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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속 민간신앙과 불교 이야기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7/16 [12:03]
“한국 문화 정서의 모습을 습합현상에서 보았다”

삼국유사 속 민간신앙과 불교 이야기

“한국 문화 정서의 모습을 습합현상에서 보았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7/16 [12:03]
이 원고는 장정태(사진) 박사가 민간신앙과 불교와의 습합을 삼국유사를 통해 연구하게 된 동기와 함께 우리 불교의 엄연한 현실임을 강조하는 강연입니다. 한국불교의 근원적 구조와 생태를 직시하자는 것이 불교학자·불교신자로서의 그의 신념이며 때론 불교계에서 이단시되는 경향도 있으나 그러한 역사와 현실을 꾸준히 밝히고 있다. 이 강연은 불교대학이 아닌 동방기독교 대학원 대학에서 이루어져 많은 관심과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편집자 주)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정서를 잘 담아낸 민족문화의 보고다. 우리나라 민간신앙과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삼국유사 연구를 하게 되었다.
 
우연히 방문한 무당집, 보살집 혹은 보살절이라고 하는 무당집에 있는 그림과 절에 있는 탱화 구조가 같았다. 불상도 있고 또 찾아오는 사람들,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무당집과 절집은 비슷했다. 거의 기복적이라고 할 만큼 원하는 것이 입시, 승진, 결혼 등 개인의 대소사에 관한 문제다. 
 
다만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무당집은 점을 치고 절은 기도라는 행위 정도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유심히 본 산신도가 비슷함을 넘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신도는 깊은 산을 배경으로 산신과 동자, 호랑이가 담긴 작품으로 민간신앙적 산신신앙이 불교와 결합하면서 사찰에 모시게 되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민간신앙에서 산신은 호랑이 그대로라면 불교 사찰에 등장하는 산신은 도교적인 색체가 짙게 풍기는 흰 머리카락과 긴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으로 반드시 소나무를 그려놓고 있다. 산신도에서 소나무는 장수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목(신단수)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산신에 기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 민간신앙적 산신신앙이 불교와 결합하면서 사찰에 모시게 되는 등의 습합관계는 무당집에 있는 그림과 절에 있는 탱화 구조가 같음에서도 엿볼 수     ©
 
삼국유사 속에는 민간신앙과 불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는 통상 민간신앙의 자리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들어와 쫓겨난 민간신앙과 불교가 교대되는 시기라고 배웠다. 민간신앙과 불교의 교체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기존에 민간신앙이 담당하던 많은것들을 불교가 수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민간신앙과 불교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습합이라고 하는데 습합이란 1+1=2라는 논법이다. 불교와 기독교, 기독교와 무속, 무속과 불교가 만나 한국화된 불교, 기독교가 되었다는 논리인데 이런 습합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불교, 기독교가 토착화될 수 있었다는 논리다.

민간신앙과 불교와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 가운데 특히 산신각에 눈을 돌렸다. 산신각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사찰에서 모셔지게 된 것으로 우리 토착신과 불교의 관계를 증명하고 있다. 민간신앙과 불교의 이와같은 습합현상이 한국 문화 정서의 모습이다.
 
불교의 특징이라면 부처를 모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그외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특징은 산신, 삼성각의 조화다. 그 속에는 칠성, 산신, 독성이 함께 있는 것도 특징이다. 도교, 민간신앙, 불교의 신상이 한 공간에서 동일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앉아있다. 이 모습을 연구하는 기존 연구자들은 고려 멸망이후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찰재정(수입) 확대의 수단으로 불교가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 민간에 구복신앙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숭유억불정책의 소산이란 논리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삼국유사를 읽어보지 못한 아니 읽어도 꼼꿈하게 읽지 않았던 사람들의 주장이다.
 
삼국유사에는 「선도산성모 수희불사」라는 조목이 있다. 산신과 신모의 도움으로 새로 불사를 일으키는 대목이다.
 
진평왕 때에 지혜란 이름의 비구니가 있었는데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홍사에 살 았는데, 불전을 새로이 수리하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런 어느 날 꿈 속에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아름다운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내가 바로 선도산 신모(神母)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이 기쁘므로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존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53불 육류성중 및 모든 천신과 5악의 신군(神君)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두 계절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 법회를 베풀므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아라."
 
지혜가 놀라 깨어나 무리를 데리고 신사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백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를 완성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모가 이르는 대로 따랐던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 워 신라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은 편지를 소리개의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날려보내자, 이 선도산에 날아와 멈추므로 마침내 그 곳에서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머무르며 나라를 진호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 제(望祭)의 위에 있게 하였다.
 
