 달고 굿을 했다는 자체가 이를 말해 준다.
 
방울을 단 나무 진판수(眞板樹)는 곧 고조선 개국설화에 나오는 신단수(神檀樹)와 같은 것이며, 고유 신앙에서 무교인이 방울을 들고 추는 검춤(神舞)과 신인(神人)간의 매개역할인 무당행위(굿)가 이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천조대신이 돌문을 열고 나옴으로써 잃었던 밝음을 다시 찾은 것은 우리민족의 고유 광명사상의 영향이라 본다.
 
우리민족의 총체적 사상은 한마디로 ‘한’사상이다. ‘한’은 밝다, 크다, 하나, 하늘, 하나님, 온(全), 낱(個) 등의 뜻을 지닌다. 배달(밝은 땅), 단군(밝은 땅의 임금), 조선(아침태양이 빛나는 나라)이란 말 자체가 광명을 의미한다. 단군사상인 신선사상(神仙思想) 자체도 본래 어둠과 죄악이 없는 사상이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경천(敬天) 숭조(崇祖) 애인(愛人)사상을 지녀왔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국조 신 천조대신을 모신 신궁이 이세신궁(伊勢神宮)이다. 조상신을 모신 곳을 신사(神社)라 한다. 이는 고대로부터 우리민족의 조상 숭배 사상이 널리 보급된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일본의 천조대신을 모신 ‘신궁’의 유래부터 알아보자. 이것 역시 신라에서부터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 서기 476~500) 9년 조에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2월 봄에 나을에다 신궁을 설치했다. 시조가 처음 탄생한 곳이 나을이다(春二月 置神宮於奈乙 奈乙始祖初生之處也)”.
 
소지왕이 처음 나을을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궁 제도 내지 그 설치는 애당초 신라에서부터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의 신사 앞에 쳐 놓은 굵은 왼새끼 줄은 우리 민족의 산모가 아이를 낳고 치는 검 줄(神索)과 같으며, 나뭇가지마다 종이를 꼬아 매어 놓은 것은 우리의 서낭당 제도가 그대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관광유적지 가운데 하나인 닛꼬(日光)에서 젊은 여인이 추어 보이는 신무(神舞)에 북과 피리 그리고 가야금의 일종인 고도(琴)라는 악기가 사용되고 있다. 춤은 부채춤과 유사하다. 고도라는 이 현악기는 옛날 고구려에서 가야금을 ‘고도’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할 때 당시에 건너간 악기 이름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 일본의 천조대신을 모신 ‘신궁’은 신라 소지왕 때 처음 건립, 日에 유입된 것이다. 일본의 3대 신궁은 메이지천황을 모시는 도쿄의 메이지 신궁     ©
 
그런가 하면 천조대신을 모신 신궁에는 반듯이 칼·거울·곡옥(曲玉: 마가다마) 등 3종의 신기가 있다. 특히 일본사람들은 곡옥을 신주처럼 모신다. 그런데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신라문화재만 보더라도 거의가 곡옥 투성이 아닌가.
 
과거 군국침략주의 일제는 일본민족이 한국으로 건너간 것처럼 꾸며 그들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정당화 하려 했으나, 역사의 진실은 오히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계통의 왕족 내지 귀족들이 건너가 일본왕족 계통과 혈연관계를 지니며 그 조상들 역시 일본문화의 개창조가 됐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의 고적 유물과 상고 민속문화만 봐도 이를 증명해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왕실의 시초인 신무왕이 신라계통이라는 사실이 역사적 근거로 드러나는 마당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종래의 일본상고사는 초대 신무왕 즉위 년대를 서기전 660년으로 함으로써 제33대 추고왕 9년(서기 601년) 까지를 1260년으로 하는 상고 왕조사를 만들었으니 현재 2600여년이다. 그러나 이는 약600년을 가공적으로 조작한 년대이다. 그들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이 신무왕부터 쳐서 2600년이라고 하지만 그 신무왕은 누구인가.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일본의 사서들이 말하고 있는 신라 시조 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넷째 동생이다.
 
때문에 2000여년의 역사 밖에 되지 않는 일본역사의 개창조가 일본인이 아닌 우리 한민족이며, 특히 다음 번엔 신무왕과 박혁거세 왕과의 관계를 밝혀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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