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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학자 趙興胤박사와 이옥용 회장과의 대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6/19 [16:46]
巫는 한민족의 본향이자 원형이다

무속학자 趙興胤박사와 이옥용 회장과의 대담

巫는 한민족의 본향이자 원형이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6/19 [16:46]


종교(宗敎 ․ Religion)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신(神) 또는 초월적 절대자를 인정하여 일정한 형식 아래 그것을 믿고 숭배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런 행위를 통해 마음의 안락과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정신 ․ 문화의 한 세계로 귀의자(歸依者)는 정신적 공동 사회나 교단을 형성한다. 종교의 종류는 자연 숭배 ․ 토테미즘(Totemism ․ 씨족이나 부족 사회서 특정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숭배하는 신앙형태)등의 원시적 종교로부터 주물(呪物) ․ 다신(多神) 숭배와 같은 초급 종교를 거쳐 오늘날 세계적 종교로 부각된 불교 ․ 유교 ․ 기독교 ․ 이슬람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이를데 없다. 더불어 종교는 기후 ․ 문화의 차이와 민족 ․ 지역 등에 따라 현격한 차별성을 갖게 되며 이는 곧 종파와 교파 분열로 이어 진다
 
한국의 종교학자들이 우리의 종교 상황을 일러 ‘종교백화점`이라고 지칭해 온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수많은 종교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실제로 국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세계 각 국의 종교가 뿌리 내려가고 있다. 인접국의 민족종교 에서부터 서구의 고등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파악하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종교와 결사의 자유와 보장된 사회에서 인위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 단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토록 난립한 많은 종교에도 그 뿌리와 원형은 있기 마련이다. 유구한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한민족의 종교원형은 무엇이고 그 뿌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한국종교의 원형을 찾아 평생을 연구하며 매진해온 종교 ․ 문화인류 학자가 있다. 바로 우반(又半) 조흥윤(趙興胤 ․ 69)박사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2년 정년퇴임 하고 현재는 동 대학 명예교수인 그를 잠실나루 전철역 오붓한 찻집에서 만났다.
 
▲ 조흥윤 교수는 돈도 안생기고 인기조차 없는 인문학 중에서도 다수가 기피하는 무 연구에 평생을 바친데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 매일종교신문
 
―근작 ‘서여사랑방 작은 인문학’을 읽었습니다. 스승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미래 인문학의 지름길을 명료하게 제시해 놓으셨더군요.
 
"감사합니다. 서여(西餘)선생님이 순천 송광사와 충남대에서 특강하신 내용을 압축하고 여러 인문학자들과 제자들이 나눈 담론을 노트 형태로 엮은 것인데 의외로 독자들 반응이 뜨겁습니다. 한국 인문학계의 우뚝 선 태두이신 데다가 문화인류학의 새 지평을 연 학자이셨지요. 저는 지금도 선생님의 얘기만 나오면 나도 모를 신명과 함께 큰 동력을 얻습니다."
 
전남 해남 출신의 서여 민영규(閔泳珪 ․ 1915~2005)박사는 서지학의 권위자로 저명한 동양사학자 겸 불교학자이다. 평생 연세대 문과대학 교수로 봉직하며 연세대 도서관장 ․ 동방학연구소장 ․ 국학연구원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후학을 양성해 냈다. 동 대학 사학과 출신인 조흥윤 박사는 서여의 여러 제자 가운데 수제자이다. 조박사가 저술한 수많은 저서와 논문 중 ‘한국의 원현신화와 원앙부인 본풀이’를 근거로 인류의 종교 기원과 한국종교의 원형에 관해 물었다.
 
“종교의 기원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고 인간은 원래부터 종교심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를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종교는 신봉돼 왔다고 사료 됩니다. 인간 모두가 종교심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무슨 종교든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지식 ․ 덕성 ․ 신앙의 이 세가지 요소는 나면서부터 우리 의식 속에 내재돼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종교의 원형을 무(巫)에서 찾고 있습니다."
 
