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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는 오직 일사각오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신사참배 거부 죽음으로 맞선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 ‘일사각오’
기사입력: 2016/03/22 [15:01]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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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 죽음으로 맞선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 ‘일사각오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다. 내 앞에는 오직 ‘일사각오’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에 반대해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끝까지 저항한 주기철 목사. 한국기독교의 상징적 인물인 동시에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로 여겨지고 있는 그는 47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獄死)하며 유일하게 남긴 유산은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네 글자로 대표되고 있다.
 
3월17일 개봉한 영화 ‘일사각오’는 오직 믿음으로 거대한 일제 권력에 맞서 싸운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주기철 목사의 삶을 통해 ‘식민지 역사’를 관통하고, 13살 아들의 눈으로 본 ‘인간 주기철’을 조명한다.
 
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한일(韓日)강제 합병으로 ‘나라’를 잃은 13살이었고, 목사 안수를 받던 1925년에는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이 세워졌다. 이후 황국신민화 정책을 내세운 일본이 천황이 사는 곳을 향해 절하는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에 일사각오의 전신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은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마흔 일곱 살의 나이로 순교한다. 영화는 종교적 신념을 넘어 범인류적 ‘정의와 신념’의 의미를 묻는 동시에 한국기독교의 독립 운동사를 보여준다.
 

아버지 주기철은 나이 13살에 ‘나라’를 잃고 ‘하나님’을 만났지만, 아들 주광조는 나이 13살에 ‘아버지’를 잃고 ‘하나님’을 등졌다. 역사는 주기철을 독립 운동가이자 순교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아들 주광조는 “내 아버지는 그저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공식적 역사가 기록하지 못하는 인간 주기철의 고뇌와 번민, 갈등을 13살 아들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2015년 성탄절에 KBS ‘다큐1’을 통해 방영돼 큰 감동을 주었던 ‘일사각오 주기철’이 3월17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됐다. ‘일사각오’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이면서 항일운동가인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KBS가 제작하고 기독교 영상 사역기관인 파이오니아21연구소(소장:김상철 목사)가 배급했다.
 
영화로 개봉되는 일사각오는 KBS 방송 때는 공개되지 않았던 미공개 신들이 대거 포함됐다. 주기철 목사가 평양신학교 시절에 스승 조만식과 물산장려운동을 벌이는 장면, 부산 초량교회 시절 가난한 어린이들의 허기를 달래고 교육사업에 힘쓰는 장면, 박준관 장로와 안이숙 여사가 일본 제국의회에 들어가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투척하는 장면 등이다.

영화 ‘일사각오’는 지난 2월 중순 서울지역 시사회를 시작으로 부산과 광주, 극동방송, 안산, 대전, 구미 등 전국에서 시사회를 열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전국 교회는 물론 고등학교 학생들의 단체 관람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애와 신앙
 
2002년 3.1절을 맞아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 뉴스가 하나 있었다. 38년간의 치욕적인 일제(日帝) 강점기 동안 친일행각을 벌인 인사들의 명단이 발표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문화, 예술, 경제, 언론, 학계 등 각계각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고 친일(親日)로 돌아섰지만, 반대로 또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나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일제 강점기 동안에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지도자요, 한국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수호운동을 선도하다가 마침내 일제에 의해 고문 끝에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역사상 보기 드문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일단 시련이 닥쳐왔을 때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풍전초개(風前草芥)와 같이 쓰러지고 마는 것은 실로 유감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순교의 피를 주의 제단에 쏟아 부은 충성된 주의 종들이 새벽하늘의 별처럼 남아 있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애』 서문 중에서)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나라 안팎에서 순교는 필요하다. 지금도 시대와 나라에 맞는 넓은 의미의 순교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때처럼 고문 형태의 죽음과는 다르겠지만 순교 정신만큼은 어느 시대나 같을 것이다.
   
◆학생 주기철과 민족정신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는 1897년 11월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에서 아버지 주현성 장로와 어머니 조재선 여사 사이에 4남 3녀 중 4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였다. 기복은 8세 때 개통학교(開通學校: 1906년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에 설립되었던 근대 교육 기관)에 입학했다. 나이도 어리고 몸도 허약하였지만 성적은 월등하게 뛰어나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동(神童)이라 불리기도 했다. 