도교의 신모가 불사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비구니 지혜스님에게 시주를 하는 조건으로 불상과 더불어 오악신군(산신)을 모셨다. 오악산군이란 신라에 있는 다섯 개의 큰 산 신으로 동쪽에 토암산, 남쪽으로 지리산, 서쪽의 계룡산, 북쪽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 또는 공산을 말한다. 진평왕 당시로 절에 산신을 불교의 불보살과 민간신앙의 산신을 함께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불교의 전파와 민간신앙과 불교 사찰의 관계에 주목했다. 불보살, 토착신앙과 신성지역에 함께 모신다는 생각도 기발했다는 느낌도 그때 들었다.
 
불교가 들어온 지 얼마안된 시점이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민간신앙과 갈등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함께 신앙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민긴신앙과 불교의 습합현상의 초기단계이며 민간신앙의 불교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이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의 종교만을 선택하여 그 믿음속에 살고 있는 것 이것이 신실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우리들을 돌아보면 한 사람이 3개이상 믿어도 거부감이 없다. 불교신도이면서도 무당집에 가고 기독교인이면서 무당에게 집안의 대소사를 묻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라고 생각한다. 유교적 가치관, 불교의 생사관, 노후에 은자적 삶의 동경, 기독교의 사회윤리가 우리몸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현주 목사와 대담을 정리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이 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다석 유영모의 노자’ 도교, 유교, 불교, 기독교 사상을 넘나들며 저술과 강연을 하고 있는 오강남, 김용옥 교수를 보면 특정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이 우리문화의 특징이다. 이와같은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민간신앙을 받아들이는 습합의 모습이 한국문화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런 원초적인 모습 이 모두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특징으로는 13편의 건국신화가 있다. 단군신화 첫 구절에 위서를 결론 부분에는 당 배구전을 인용하고 있다.
 
『위서(魏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達)[경(經)에서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였고 또 백악(白岳)이라고도 하였는데 백주(白州)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바로 중국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당(唐)나라 「배구전(裵矩傳)」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고려(高麗)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다.〕이었는데 주(周)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나라는 이를 나누어서 3군을 설치하고 현도(玄菟)ㆍ낙랑(樂浪)ㆍ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이라 불렀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단군전을 인용하면서도 우리가 스스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전에 있는 내용임을 전하고 있다. 결국 일연의 독창성도 중국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고려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주적 역사기록을 위한 여러 장치를 하고 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고전에 내용이다. 그 내용에 의하면 우리의 역사는 공자가 이상적인 국가, 통치자라 하는 요순시대와 50년 정도 차이를 보이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5천년 찬란한 문화민족임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싶은 일연의 속내가 그대로 들어나 있다.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의 산실인 인각사 위에는 댐이 있다. 대구시민의 식수원으로 영남주민들에게는 귀중한 젖줄이다. 그 댐이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기전 먼저 인각사 아래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면 결국은 인각사가 수몰되는 것이다.
 
하이텔 한국사 동호회(한국전기통신공사에서 제공했던 종합인터넷망 공식명칭은 한국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신자인 김종민 씨가 토론방을 통해 여론을 일으키고 불교 동호회 송형근(편집자 주;당시 한양대 전자공학과)이 「인각사수몰반대운동본부」(1997년 6월 21일 경향신문)를 결성하는 등 이들의 노력으로 인각사는 수몰위기에서 벗어난다. 현재의 위치에 댐이 건설되고 댐 아래에는 일연공원이 조성되었다. 아직 편의시설이 제대로 가추어져 있지않아 방문객이 없는 상태이고 단시일내 그 개선책이 나올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공원은 일연이라는 이름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야기들로 꾸며놓고 있다. 그 가운데 단군신화 조형물도 포함되어 있다. 곰과 호랑이가 함께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 모습만 본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조상은 어린이 대공원 우리안에 갇혀있는 호랑이와 곰이란 생각을 할것만 같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는 울타리 넘어에서 고기 덩어리를 기다리는 그런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 공원을 조성하는데 관여한 집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는 토템신앙(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동물이나 식물과 연결시켜 숭배하는 신앙)이다. 곰을 신앙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신앙하는 부족이 외래문화를 가지고 있는 문화와 연정을 위한 각각 물 밑 작업을 하는 모습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곰의 집단과 환웅의 집단간이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인 것이다.
 
일연은 단군신화에서 표면적으로 환웅과 단군을 통해 조선의 건국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환웅도 단군도 아닌 웅녀임을 말하고 있다. 웅녀는 환웅에게 두 번 부탁을 한다. 한번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방문판매를 하는 사람들의 판매기법 가운데 하나 다른사람 집을 방문을 하면 작은 문틈사이로 손을 넣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손이 겨우들어갈 공간이 열리고 대화를 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이면에는 상대에 작은 틈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최대의 효과를 이룬 것이다. 인간이 되는 목적을 이룬 곰은 다음 단계로 결혼상대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환웅이 직접 그 소원을 들어준다. 거기까지 웅녀의 역할은 마무리된다. 단군탄생이후 그의 존재는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진다. 전자에 주장했듯 곰 신앙, 호랑이 신앙을 하는 부족들이 천손자손인 환인가와 합쳐지면서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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