― 조 박사께서 집필하신 ‘한국 신령체계와 성격’을 보니 󰡒한국 귀신에도 계급이 있다󰡓고 언급 하셨는데...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회장께서도 나를 꽤 많이 연구 하셨는데요!"(웃음)
조 박사는 찻잔의 대추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특유의 제스처와 함께 담론을 이어갔다.
 
"한국의 기본 굿이라 할 수 있는 서울 ․ 경기지역 천신 굿에 모셔지는 신령의 역할과 비중에서 신령 등급을 확인 할 수 있는데 모두 일곱 계급입니다. 가장 높은 등급이 첫째 제석 ∙ 천존 ∙ 일월성신 ∙ 칠성 ∙ 불사등의 천신 계통으로 이들 신령 모두는 ‘하늘’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최고 권위와 영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본향산신 ∙ 본향조상 등의 산신계통 입니다. 이들 신령은 각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 내려온 ‘토착세력’으로 주민들의 주체성과 정체성의 반영이어서 영향력이 큽니다. 셋째 유비 ∙ 관우 ∙ 장비 ∙ 제갈량 등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외래 신령들 이지요. 대부분 별도의 건물에 모셔지므로 전래신(傳來神)으로도 불립니다. 넷째 최영 ∙ 임경업 ∙ 신립 장군 등 우리민족 고유의 장군신이며 다섯째 집을 지켜주는 성주, 마을이나 국가를 호위하는 군웅 등 가택 신계(神界)입니다. 여섯째 터주 ∙ 서낭 ∙ 지신 할머니 등 잡귀신 신계, 마지막 일곱째 시왕 ∙ 넋대신 ∙ 사자 등 저승과 관련된 귀신들 이지요. 무당은 귀신의 등급부터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귀신들은 등급에 따라 젯상의 위치가 달라지고 신가(神歌)도 구별되는 등 차별 대우를 받으며, 등급이 높을수록 젯상이 앞 쪽에 놓여지고 낮으면 대청마루로 밀려난다고 조 박사는 강조한다. 그러면서 현재 동 ∙ 서양 종교의 각 종단이나 교단에서종무 행정을 위해 설정된 위계질서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덧붙인다.
 
독일 함부르크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우반은 동 대학민속박물관 연구원으로 재직 하면서 이 분야 관련 권위논문을 주로 발표해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1984년 귀국 후 그가 펴낸 저서는 ‘한국의 무(巫)’ ‘무와 민족문화’ ‘한국 무의 세계’ ‘무(巫)-한국무역의 역사와 현상’ ‘한국의 샤머니즘’등 무(巫)에 관한 전문서적이다. 문화인류학을 무에 접목 시킨 한국의 대표 학자로 자리매김하며 수많은 국제회의와 학계세미나를 주관해 왔다. 스승 서여와 현지답사로 저술해 낸 ‘촉도장정’은 한 ∙ 중간 고대문화를 잇는 가교로 학계의 높은 평판을 이끌어 낸 바 있다.
 
― 용어에 관한 것입니다만 무속(巫俗) ∙ 무교(巫敎) ∙ 무(巫) 가운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무속은 불교학자 이능화(1869~1943)선생이 샤머니즘을 전통적 관습으로 해석해 처음 사용한 명칭으로 현재 국문학자와 민속학자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지요. 무교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93)선생이 쓴 용어로 샤머니즘을 불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교처럼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는 입장이며 종교학자들 간에 회자됩니다. 무는 내가 처음 명명한 단어로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 현재 한국의 무인(巫人)수는 어느 정도 입니까?
 
