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⑱응신왕 편<中>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9/02 [09:24]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⑱응신왕 편<中>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9/02 [09:24]

광개토왕 비문에 이잔국(利殘國)과 백잔국(百殘國)이 나온다. 이잔국은 소서노의 죽은 전 남편 우대의 아들 비류가 세운 나라 비류백제이고, 백잔국은 고주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온조가 세운 온조백제이다.
 
기원전 17년에 세운 망명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다시 남하하여 비류는 아산 미추홀에, 온조는 직산(위례성)에 각각 분립해 나라를 세웠다. 이 해가 기원전 7년이다.
 
두 번째 결혼 하였으나 두 번 다 실패한 비련의 여인 소서노는 망명 후 고주몽에 대한 배신의 한을 풀기 위해 위대한 국가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들은 처음부터 분열되고 말았다. 두 형제들을 화해시켜 보려던 어머니 소서노의 노력도 결국 온조백제의 강경파에 살해당하는 등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살해사건이후 온조는 경기도 광주로, 비류는 공주성(거발성)으로 각각 도읍을 옮긴다.
 
비류백제는 서기 396년에, 온조백제는 서기 660년에 각각 망한다. 서기전 17년 대방고지에서 건국하여 아산(미추홀)을 거쳐 서기 18년 공주성(거발성)으로 천도한 비류백제는 413년간 존속했다. 비류백제는 광개토왕 영락6년(396년), 고구려군의 기습 공격으로 광개토왕에게 함락 당함으로 멸망한다.
 
일본 초기 통치체제 ‘담로’ 비류백제 관제 본 딴 것
 
여기서 당시의 관제를 보면, 온조백제는 공주 도읍시대의 관제에서 중앙귀족을 각 지방에 임명하는 중앙집권적인 5방10군현제(五方十郡縣制)로 했고, 비류백제는 22담로(擔魯: 군현)에 왕실의 자제 종친을 분거(分據)시킨 지방 자치적 담로 제를 취했다.
 
비류백제가 멸망하자 그의 남은 신하들 즉, 담로주들은 형제국가인 온조백제로 자진 귀화했고, 온조백제의 공주 천도 이후엔 더욱 현저해 졌다. 그리고 제주도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학자 판본의종(板本義種)은 이를 5세기적 특색이라고 말했다. 이 시기는 비류백제의 멸망직후부터 온조백제가 공주로 천도(475년)한 직후까지의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일본 고대 중심지 서남지방의 구마모도(熊本)에는 고대 비류백제의 식민지적 담로제(지방군현)가 있었기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다마나(玉名)’는 곧 담로로서 비류백제어인데 ‘다마’는 ‘담’, ‘나’는 ‘라’‘로’와 함께 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오사까만(大板灣)에는 아예 ‘담로’와 일치한 ‘담로도(淡路島)’가 있다.
 
중국문헌 『주서』와 『수서』에 의하면 서기 18년 공주(웅진<熊津>)에 도읍한 비류백제의 사람들이 많이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서부터 백가나 되는 많은 세력이 바다를 건너갔다(初以百家濟海)’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비류백제 세력의 일본진출 내지 일본건국과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본다.
 
이를 더욱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구주에는 7개의 담로(對馬, 壹岐, 伊都奴… 등)가 있었다.’(井上光貞: 『일본국가의 기원』)는 논문을 비롯, 『양서(梁書)』‘백제전’에는 서기 100년경에 이미 구주지역의 키 작은 원주왜인들을 정복하고, 비류백제 왕실의 자제 종친이 담로주로 통치하고 있었다는 등의 사료들이다. 또 『일본서기』(신대기)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음신(陰神)과 양신(陽神)이 부부가 된 후에 아이 낳을 달에 이르러 담로주(淡路洲)를 모태로 대일본을 낳았다.”
 
비류백제의 식민지 담로가 일본 탄생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자체가 이처럼 명백히 증거 해 주고 있다. 이처럼 처음 성립된 통치체제는 담로주(비류백제의 담로)였던 것이다. 그런데 초기 담로를 세운 사람을 숭신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성은구: 『일본서기 역주』‘후기’)
 
응신은 부여후왕 ‘의라’설 유력…부여 풍습 많아
 
이미 언급했듯이 부여인은 북방의 대표적인 기마민족이요, 체구 역시 장대하고 성품이 강인 근면 후덕하여 유사 이래 별로 외적의 침략을 당한 적이 없었다.(『위서』‘부여전’)
 
부여 후왕 의라(依羅)와 그 세력 역시 형제국인 온조백제의 식객노릇에만 머물 수 없었을 것인즉, 그들이 최후로 택한 망명지는 바다 멀리 왜 땅 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응신왕이 부여후왕(곧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 ‘의라’였음을 말하는 단서를 잡게 된다. 그것은 일본 고대 풍습들이 부여의 풍습을 재판한 듯 너무나 같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큰 소매의 두루마기와 넓은 바지를 입는 것 ▲한자리에 모여 술잔을 서로 주고받을 때에 먼저 절하고 물에 잔을 씻어 상대방에게 주는 것 ▲사람을 통해 말을 전할 때 모두 꿇어 앉아 손을 땅에 짚고 조용조용 이야기 하는 것 ▲형이 죽으면 아우가 그 형수와 사는 것 ▲집집마다 투구·갑옷·창이 있는 것 등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