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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 앞에서 곡을 멈춰라!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6/29 [06:59]
장자 쉽게 읽기

주검 앞에서 곡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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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6/29 [06:59]

老聃死, 秦失弔之, 三號而出. 弟子曰: 「非夫子之友邪?」 曰: 「然.」「然則弔焉若此, 可乎?」 曰: 「然. 始也吾以爲其人也, 而今非也. 向吾入而弔焉, 有老者哭之, 如哭其子? 少者哭之, 如哭其母. 彼其所以會之, 必有不?言而言, 不?哭而哭者. 是遁天倍情, 忘其所受, 古者謂之遁天之刑. 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古者謂是帝之縣解.」 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

 
노담老聃(=老子)이 죽었는데 친구인 진일秦失이 조문하러 갔다. 그는 세 번 곡哭을 하고 곧바로 나와 버렸다. 절친한 벗의 죽음에 세 번만 곡을 하고 나온 진일을 제자들이 이상히 여겼다. 그 중에 노자의 제자가 물었다.
 
“노담은 선생님의 친구가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네 친한 친구였다네.”
“그러시다면 조문을 이렇게 해도 됩니까?”
 
진일이 말했다.
 
“그렇다. 처음에 나는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더군. 내가 조문을 하러 들어가니 조문객 가운데 늙은이는 마치 자기자식을 잃은 듯이 애절하게 울고, 젊은이들은 마치 그 어머니를 잃은 듯이 슬피 울었네. 이들은 모두 노자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네.
 
노자는 자기에게 조사弔辭를 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 터이지만 사람들은 조사를 하고 있었고, 곡을 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을 터이지만 곡을 하고 있었네. 그가 평소에 말로는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속으로 은근히 바라는 것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그만 불쾌해졌네. 이는 노자가 잘못 가르친 것이네.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고 진실에서도 벗어난 일일세. 자연으로부터 받은 목숨의 길고 짧음을 잊어버리는 것, 이러한 짓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분을 잊은 것이야. 옛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자연의 형벌을 피한 벌[遁天之刑]’이라고 했네.
 
노자가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난 것이요, 그가 홀연히 죽게 된 것 역시 죽을 운명을 따른 것뿐이네. 때를 만나 이 세상에 편안히 머물다가 자연의 도리대로 이 세상을 떠나면 되는 것이네. 이 세상에 온다고 하여 탄생을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여 죽음을 슬퍼할 것도 없다네. 슬픔과 기쁨의 감정 따위가 끼어들어 어지럽힐 수가 없는 법이네. 이러한 경지를 옛사람은 천연의 해탈이라고 하여 하늘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풀어주는 것[懸解]이라고 했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땔나무는 타 없어지지만 불은 계속 새로운 땔나무로 옮겨가면서 계속 타올라 꺼질 줄을 모른다는 것이네,” 
 
老聃(노담): 老子(노자)
秦失(진일) : 노자의 벗.
吾以爲其人也(오이위기인야): 처음에 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必有不?哭而哭(필유불기곡이곡): 반드시 곡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곡을 하게 하였다는 뜻.
遯天倍情(둔천배정):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인정에도 어긋남.
忘其所受(망기소수): 하늘로부터 받은 본분을 잃어버림.
遁天之刑(둔천지형): 하늘을 배반한 죄. 진리를 도피한 죄.
適來夫子時也(적래부자시야) 適去夫子順也(적거부자순야): 때마침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였기 때문이고, 때마침 세상을 떠난 것은 갈 때였기 때문이다.
安時處順(안시처순): 태어나는 때를 편안히 맞이하고 죽는 때를 편안히 따름. 生(생)이라고 기뻐하지 않고 死(사)라고 슬퍼하지 않는 태도를 뜻함.
帝之懸解(제지현해): 하늘이 인류에게 내린 거꾸로 매어다는 형벌로부터 풀려남.
指窮於爲薪(지궁어위신) 火傳也(화전야) 不知其盡也(부지기진야): 손가락이 장작 지피는 일을 하면 불은 계속 타고 꺼질 줄을 모른다. 땔나무가 다 타 버려도 불은 다른 사물로 옮겨가기 때문에 결코 꺼질 줄을 모른다는 것임. 
 
삶이 하늘에 거꾸로 매달려 있음이면 죽음은 그것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때를 만나 태어나고 자연에 순응하여 죽은 것일 뿐인데 그 앞에서 지나치게 울고불고 하는 것은 하늘의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주검 앞에서 곡을 멈추고 차라리 노래를 부르라는 말이다.
 
삶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사의 불을 지피는 장작개비를 화덕에 넣고 있다. 그 화덕은 하늘의 뜻에 따라 태우고 있는 진리이기도 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은 육체만이 자기 자신인 줄 알아서 이것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삶에 향한 집착[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참된 해탈을 지향하는 사람은 자기의 육체적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탈을 지향하면서 인간적 감정의 요소를 계속 남겨둔다면, 불이 꺼지기를 바라면서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서 결코 해탈을 얻을 수 없다.
 
참다운 해탈은 생사를 넘어 선 가운데에 이루어진다. 자기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님을 인식[忘其所受]하고 잘못된 집착을 놓아 버릴 때 정신은 한 단계 상승하며 현해懸解의 길을 만난다. 이 길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있던 것들을 보태고 쌓아가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씩 줄여가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 인위적인 욕망이 사라진 무위의 경지로 나아가는 데에 있다.
 
현해란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현해를 얻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삶과 죽음의 구별을 하지 않고 묵묵히 순환해가는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만약 우리의 삶이 현실의 속박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란 곧 이 매달린 끈을 푸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진정한 양생의 도가 이것이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현해는 양생의 요체要諦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다. 아궁이의 불은 결코 꺼질 줄 모르듯이 만물의 유전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밤과 낮이 그러하듯 삶과 죽음은 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정적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피안의 세계로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해서 죽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인간을 이루고 이들이 서로 만남을 쌓아가니 인간 세상이 된다. 처음에 서로 만남이 있고 다음엔 끌어당기고 마지막엔 서로 여운을 안고 헤어진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이 이 가운데서 가지가지 일어난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이 세상에서 사람을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일이 시대마다 그 마땅한 가치는 달라진다. 그러니 오직 무심하게 스스로 소모하지 않는 자만이 변화의 흐름대로 따라가는 데 걸림이 없게 된다.
 
여기서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명철보심明哲保身의 처세술 따위가 아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위험함과 삶을 보존하는 방법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지식인들의 절실하고 진지한 물음을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나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상세한 설명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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