“전 세계적으로 무가 우리나라처럼 오랜 역사를 갖고 신앙돼온 나라는 없습니다. 중국의 샤머니즘은 민간도교로, 일본의 샤머니즘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신도(神道)로 변질했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은 유 ∙ 불 ∙ 도교를 수용해 특유의 무로 재탄생 시켰어요. 어느 통계에 따르면 사제에 해당하는 무당 수만 20~30만 명에 이릅니다. 무당 1인당 단골 신도를 최소 20명으로 볼 경우 한국 무의 신도는 500만 명을 헤아립니다. 우리의 전통 무는 조상신을 섬기는 조상숭배의 한 형태이지 원귀나 잡귀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종교의 원형을 무에서 찾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한국의 무는 단군신화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비록 다른 종교로 탈바꿈해 명칭과 의식도 달라졌지만 현존하는 전통 종교의 내면에 습합된 무의 본질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미국의 저명한 종교 심리학자 제임스 류바(James Leuba 1868~1946)는 종교의 정의를 다섯 가지로 내리면서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이 부류에 종속된다고 했습니다. 즉 ‘① 종교란 거룩한 것에 의해 야기된 감정이나 태도이다. ② 종교란 삶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며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가를 확정하려는 추구이다. ③ 종교란 삶에 힘을 갖게 하는 초인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④ 종교란 인류의 복지에 대한 헌신이다. ⑤ 종교란 영적 세계의 실재를 내포하는 경험이다’ 입니다. 조 박사께선 오늘날의 한국종교가 종교 본연의 제 몫을 다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예리한 지적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70~80년대 우리 사회에는 국민들의 종교 선택에 이상 기류가 작용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사회 저명인사나 유명 연예인이 다니면 그 종교가 좋은 줄 알고 무작정 따라 믿는 사회적 분위기 였지요. 단적인 예로 무신론자였던 어떤 중량급 인물이 특정 종교를 나간다면 무작정 그 종교를 따라 나가는 ‘종교적 쏠림현상’ 같은 것 이었습니다. 한 때는 종교단체 간 서로 모셔가려는 유치작전이 치열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국민들의 사회적 수준과 민도가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을 능가하고 있어 어림없는 발상입니다. 종교가 호화찬란하게 건물만 크게 짓고 진정한 영성(靈性)없이 말로만 외치다가는 가차 없이 외면당합니다. 이미 일부 종교의 경우는 신도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고질적인 대형화 ∙ 물량화 ∙ 세습화에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잖습니까? 천당과 지옥을 이분화(二分化)시켜 대중을 우롱할 시기는 지났습니다."
 
종교의 바른 역할과 사회적 선도 사명에 관해 계도성 발언을 서슴지 않던 조 박사가 이번에는 문화인류학적 입장에서 종교의 원형으로 접근하며 슬며시 그 대안도 제시했다.
 
“‘종교(宗敎)’라는 단어는 ‘으뜸 되는 가르침’이란 뜻으로 과학과 철학의 이상(理想)인 것이며 인간 삶의 근본 법도를 다루는 가르침 입니다. 종교심성은 누구에게나 본질 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종교는 모든 인간에게 최우선적 과제로 대두되는 것이지요. 특히 문화에서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종교를 다룰 때는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통찰해야 합니다. 문화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문화적 사고(Culture Thinking)라 하는데 종교문화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여깁니다. 문화적 사고는 문화변혁과 문화창조 내용까지 포괄하고 있으니까요."
 
― 조 박사께서는 한국종교의 원형을 무에서 찾고 계신데 지금 한국 종교계에서의 무의 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신라 역대 왕이 시조에게 제사 올리는 전통은 제2대 왕인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 AD4~24)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남해차차웅이 무당인 사실은 이제 두루 알려져 있거니와 그의 여동생 아로(阿老) 또한 무당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렇듯 한반도 고대 국가의 왕실과 권력층은 무당과 연관됐음이 관련 학계의 연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어요. 샤머니즘은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널리 몽골 ∙ 만주 ∙ 한국 ∙ 일본을 포함해 우랄알타이 계통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나타나는 원시적 종교형태입니다. 샤먼(Shaman ∙ 무당)이란 영매(靈媒) ∙ 예언 ∙ 치료 ∙ 예능의 역할까지 해내는 무사(巫事) 전문가를 말합니다."
 