▲ 주기철 목사의 생가     ©
 
기복이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큰형 기원이었다. 기원은 웅천읍에다 조그마한 교회당을 세웠다. 그래서 기복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기복이 개통학교에 다닐 때 약관 20세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부산 지구로 순회강연을 나왔다가 부산에서 마산으로 가던 중에 우연히 웅천을 들르게 됐다. 개통학교에 들러 그는 “학문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니 젊은이들이 열심히 배우고 나라를 다시 찾아야 우리들의 미래도 열린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오산학교를 소개했다. 변절하기 이전이었던 춘원의 이때 강연은 나라 잃은 서러움과 일제의 탄압에 대한 분노를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어린 기복은 춘원의 애국 강연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됐다. 춘원의 강연을 들은 기복은 뜨거운 마음으로 결심했다.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는 기복의 고향에서 1500리 길이나 되는 먼 길이어서 가족이 반대했지만 기복은 굽히지 않고 사촌형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기 전에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다.
 
주기철은 춘원은 강연에서 국가와 민족에 대한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고, 이는 후에 그가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가게한 동기가 됐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장로와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장로,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 등과 같은 민족의 선각자들의 지도하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교육을 받게 됐다. 그에게 있어 오산학교에서의 학창시절은 기독 신앙인으로서 일제에 저항하는 것이 민족과 교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며 깨닫는 계기가 됐다.
 
항일 민족지도자들과 만남과 목사가 되기까지
 
1916년 19세에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항일 민족지도자 남강과 고당의 권유에 따라 헐벗고 굶주리는 민족을 배불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기철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더욱 심해져 공부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리고 큰형 기원이 운영하던 염전과 어업, 양조장이 한꺼번에 기울어져 재산 상속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 웅천으로 돌아와 웅천교회의 집사로서 봉사하는 동시에 야학과 청년운동에 힘을 쏟게 됐다.
 
당시 일제는 한국 청년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총독부의 세입 증대를 위해 도시마다 홍등가를 만들고 공창제(公娼制)를 운영하는 한편, 아편 재배를 허용하고 담배생산을 장려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일제의 계략에 대해 성도들에게 금주와 금연을 강력하게 권면했고, 일제는 이러한 운동의 선봉에 섰던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구금함으로 한국교회를 핍박했다. 더욱이 1917년 그가 존경하던 춘원 이광수의 변절과 춘원이 공개적으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본 주기철은 한국교회와 또 민족에 대한 생각을 더욱 깊게 하게 됐다.
 
그런 가운데 상속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고 눈도 치료가 되어 이기선 목사가 소개해준 안기영의 막내딸 안갑수와 결혼했다. 하지만 큰 소망과 기대 속에 열망하며 일어났던 1919년에 일어난 3.1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가정의 행복 속에 빠져있지는 못했다. 많은 크리스천들 역시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실망감에 교회를 세웠던 큰 형도, 작은 형도 교회를 등졌다. 교회에서 십여 년이나 봉사하던 형들이 불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면서 기철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 첫아들 영진이가 돌이 될 무렵, 마산 문창교회에서 한국최초의 부흥사인 김익두(金益斗) 목사를 모시고 부흥 사경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기철의 가슴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분출했다. 이로 인해 주기철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1920년 3월30일자 <동아일보>에 ‘부산진교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이적이 나타났다’는 기사를 접하면서부터였다. 이 기사를 본 주기철은 당시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렸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에 친구들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그의 생애동안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울면서 회개하는 사람, 병 고침을 받았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 방언이 터진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고 모두들 기도에 매달리는데, 기철과 친구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답답해했다. 그러다 셋째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예배당은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다.
 
▲ 마산 문창교회     ©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귀머거리가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요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집회 도중에 그는 자신을 압도하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느끼면서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됐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없이는 그 자신이 너무도 나약한 피조물이요, 죄인일 뿐임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나서려고 하는 자신이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인가 하는 깨달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해 11월1일 기철과 그의 친구들은 신학생이 될 것을 결심했다. 동시에 그는 불의와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주독립과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 또한 어떤 능력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리하여 그는 회개와 헌신의 마음으로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신학공부를 시작해 19회로 졸업하게 됐다.
 
 주기철은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는 이국땅에 와서 고스란히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엔 뜨거움이 솟구쳐 오르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려졌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둘째 아들 영만과 셋째 아들 영묵이 태어났다. 기철은 자식이나 아내를 호강시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갈 수가 있을까? 세 아들과 아내와 어머님을 이끌고 나는 목회자의 길을 가야했다.’
 
1925년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26년 1월1일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게 됐다. 1933년 5월19일 돌연 안갑수 사모는 큰언니 장례를 치르고 심신이 피곤한 가운데 인중에 난 종기를 수술한 것이 잘못되어 소천(召天·타계)했다. 이후 주기철 목사는 1936년 여름 평양의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초빙 받게 됐고 이 교회는 그의 순교적 항일 투쟁에서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된다.
 
