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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9

담선(談禪)공부 모임 | 기사입력 2016/05/01 [23:42]
법회록 3●‘깨어 있다’는 것은 무의식적인 삶에 종지부 찍는 것

통찰! 天問天答 19

법회록 3●‘깨어 있다’는 것은 무의식적인 삶에 종지부 찍는 것

담선(談禪)공부 모임 | 입력 : 2016/05/01 [23:42]
통찰! 天問天答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세 번째 법회록에서는 세 번째 법회록에서는 “‘깨어 있다’는 것은 무의식적인 삶에 종지부 찍는 것”이며 “꿈을 깨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담선(談禪)공부 모임>


‘깨어 있다’는 것은 무의식적인 삶에 종지부 찍는 것
 
법회록(法會錄) 3 
 
수행자들께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 과연 이 말이
가리키는 바가 뭘까요? 항상 ‘깨어 있는다’는 게 과연 뭘까요?
 
이 ‘깨어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무의식(無意識)적인 삶이라 하는 것이 과연 뭘까요?
그냥 말 그대로 이야기하면 의식적이지 못한 삶이지요.
 
자, 보세요.
삶에 대해서 의식적인(意識的)인 삶과 무의식적인 삶으로 나누어 보자고요.
그렇다면 어떤 삶을 의식적이라 하고, 또 무의식적이라 하냐 하면, 지금까지
공부한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서 사는 삶을 의식적인 삶이라 보고,
자신에 대해서 오해(誤解)를 가지고서 사는 삶을 무의식적인 삶이라 보자고요.
 
우리가 꿈을 꾼다는 것은, 예를 들어서 우리가 꿈을 언제 꿉니까? 어렵게 생각 할
게 아니라 꿈은 잠을 잘 때 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꿈을 가진다는 것, 꿈을 꾼다는 자체가 이미 무의식적이라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뭘 원한다는 것, 뭘 바란다는 것, 뭘 희망한다는 것, 이런 것 자체가
전부 다 무의식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꿈은 잠을 잘 때 꾸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꿈을 꾼다는 것,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 꿈을 희망한다는 것은 전부 다
무의식적이라는 것입니다. 이해 가세요?
 
이 무의식적인 삶에 자기 스스로 종지부를 찍을 때, 그것이 의식적인 삶이고,
그것은 다시 말해서 ‘깨어있는 것’ 입니다.
그러면 ‘깨어 있다’는 것, 다시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미련을 가지지
않으며, 여한 또한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자는 스스로 구족(具足)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구족하기 때문에 어떤 꿈도 꾸지 않는다는 거예요.
향하고 바란다는 것은 전부 잠 속에서 꾸는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 꿈은 무의식 상태에서 꾸는 것이고, 잠을 잘 때 꾸는 것이고, 깨어 있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삶이던 간에 미련이 있고 여한이 있고 아쉬움이 있다면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그러한 삶은 곧 잠 속에서 꿈을 꾸는 것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깨어 있든지, 아니면 깨어 있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깨어 있든지’ 아니면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깨어 있음’이 내맡김과도 맥(脈)을 같이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이러한 이해가 공유 되었기에 자기와 자신의 삶을 진리에 내맡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수행자들은 진리(眞理)를 늘 대상화(對象化) 시켜 왔기 때문에,
이 ‘내맡김’에 대해서 늘 거부감이 있다는 겁니다.
이 ‘내맡김’에 대해서는 점진적으로 보충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무엇이 이 ‘깨어 있음’만큼 역동적일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 말로 대자유(大自由)
아니겠어요? 원하는 것도 없고, 부족함도 없고, 걸림도 없고, 어떤 조건도 필요
하지 않는, 이 이상의 어떤 역동성(力動性)과 자유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꿈은 잘 때 꾸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꿈을 꾸든지 간에 그것은 전부 다 무의식적인 것이다.’
 