찻집 여주인이 따라준 녹차로 목을 축인 조 교수가 말을 이었다. 󰡒한국인의 무가 미상불 한국인의 거대한 정신 ∙ 심리의 복합체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巫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진 건 일정한 배경과 원인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조선조 이래 형성되어온 무 천시 선입관에서 찾고 있으며 일제와 기독교의 부정적 안목 및 서양의 종교 진화론에서 기인된다고 봅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조의 권력층이 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무를 무속으로 전락시켜 무당은 팔천민(八賤民)중의 하나로 전락되고 만 것입니다.󰡓
 
조선시대 8천민은 ①사(私)노비 ②승려 ③백정 ④무당 ⑤광대 ⑥상여꾼 ⑦기생 ⑧공장(工匠)이었다. 무당은 여무(女巫)를 가리키며 남무(男巫)는 박수라 불렀다. 개중에는 기생이 무녀로 변신해 무계(巫界) 질서를 흐려 놓기도 했다. 해주 사는 젊은 생강 장수가 평양기생에게 유혹 당해 모두 털리고 쫒겨 나며 읊은 자탄시가 전해 온다. 예나 지금이나 생강은 비싸다. 원간노마목(遠看老馬目 ∙ 멀리서 보니 늙은 말의 눈 같더니만) 근견환농창(近見患膿瘡 ∙ 가까이 보니 고름 든 환부의 상처같구나) 양변개무치(兩邊皆無齒 ∙ 양쪽 어디에도 이빨 하나 없는데) 끽진일선강(喫盡一船薑 ∙ 내 생강 한 배를 다 먹어 치웠네).
 
한국인의 굿판에 강한 애정을 갖고 있는 조 박사지만 그렇다고 그가 굿판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이진 않다.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인의 치유 방법으로 군림해 온 샤머니즘은 지나치게 현실위주고 실리를 추구해 이기적 경향을 조장 할 수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아울러 요행과 운수를 통한 술수로 비합리성을 부추겨 사회윤리의 부재현상을 초래 한다는 고언(苦言)이기도 하다.
 
― 모든 종교인들이 이상향으로 여기는 천당과 극락에 관한 소견은 어떻습니까?
 
“폴란드의 옛 수도인 크라코의 유대인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유대교 랍비 아이시크가 살고 있었는데 ‘멀리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로 가서 왕성의 다리 밑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라’는 꿈의 계시를 세 번이나 받았어요. 마침내 프라하에 도착한 아이시크가 천신만고 끝에 그 다리를 찾았으나 수비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며 서성거리던 그에게 수병이 다가와 연유를 물어 꿈얘길 했더니 수비병이 말 했어요. ‘나도 비슷한 계시를 받았는데 크라코의 아이시크 집 난로 뒤 지저분한 구석에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으니 그걸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아이시크가 집으로 돌아와 구석을 파고 보물을 찾아냈지요. 여태껏 눈여겨보지 않던 허술한 곳에 값진 보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시크가 그곳에 기도소를 세우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지니고 있답니다."
 
그러면서 조 박사는 "유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임사(臨死)체험이나 가사(假死)상태를 통해 극락을 보고 천국을 다녀왔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결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 것이다"며 "산 사람이 내세나 저승을 논함은 단연코 자기주장일 뿐이다"고 강조한다. 스승 만영규 박사가 ‘예루살렘 入城記(1976)’에서 고백한 구절을 소개 한다.
 
예루살렘 성을 떠나 유대 광야를 거처 요단강 주변을 방황하는 동안, 그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에 반비례해서 생명체에 위협을 주고야 말 가혹한 자연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 조상의 시대로부터 너무도 아름다운 자연의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이 아름다운 자연이었기에 우리 조상은 마귀나 악령의 존재를 모르고 지내왔고 유일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의 필요도 느끼지 않고 지내올 수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자연이란 우리를 길러주고 우리를 그 속에 안아 주는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것이었다.
 
― 조 박사의 저서를 보면 '한국인의 본향은 고향과 다른 무(巫) 상상계의 꽃밭이고 훨씬 근원적인 함의(含意)를 갖는다'고 서술 하셨던데 한민족과 꽃은 어떤 상관관계 입니까?
 