▲ 일사각오의 한 장면     ©

당시 평양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로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많은 기독교 신도들과 교회들이 있었으며, 특히 산정현 교회는 그런 평양에 있는 개신교회들 중에서도 단연 중심이 되는 교회였다. 산정현 교회는 일제의 탄압에서 그와 같은 평양과 기독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조만식 선생을 보내어 주기철 목사를 초빙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6년 7월, 새로운 목사를 맞이하는 산정현 교회는 잔치 분위기였다. 산정현 교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총본산으로 자타가 공인할만한 교회이고, 중산층을 웃도는 식자들이며,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교인이 되는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길 만큼 특수층을 수용한 교회였다.
 
주기철 목사는 신앙은 조국이나 민족을 초월한 절대 절명의 것이어야 하며, 민족운동을 위한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조국 해방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과 신앙의 민족사적 결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다음에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산정현 교회 교인들에게 밝히 전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을 산정현 교회로 부르신 뜻은 다만 한 가지, 주님이 머릿돌 되어 세우신 교회를 끝까지 지키라는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총독부는 곧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잡아 끌어내어 신사참배를 하도록 갖가지 계책을 쓸 것입니다. 감언이설, 강제, 위협, 자신들의 법으로 온갖 방법을 휩쓸어 올 것입니다. 신사참배가 총칼이 아니니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생명을 잃느냐 지키느냐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하게 되는 절대 절명의 사건이요, 시험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민족을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심이요 시험하시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험을 통과한 뒤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산정현 교회의 소명은 이 땅의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라 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전했다. 기도와 성경에만 열중하고 구제에도 열심히 했던 주 목사의 관후하고 온유한 인격은 전 신도들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영력, 사랑, 학식이 모두 구비돼 있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과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더욱 노골적이고 억압적인 방법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인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만들고자하는 정책을 펼쳤다.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재임 1936~41)는 부임하면서부터 조선인들의 목을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다. 부임하기 전에 조선을 일본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대로 본때를 보일 속셈이었다. 총독부는 소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정해 외우게 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했고, 관공서와 각급 학교에 ‘일본천황의 사진, 일장기, 일본 국가를 인쇄한 액자’를 배급하여 매일 경배하라고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조선인들에게 신도(神道)의식에 참여하도록 법을 제정하고 신사참배를 의무화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조선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했다.
 
‘신사(神社)’란 원래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의 제사장소로서 일본 역대 천황과 나라를 위해 순국한 군인들과 조상들의 위패를 한 곳에 모아놓고 참배하는 사당을 말한다. 신사참배는 조선인들의 민족정신 말살정책과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에 의해 조선인들에게 천황숭배와 내선일체(內鮮一體: 조선과 일본의 하나됨)를 강요하는 폭압적 수단으로 활용됐다.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조선 전국에 신궁(神宮) 2곳, 신사 77곳이 세워져 있었고, 면 단위에 세워진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이 있었다. 심지어 일제는 각 가정에까지 일본의 개국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까미(天照大神)'를 받드는 가미다나(일명 신책(神棚))를 두어 그것을 보면서 신사참배를 하게 했다. 한국 기독교는 처음에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한민족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본의 계책임을 알고 산발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구속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를 폐쇄했으며,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목사들을 내세워 교회들을 다니며 찬성 설득 강연을 하게 함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과 강요를 이기지 못한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하게 되면서 점차 노회들도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됐고, 마침내 1938년 9월 한국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가결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1938년 9월9일 평양 서문밖 교회당에서 열린 제27회 한국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되어온 목사, 장로, 선교사 등 총 223명의 총회 대의원들이 모여 총회장소 안팎을 둘러싼 97명의 일본 경찰의 감시아래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때, 총회장은 신사참배안이 상정되자 가부를 묻지 않은 채 서둘러 신사참배의 가결을 선포하려 했고, 이에 항의하는 몇몇 선교사들과 총대들이 그 불법성에 항의하자 이들은 곧 총회장소를 둘러싸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밖으로 끌려 나오게 됐다. 이러한 일제 만행에 맞서 주기철 목사는 이미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에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가결케 함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 했다.
 
1935년 9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개최됐던 선교 50주년기념 부흥사경회에서 행한 ‘일사각오(一死覺悟)’를 주제로 요한복음 11절16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의 대지(大旨)는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남을 위해서의 일사각오 ▲부활 진리를 위해서의 일사각오였다.
 
