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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태고종 종정 스님의 동안거 결제법어 전문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11/25 [18:06]
“은혜를 잊지 말고 일각도 방일하지 말아야”

조계종· 태고종 종정 스님의 동안거 결제법어 전문

“은혜를 잊지 말고 일각도 방일하지 말아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11/25 [18:06]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이 불기 2559년 을미년 동안거 결제를 앞두고 법어를 내리고 수행납자들의 부단한 정진을 당부했다.
 
진제 스님은 25일 발표한 결제법어에서 “안거를 시작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인 생사해탈의 대오견성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나라만큼 안거제도가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 곳이 없으니 얼마 다행한 일인가. 부처님의 은혜와 시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일각도 방일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어 “이 몸은 100년 이내에 썩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 버리니, 이 몸은 참다운 나가 아니다”며 “참다운 나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까닭에 중생들은 나고 날 적마다 끝없는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스님은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 인가’라는 이 화두를 일상생활에서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일체처일체시에 놓치지 말고 챙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또 “이번 동안거 동안 ‘견성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대신심과 불타는 대용맹심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에 임해야 한다”며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고 의심하여 번뇌와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혼신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조계종에 따르면 이번 동안거에는 전국 100여개 선원에서 2200여명의 수좌스님들이 방부를 들였다. 각 선원별로 11월25일 결제대중들이 모여 각자의 소임을 정하는 용상방을 작성하고, 결제 당일인 26일 오전 10시 방장스님 등의 법어를 청한 후 3개월간 참선 정진을 진행한다.
 
 
조계종 종정 진제 대종사 동안거 결제법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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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德山)스님의 오도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順水使船猶自可<순수사선유자가>어니와
逆風把柁世間稀<역풍파타세간희>라.
雖然好箇擔板漢<수연호개담판한>이나
到頭未免落便宜<도두미면낙편의>로다.
什麽人 恁麽來<십마인 임마래>오?
 
흐르는 물에 배를 띄움은 오히려 쉬움이나
바람을 거슬러 키〔柁〕를 잡음은 세간에 드묾이라.
비록 이 좋은 담판한(擔板漢)이나
마침내 편의(便宜)에 떨어짐을 면치 못함이로다.
어떤 분이 이렇게 옴인고?
 
금일은 동안거 결제일 이라.
이 삼동구순(三冬九旬)결제 동안 모여서 안거(安居)를 시작함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자연의 이치처럼 인간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세월의 흐름만 한탄하게 될 것이니, 대중이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인 생사해탈의 대오견성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안거제도가 제대로 이어오고 있는 곳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얼마나 수행하기 좋은 곳인지 생각한다면 부처님의 은혜와 시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일각(一刻)도 방일(放逸)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
 
이 몸은 100년 이내에 썩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 버리므로, 이 몸은 참다운 나가 아니다. 참다운 나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까닭에 중생들은 나고 날 적마다 끝없는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 인가?“ 이 화두(話頭)를 일상생활 가운데에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일체처일체시(一切處一切時)에 놓치지 말고 챙겨야 할 것이다.
 
화두를 지어가는 사람은 부지기수 임에도 어찌하여 일념삼매(一念三昧)를 지속하지 못하고 대오견성(大悟見性)을 하지 못하느냐?
중생(衆生)은 낙동강 모래알의 숫자만큼이나 무한한 전생(前生)의 중생습기(衆生習氣)가 태산(泰山)같이 쌓여있기 때문이니, 반딧불 같은 신심과 용기로는 수 천생, 수 만생을 수행한다 해도 불가능하니,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시비장단(是非長短)을 모두 내려놓고 견성(見性)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대신심(大信心)과 불타는 대용맹심(大勇猛心)을 내어 간절(懇切)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고 챙기고 의심하여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혼신(渾身)의 노력을 쏟아야 함이로다.
 
