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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기행①동서 문명 교섭사의 간선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6/02/04 [09:28]
동서양에 막대한 영향 미친 크나 큰 역사적 유산 실크로드

실크로드기행①동서 문명 교섭사의 간선

동서양에 막대한 영향 미친 크나 큰 역사적 유산 실크로드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6/02/04 [09:28]

▲ 실크로드의 주요 노정.     © 매일종교신문

실크로드는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해주는가. 한반도는 실크로드 선상에서 변방이었는가 아니면 실크로드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한 주역이었던가. 한반도는 적어도 간선은 아니었지만, 실크로드 선상에서의 연장된 지선(支線)이었으며 일본열도까지 이어주는 통로였다고 본다. 21세기에 다시 부상하는 신(新) 실크로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해상실크로드는 또 우리와의 어떤 관련을 갖는다고 보는가. 분명 중국은 동쪽 실크로드선상의 주역이었음은 역사적 사실이었고, 21세기 신 실크로드의 ‘일대일로(一帶一路)’란 기치아래 주역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3년간 중국을 경유하여 중앙아시아 등지의 옛 실크로드 선상의 여러 곳을 탐방해 왔다. 내가 주목한 것은 주로 불교적 관점이었지만, 나는 실크로드를 탐방하면서 역사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의 경험으로 간직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것 같아서 부족하지만 관심 있는 분들과 공유하기로 작정하고, 이 기행을 글로 옮기기로 했다.
 
실크로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실크로드가 남긴 역사적 유산이 너무나 크고 그 영향이 동서 양쪽에 막대하게 미쳤기 때문이라고 본다. 실크로드를 통해서 서(로마)와 동(중국)은 무역 문화 등 다방면의 교섭을 함으로써 인류문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1세기인 현대에도 실크로드는 여전히 동서 교섭의 한 축으로서 새로운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관심의 대상이라고 보며, 또한 옛 실크로드를 다시 떠올려 보는 것도 재미있는 지적 여행이 아닐까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엮어보고자 한다.
 
나는 이 기행을 작성하면서 주로 영문과 한문 자료에 의존하고자 하며, 무엇보다도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실크로드 기행’을 쓰려고 하는데, 사실, 근대에 와서 실크로드 연구는 구미(歐美) 탐험가나 학자 여행가들에 의해서 개척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중국의 학자나 연구자들에 의해서이다. 중국은 최근 정부차원에서 신 실크로드의 ‘일대일로(一帶一路)’를 구축하면서 경제 산업이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음은 물론 학술적 프로젝트 또한 적극 지원하고 있는 듯했다. 중국은 특히 서부개발이란 명목아래 실크로드의 간선인 신장성 자치지역에 집중투자하고 있으며, 육상 실크로드 뿐 아닌 해상실크로드를 포함한 ‘일대일로’의 대형 프로젝트를 정책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21세기 신 실크로드는 중국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구축하고 있고, 육상 해상 실크로드 선상의 나라들은 직간접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과 경제적으로 협력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 실크로드 구축의 현실은 이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과거의 실크로드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문명사적 지적 탐구에 호기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데에 주목하면서 기행을 엮어가고자 한다.
 
그러면 실크로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까지였나이다. 대체로 실크로드에 대한 역사학자나 연구가들은 기원전 114년에서 1450년까지로 상정하고 있다. 이 타임라인은 해상 실크로드까지를 포함한 기간이다. 실크로드는 실크루트라고도 하는데, 중국과 인도에서부터 지중해에 걸친 아시아 대륙의 여러 지역을 통해서 동서간의 문화의 상호작용인 무역 로(路)의 고대 네트워크였다.
 
실크로드(비단 길)란 이름은 중국의 비단에서 유래했다. 비단무역은 매우 수지 맞는 무역이었다. 비단을 운반하는 일은 다소 먼 길을 가야하는 무역이었지만, 제법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여서 더욱 발전되었다. 비단 무역은 중국 한나라(기원전 전 207-기원후 220)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실크로드 선상에서 이른바 서역이라고 알려진 중앙아시아 구역은 기원전 114년부터였다. 서역 무역 로가 개척된 것은 장건(Zhang Qian 張騫200-113BC)이란 한 제국의 사절에 의해서였다. 장건은 한 제국의 관료며 외교사절이었다. 그는 한나라 때, 한나라 밖의 서역인 다른 나라에 외교 사절로 가서 길을 개척한 사람으로 서역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한 나라 조정에 많이 가져왔고, 한 무제(漢武帝 刘彻 156-87, 재위 140-87 기원전)의 특별한 관심과 명령에 의해서 그는 오늘날 신장성으로 알려진 지역을 식민화하고 정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 한나라 무제로 알려진 전한의 7대 황제인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156-87 기원전).     © 매일종교신문

한(漢, 기원전 206년-220년)은 진(秦) 이후의 중국의 통일 왕조였다. 한 왕조는 고조 유방(劉邦)에 의해서 건국되었으나, 한나라는 섭정이었던 왕망이 세운 신에 의해 잠시 맥이 단절되기도 했다. 한나라는 서한(기원전 206년-9년)과 동한(25년-220년)으로 나뉜다. 약 400년을 지속하였으며,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고, 오늘날에 중국인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한족 역시 이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장건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한 나라에 대해서 좀 더 부연설명을 해보자. 한나라는 중앙 정부에 의해 직접 통치된 군과 몇 개의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원전 200년에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동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흉노족이 한나라 군대와 싸워서 승리했다. 전쟁에서의 패배에 따라 한나라는 전쟁보상금을 지불하고 명목상 공주가 예물을 가지고 흉노 선우와 결혼하는 형태의 동맹조약을 맺게 되었다.  
 
▲ 장건이 한 무제의 전송을 받으며 서역으로 떠나는 장면(138-126기원전)으로, ‘장건 출사 서역도’로 알려진 둔황, 막고 굴 제323굴 북벽의 벽화로 당 나라 초기(618-712)작품.     © 매일종교신문

그러나 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흉노족은 한나라의 국경을 계속해서 침입했고, 무제는 전 방위로 흉노를 압박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약 30년간의 전쟁으로 흉노는 크게 패하여 급속히 피폐해졌고, 한 무제가 대외원정을 위해 개정한 법안을 악용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한 호족들에 의해 한나라는 땅을 잃고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생겨났다. 이 전쟁으로 인해 흉노족은 외몽골 북쪽으로 밀려났다. 그 후에 흉노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고, 흉노의 지배를 받던 선비족과 오환 족이 독립하여 남흉노와 함께 한나라에 책봉을 받고 조공하는 위치가 되었다. 하지만 흉노는 계속 한나라를 괴롭혔고, 이에 월지와의 협력으로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서 장건은 서역으로 향했으나 오히려 흉노에 포로가 되어 10년 만에 장안으로 서역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귀국했다. 이로써 서역 개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중국 바오지 법문사(2014년)에서 개최된 세계불교도우의회 27차대회. 법문사는 서안에서 하서 주랑으로 나아가는 실크로드선상에 있으며, 부처님 가운데 손가락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 매일종교신문

필자는 2013년부터 중국 내몽골 신장성 파미르 중앙아시아 등지를 탐방하면서 실크로드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으고 3년간의 집중적인 리서치를 하면서 실크로드에 매료되었고, 이후 실크로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번에 실크로드 기행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치란 해동 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 세계 불교도우의회 중국 바오지 법문사 총회에서 한국대표단과 함께한 필자 이치란 박사(좌).     © 매일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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