이 설교에서 주 목사는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예수를 환영하던 한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고 외침으로 한국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어나 일제의 압박에 항거할 것을 요청했다. 같은 해 금강산에 있는 장로교 수양관에서 수양회가 열렸다. 장로교 총회의 모든 목사와 선교사 200명이 모여 조선교회의 당면문제며 과제를 두고 기도하면서 의논하기로 했는데, 거기서 주 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마3:1-13)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엘리야의 권위, 예레미야의 권위, 세례 요한의 권위는 일사각오 연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을 못하십니까? 우리가 왜 벙어리가 되었습니까? 오늘날 목사도 일사각오를 한 후에 할 말을 해야만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인데 우리가 아무 까닭 없이 일본의 한낱 순경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되겠냐고 했다. 여기서 그의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또한 한국교회의 신앙의 순결을 위한 신앙정신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드러내어 보여 주었다
 
투옥과 순교
 
1938년 2월8일 산정현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고 헌당식을 드리는 당일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를 평양 경찰서에 검속했다. 앞서 53회 평북노회가 열린 날이 2월7일이었다. 평복 노회에서 김일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친일파 앞잡이가 목사가 되어 노회장이 되고 조선교회의 신사참배 안건이 통과되었다고 울분과 흥분으로 김일선 목사의 졸업 기념식수를 뽑아버리고, 돌 푯말까지 깨뜨렸다. 그런데 이 일을 주기철 목사가 사주했다며 형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주 목사를 끌고 갔다.
 
▲ 평양 산정현 교회     ©

 교인들은 새파랗게 질렸고 형사를 붙잡고 말리다가 탄식하는 조만식 장로를 보고 주 목사는 웃음을 머금으며 뒷일을 부탁했다. 학생들 10여명, 산정현교회 교인들까지 검속해 들인 후 2월9일 조선의 공교로서는 처음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한 치욕의 날이었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렇게 잡아들인 것이다.
 
이로써 주기철 목사는 1944년 순교하기까지 5차례에 걸쳐 총 5년4개월간 계속되었던 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관련한 투옥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감옥에서 일제의 고문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었다. 고춧가루를 푼 뜨거운 물을 코에 부어 넣는 고문으로 식도가 부어 식사는커녕 숨쉬기조차 힘들게 만드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알코올을 먹인 심지를 성기 요도에 쑤셔 넣음으로 요도가 붓고 소변을 볼 때면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랫배의 통증으로 뒹굴게 만드는 성기고문도 당하였다. 그러나 그런 무지막지한 고문과 그로 인한 고통가운데서도 주 목사는 찬송하면서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함으로 일제의 고문에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일제에 대한 항거를 계속하였다.
 
1940년 2월5일 주일 아침 평양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기철 목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잠시 석방되어 평양 산정현 교회로 돌아온 주 목사는 주일날 그가 입던 옷 그대로 강단에 섰고 소문을 듣고 달려온 성도들로 산정현 교회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 예배 시간이 되자, 평양 대동과 선교리의 3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들이 산정현 교회로 몰려들었다. 2000여 명이 집결한 자리였으나 숨소리 한 가닥 들리지 않았다. 이날 주기철 목사는 ‘5종목의 기도’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서도 나와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신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저는 모든 것을 잘 견디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7개월 동안 저는 5종목의 기도가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사람을 위협하는 마귀가 최대 무기인 듯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 주님! 이 목숨 아끼다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겪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사랑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그 젊음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게 하소서.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단번에 겪는 고난은 이겨내기 쉬우나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가 힘이 듭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저처럼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주어지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하랴.
 
 세 번째는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나에게는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와 아직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 태어나 자식의 의무도 중요하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식들의 아비가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을, 병든 아내를, 어린 자식들을, 불안해하는 양떼를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인도하시며,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당신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을 얽어맨 인정의 줄이 나를 얽어매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부모나 처자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합당치 않다고 하셨으니 저로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네 번째는 ‘의(義)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십시오’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목사가 되어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죽음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다섯 번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혹여 옥중이나 사형장에서 저의 목숨이 끊어질 때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저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저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 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저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시옵소서. 저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이는 주기철 목사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늘 하던 다섯 가지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설교한 것으로 그의 유언적 설교가 되었다. 눈물바다를 이룬 산정현교회 예배당에서 그날 그 자리에서만은 모든 사람이 하나였다. 일본의 앞잡이로 손가락질 받던 조선 형사들까지 눈물을 머금었다.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투철한 신앙과 민족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마침내 1944년 4월21일 금요일 밤 9시30분경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란 마지막 말을 남기며 비록 몸은 온갖 고문으로 찢겨졌지만, 얼굴에는 천국의 소망으로 인한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평양 형무소에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운명을 다하였다.
 
다음의 글은 그의 유언적 설교의 한 부분으로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과 영광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遺産)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수암(守岩) 문윤홍·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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