그렇게 정성껏 잡도리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두가 익어져서 밤낮으로 흐르고 흐르다가 문득 참의심이 발동이 걸리게 되는데, 그때는 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있어도 밤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 며칠이 지나가는지 몇 달이 지나가는지 모르게 되니, 이것이 일념삼매(一念三昧)인 것이다.
이처럼 일념삼매가 시냇물이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지속될 때, 홀연히 보는 찰나에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나게 됨이로다. 그리하면 어떠한 법문에도 석화전광(石火電光)으로 바른 답이 흉금(胸襟)에서 흘러나와 여탈자재(與奪自在), 살활종탈(殺活縱奪)의 수완을 갖추고 억겁세월(億劫歲月)이 지나도록 진리의 낙을 수용하며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 천하를 횡행(橫行)하는 대장부(大丈夫)의 활개를 치게 됨이로다.
 
덕산(德山)스님은 중국 북방(北方)지역 사찰에 거주하면서 일생 금강경(金剛經)을 독송(讀誦)하고 금강경 주(註)와 소(疎)로 일관하여 금강경에 달통한 스님이었다.
하루는 덕산스님이 “남방(南方) 선지식들로부터 들려오는 말들이,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곧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룸이라 하니, 이러한 말이 어찌 있을 수 있느냐? 내가 남방에 가서 모든 남방 선지식들을 일봉(一棒)으로 때려서 벙어리가 되게끔 하리라.”
굳게 다짐하고 북방을 출발하여 남방으로 향하였다.
여러 달을 걷고 걸어서 남방의 용담사(龍潭寺) 부근에 이르러니, 점심때가 되어 요기(療飢)를 하려고 사방을 살피던 중 노변(路邊)에 빵을 구워 파는 노보살이 있기에 다가가서,
“점심 요기를 좀 합시다.”하니,
그 빵 굽는 노보살이 물었다.
“스님 바랑 속에 무엇이 그리 가득 들어 있소?”
“금강경 소초(疎秒)입니다.”
그러니 노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금강경의 한 대문(大文)을 물어서 답을 하시면 점심을 그냥 대접할 것이고, 만약 바른 답을 못하면 다른데 가서 요기를 하십시오.”
하니, 덕산스님이 자신만만하게 물으라고 하였다.
노보살이 금강경 한 대문을 들어 묻기를,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심(過去心)도 얻지 못하고, 현재심(現在心)도 얻지 못하고, 미래심(未來心)도 얻지 못한다’ 하니, 스님은 과거심에다 점을 치시렵니까〔點心〕, 현재심에다 점을 치시렵니까, 미래심에다 점을 치시렵니까?”하니,
그 물음에 덕산스님이 벙어리가 되어 답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이에 노보살이 말하기를,
“약속과 같이 바른 답을 못했으니 다른데 가서 요기를 하십시오. 그리고 10리쯤 올라가시면 용담사(龍潭寺)라는 큰 절이 있으니 용담선사(龍潭禪師)께 가서 불법(佛法)을 물으십시오.” 하였다.
 
그러면 이 보살은 어떤 보살이냐? 큰 용기와 신심으로 남방 마구니들을 한 방망이 때려서 벙어리로 만들겠다는 북방 덕산스님의 그 용기와 큰 그릇됨〔器〕을 아시고 문수보살이 빵 굽는 보살로 나투시어 접인(接引)한 것이다.
요기도 못하고 노보살에게 방망이를 맞고는 곧장 용담사를 찾아가 용담선사 방문 앞에 이르러 말하기를,
“용담이라 해서 찾아왔더니, 못〔潭〕도 보이지 않고 용(龍)도 나타나지 않는구나!”하니,
용담 선사께서 그 말을 듣고 문을 열고 나오시면서,
“그대가 친히 바로 용담(龍潭)에 이르렀네.”
하고 방으로 맞으셨다.
밤이 늦도록 대담을 나누다가 덕산스님이 객실(客室)로 가기 위해 방을 나오니, 밖이 칠흑(漆黑)같이 캄캄하여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으므로 다시 방문을 열고 ,
“사방이 칠흑 같습니다. 불을 좀 주십시오.”
함에 용담 선사께서 용심지에 불을 붙여 주니, 덕산스님이 그것을 받는 순간 용담 선사께서 입으로 불어 불을 꺼버리셨다. 불을 끄는 이 찰나에 덕산스님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이후로는 천하 도인의 언설(言說)을 의심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거기서 크게 진리의 눈이 열린 것이다.
뒷날 아침에 용담 선사께서 대중방(大衆房)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우리 대중 가운데 이빨은 칼날과 같고 입은 피를 담는 항아리와 같은 이가 있나니, 그가 몽둥이로 때리면 머리를 돌이키지 못하느니라. 이후에 고봉정상(孤峰頂上)에서 나의 가풍(家風)의 도를 세워 가리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조심하고 조심하라!”
하셨다. 그런 후에 덕산스님이 법당 앞뜰에서 금강경 소초에다 불을 댕기면서 말하기를,
“모든 현현(玄玄)한 웅변으로써 진리의 법을 설한다 해도 한 터럭을 허공중에 날리는 것과 같음이요, 모든 세상의 요긴한 기틀을 다하더라도 한 방울 물을 큰 골짜기에 던지는 것과 같음이라.”
하고 금강경 소초를 불살라 버리고 용담 선사께 예배하고 떠났다.
 
