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교(불교)운동-15
인도불교의 영광은 과거의 일이었다. 한 때 인도의 국교로서 모든 인도인의 정신적 귀의처로서 역할을 했던 불교가 이렇게 무참히 사라질 수 있었단 말인가. 유럽(영국)의 지식인들은 인도학(Indology)가운데서도 불교에 주목한 것은, 비록 인도 땅에서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불교가 남긴 정신적 유산에 대해서는 뭔가 탐구해 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지식욕을 자극했다. 게다가 아직도 실론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살아있는 전통으로서 종교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데에 더더욱 인도불교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절실했다. 영국은 실론과 동남아시아에 살아있는 상좌부 전통에, 프랑스는 베트남을 비롯한 중국의 대승불교에, 독일은 인도의 산스끄리뜨 문학에 열광했다. 서구의 불교연구는 2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서구에서 축적된 불교학 연구의 온축(蘊蓄)없이 근대적 학문 방법에 의한 석학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문사철(文史哲)만을 인문학의 본령으로 알고 있는 동양사회와는 다르게 서구의 학문적 태도는 어문사철(語文史哲)을 인문학의 기본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영국은 일찍이 상좌부의 경전어(經典語)인 빨리어와 대승불교의 경전어인 산스끄리뜨어에, 독일은 산스끄리뜨어에, 프랑스는 산스끄리뜨어와 한문 경전어 습득에 집중했다. 불교경전어는 빨리어 산스끄리뜨어 한문 티베트어를 일컫는다. 서구의 학자들은 경전어를 먼저 습득해야 경전을 읽고 연구할 수 있다는 서구의 고전어와 고전연구에서 기인한 교훈을 그대로 불교와 동양의 종교에 그대로 적용했다. 21세기 불교학자들은 영국에서 만든 빨리어 사전과 영국과 독일에서 만든 산스그리뜨어 사전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해있다. 영어나 독일어는 이런 사전류를 읽는 또 하나의 언어장벽이 되고 있다. 일본은 사정이 좀 다르다. 어느 정도 경전어 사전이 일본어로 체계화 되어 있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에서 불교를 수용할 때, 티베트 문자를 창제해서 산스끄리뜨에서 바로 티베트어로 번역했고, 한문 또한 마찬가지로 산스끄리뜨어에서 직역했다. 인도불교를 거론하면서 들먹거리지 않을 수 없는 통로로서의 개요설명이다. 주제의 본론인 인도불교와 카스트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서구인들에 의해서 학문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도불교는 인도 땅에 있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하다가,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드디어 인도인들에 의해서 불교의 진가가 다시 드러나게 된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달리트(불가촉천민)들의 개종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종운동이 일어나기 전, 카스트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지도자는 마하트마 간디 옹이었다. 간디 옹은 어린 달리트를 ‘하리잔’이라고 불렀다. 비슈누의 아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이 용어는 그럴싸하게 들렸지만, 달리트 개종운동의 지도자 암배드까르 박사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자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마하트마 간디 옹은 달리트 어린이들을 ‘하리잔(비슈누의 자식)’이라고 부르면서, 불가촉천민이란 최하위 지정카스트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운동을 벌였고, 비영리단체인 ‘하리잔 세박 상가(Harijan Sevak Sangh: 불가촉천민 공동체의 종)’를 1932년 창립했다. 암베드까르 박사의 요청으로 브리티시 정부에 의해서 달리트의 인도사회공동체에서의 일정한 지위 보장을 위한 분리선거에 마하트마 간디 옹은 인도 힌두 공동체 사회의 분열이라면서 단식까지 하면서 반대투쟁을 벌였고, 1932년 암베드까르 박사와의 뿌나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단식을 중단했다. 암베드까르 박사는 달리트들에 대한 실리적인 권익보호였고, 마하트마 간디 옹은 힌두공동체에 대한 명분론의 대립이었는데, 암베드까르 박사는 힌두에서 불교로 개종을 선언하면서 비슈누의 자식이란 ‘하리잔’을 이념적으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마하트마 간디 옹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의 입장에서 힌두 공동체의 분열을 원치 않았고, 불가촉천민이란 최하층 카스트에 대한 소멸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개종운동이 일어나기 전, 서거했고, 달리트들은 힌두란 종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한 마당에 비슈누의 자식이란 이념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하트마 간디 옹의 추종자들은 간디 사후에도, 하리잔 운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많은 불가촉천민 지정카스트는 이 단체의 도움을 받고 있다.
간디 옹은 힌두교도로서 힌두에 대한 신념이 강했지만, 자이나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서 아힌사(비폭력 무저항주의) 철학을 실천에 옮겼고, 평화의 종교인 불교에 호감을 갖고 이슬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고, 힌두 이슬람의 대립을 원치 않았다. 간디 옹은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며 이슬람교 정치인으로서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 및 대통령을 역임한 무하마드 알리 진나와도 만나서 인도의 독립과 인도건국을 협의했지만, 그는 인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간디 옹의 달리트에 대한 해방론은 인도사회에서는 설득력을 얻고 있었으며, 상당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암베드까르 박사를 비롯한 달리트 지식인들에게는 힌두교 교리 그 자체의 오류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힌두 공동체의 달리트에 대한 완강한 선입견 또한 용해되기 어려운 이념적 갈등이었다. 따라서 달리트들은 불교로의 개종을 선택, 인도 카스트공동체에서의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불교부흥의 한 축으로 발전하고 있다. 인도의 긴박했던 현대사의 급류에서 어쩌면 불교가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현대 인도불교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은 전적으로 달리트와 그들의 지도자 암베드까르 박사의 공이라고 하겠다. (해동불교아카데미 원장)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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