“우리 신화에서 꽃밭은 실체를 구체적으로 묘사 않고 은근히 감춰둔 채 그 원리의 성격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화를 알고 찾는 사람에게만 열리고 보이는 것입니다. 한민족은 유난히 꽃을 좋아해 소월의 ‘진달래꽃’을 비롯해 ‘꽃밭에서’ ‘고향의 봄’등이 늘 우리 마음속에 흐르고 있잖습니까? 비근한 예로 김춘추 시인의 ‘꽃’이 가슴에 다가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후략) 우리의 본향은 바로 이런 꽃밭입니다."
 
조 박사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가 ‘돌아갔다’고 표현함은 그가 본향으로 돌아갔음을 이르는 말이다"며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도 고개 넘어서 본향을 찾아간다는 의미라고 풀이 해 준다. 장지로 향할 때 꽃상여를 타고 감도 본향을 찾는 민족의 심성과 연결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 박사는 ‘화랑의 종교문화(1995)’란 논문을 통해 화랑을 국가 무당 후보 집단으로 규명해 낸 바 있다. 화랑도(花郞徒)는 꽃의 낭도라는 해석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는 신라 진흥왕 37년(576) 봄에 받들었다는 원화(源花) 또는 ‘꽃의 사람’으로 근원 꽃을 나타낸다고 해석했다. 그의 저서 ‘…원앙부인 본풀이’를 떠 올리게 한다.
 
― 평생 동안 남이 마다하는 무의 연구로 시종일관한 학자 입장에서 소회가 남 다르시겠지요?
 
“나는 지난 50년 가까이 무(巫 ∙ 샤머니즘)를 공부 한다며 먼 길을 꽤나 부지런히 걸어 왔습니다. 그 길에서 무당들이 천대 받고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기도 했지요. 일부 박수와 무당은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한을 풀기도 했지만 거개의 대다수가 천민으로 멸시 받고 있습니다. 급할 때는 그들을 찾아 위로 받으며 돌아서서는 모른 체 합니다. 천민이 존재하는 사회는 결코 사람답게 사는 사회일 수가 없어요. 무를 종교로 봐야 한다고 외치면서 굿판에 앉아 날이 지나고 달이 바뀌는 것을 잊기도 했지만 아직도 요원합니다."
 
그는 돈도 안생기고 인기조차 없는 인문학 중에서도 다수가 기피하는 무 연구에 평생을 바친데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모든 종교를 가까이하고 연구하다 보면 결국 무의 세계와 맞닿아 교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믿는 종교 교리 잣대로 먼저 살다 간 조상을 정죄할 수 없듯이 무는 곧 우리 한민족의 원형이고 본향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한국바둑협회 ∙ 국제바둑협회 ∙ 한국바둑문화학회를 직접 청립해 조직적으로 이끌어온 바둑의 고수인 줄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 조 교수는 이 회장에게 빛 못보는 구석진 종교들을 보살피며 정론직필(正論直筆)로 펼쳐나가길 기대한다며 ‘이 회장의 안광(眼光)이 범상치 않다’고 했다.     © 매일종교신문
 
찻 집을 나서며 한국 종교언론의 사명과 역할에 관한 종교학자의 견해를 듣고자 청했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아지며 문화현상은 놀랍게도 반복됩니다. 오늘의 정치 ∙ 사회 현실을 100년 전, 혹은 50년 전의 역사와 대비시켜 볼 때 그 증거는 더욱 명확해 지는 거죠. 당장은 인터넷 시대로 SNS등이 공중을 점프하고 있지만 역사는 기필코 정론으로 쓰여 진 종이 신문이 정사(正史)로 보존 됩니다. 거대한 언론재벌조차 힘겨운 한국 언론 풍토에서 종교 전문지를 발행한다는 건 투사 정신으로 보아야 할 거예요. 다행히 이 회장께선 종이신문과 인터넷신문을 동시 발행하고 있으니 상호 보완관계가 잘 이뤄질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그늘지고 빛 못보는 구석진 종교들을 보살피며 정론직필(正論直筆)로 펼쳐나가길 기대합니다. 이 회장의 안광(眼光)이 범상치 않은데요!"(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창밖을 바라보니 태양이 서산마루에 걸렸다 기탄없이 너댓 시간을 ‘토론’한 것이다. (이화서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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