시회대중은 덕산선사를 알겠는가?
덕산선사를 알기 위해서는 각자의 화두를 성성(惺惺)히 챙겨서 일념이 지속되는 과정이 와야 천불만조사(千佛萬祖師)와 더불어 동참하리니 모든 대중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할지어다.
 
필경에 덕산선사를 알겠느냐?
 
=양구(良久)하시다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하여 이르시기를,
 
萬仞峯頭坐 <만인봉두좌>하여
呵佛罵祖 <가불매조>나
脚下數三尺 會也麽<각하수삼척을 회야마>?
 
만 길이나 되는 높은 산봉우리에 앉아서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짖음이나
다리아래 두 자, 석 자가 됨을 아느냐?
 
-주장자(拄杖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

 


태고종 혜초 종종의 동안거 결제법어 전문
 
한편 태고종 혜초 종정도 24일 동안거 결제 법어를 발표했다.
다음은 태고종 혜초 종종의 동안거 결제법어 전문
 
세월의 흐름은 한 치의 양보 없이 금년에도 동안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은 항상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 되어서 능히 온갖 묘함을 갖추고(常爲諸佛之師 能含衆妙), 언제나 현인들의 어머니가 되니 가히 유현하다고 할 만합니다(恒作羣賢之母 可謂幽玄).
이러하니 이 마음이야말로 깊고 깊어서 도저히 알기 어려운 그야말로 현묘(玄妙)하고, 현미(玄微)해서 심원(深遠)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처럼 심원한 불교의 우주관적 마음세계는 과학적 관점에서도 소립자(素粒子) 물리학자들의 견해인 “모든 입자는 서로 다른 입자를 만드는 데 도와주는 소위 ‘자체조화(自體調和)’ 속에서 일종의 우주 그물을 짜고 있다.”는 구두끈 이론에서 그 상관 관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화엄경』에 나오는 인드라 하늘에 있는 진주 그물의 비유는 소립자 물리학이 나오기 2,500여 년 전에 인간의 마음을 탐구함으로써, 창조되어진 최초의 끈 이론 모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처럼 과학과 불교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의 유사한 사유방법으로 인하여, 불교의 위대한 사상체계(思想體系)가 현대과학의 인식체계를 통하여 여실하게 예증(例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신앙체계는 용심(用心)을 통해 안심(安心)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 마음수행을 요구하고 있기에 불자라면 누구나 수행자다운 고고한 인격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업연에 의한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기본적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수용하는 인고(忍苦)의 노력 또한 절실히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깨침을 향한 수행자라면 할절신체(割節身體)의 고통도 인욕바라밀로 견디신 석존의 수행이력을 깊이 되새겨 수행정진에 한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안거에 들어가는 수행납자들에게 당부할 말씀은 내 마음을 도둑질하는 대상을 찾고, 그 마음을 잘 단속하여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의 동요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면 마구니들이 감히 그 마음을 훔치려고 달려들 수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唯心淨土 別無地 오직 마음의 정토만 있을 뿐 따로 부처님 세상은 없고,
自性彌陀 何異形 자성미타가 어찌 다른 모습이겠는가.
衆生迷此 在塵中 중생이 미혹하여 티끌세상에 있으니
是故能仁 開淨土 이런 까닭으로 석존께서는 정토를 여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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