깨어나야 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의식의 주인(主人)으로서 의식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의식적으로 삶을 산다고
하는 자체가 그렇게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이 삶이 전부 꿈이라고 하는데, ‘꿈이다’ 고 하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의
모든 짐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못 받아들이기에 꿈이 아닌 것이고, 꿈이
아니기에 삶 그 자체가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석가모니가 이 부분을 두고 그 어떠한 삶이라 할지라도 고(苦)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이라는 것은 왕후장상의 삶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고(苦)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지위를 가졌든, 어떤 부를 가졌든, 어떤 삶을 살든, 그러한
모든 것이 무의식적인 삶이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식적인 제가 그걸 부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사람들이 누구를 연민할 수가 있겠어요?
진짜 의식적인 사람이 무의식적인 사람을 연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깨어 있다’는 게 이렇게 이해가 다가왔잖아요.
그러면 ‘꼭 깨어 있어야 된다’ 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깨어있기 위해서 부단히 자꾸 노력을 하시라는 겁니다.
‘깨어 있든지’ 아니면 ‘깨어 있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여 부러워 할 것이 없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자기만의 꿈을 꾸고 있고, 각자가 꿈속에서 나는 ‘누구다’에 깊이 심취하여
스스로 그 꿈의 제작자임을 망각하고, 꿈속의 하나의 배역으로서 주인공으로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여한(餘恨)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가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꿈을 ‘누가’ 꾸고 있는지만 알면 그 어느 누구와 비교를 하겠습니까?
자기가 꿈꾸지 않으면 그러한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잖아요.

‘자는 자(者)만이 꿈을 꾼다.’ ‘꿈을 꾼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무의식적인 삶이다.’
잠을 잘 때 무의식적이지, 의식적일 수는 없다는 겁니다.
깨어있는 자는 절대 꿈꾸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삶에서 이루려고 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전부 다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삶, 살고 있는 삶, 살아갈 삶, 이러한 모든 것이 결국 다 무의식적인
삶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어떻게 일말의 여한이 있고, 미련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이면서 ‘자각’한다면 거듭남과 더불어 의식적인 삶이
다시 시작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나자렛 성자 예수님이 이러한 이해를 갖고서, ‘네 행사를 주께 맡겨라,
그리하면 네 경영이 이루어지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 ‘깨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내맡기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내맡기고 나면 신의 도움도, 진리의 도움도 필요가
없어요. 왜? 원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神)으로부터, 진리(眞理)로부터 의존적이지 않고, 독립하는 겁니다.
 
이 독립 한다는 부분은 추후에 일체(一體) ㅡ 하나 의 의미와 같이 보충 설명
드리겠습니다.
 
잠을 자는 것이 무의식적이잖아요. 꿈을 꾼다는 것은, 이 꿈이라 하는 것은 결국
의식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무슨 꿈을 꿉니까? ‘항상 깨어 있으세요’
 
이미 자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나는 한 사람이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 육체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내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고, 인식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것만 놓고 따져 봐도 지금의 나는 자기의 실체가 아니잖아요.
이 지금의 나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의 관점일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소위 말해서 태어나고, 살다보면, 병이 들고, 늙어지고, 죽는,
이 생로병사라 하는 것은 내가 만들어낸 하나의 관점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관점의 변형이고, 죽음이라는 것은 관점의 종지부일 뿐이지,
실재적인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은 의식적인 삶이든, 무의식적인 삶이든 그것은 전부 다 나한테 달렸잖아요.
내 선택 여하에 달렸습니다.
무의식적인 삶이라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의식적인 삶이라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니고, 그것은 결국 내 선택에 달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선택의 주권(主權)을 회복하는 순간 자기는 거듭나게 돼 있어요.
지금까지는 그것이 카르마인 줄, 운명인 줄, 뭐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냥 내 선택이었다!
이걸 아는 것이, ‘자각’ 하는 것이 지구 윤회권의 졸업(卒業)이자 최종점입니다.
‘뭔가 더 거창한 게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부 환상(幻像)이고, 환영(幻影)입니다.
 
(질문) ㅡ 영국에서 시작된 신지학(神智學)에 보면 사람의 의식, 사람의 정신을 여러
단계로 나눠놨어요.
‘아스트랄체, 멘탈체, 코스믹체, 니르바닉체, 아디체’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인간 정신(情神)의 정체성(正體性)과 위대함을 안다면, 사람의 정신은 그러한
단계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인간 정신의 정체성이 품고 있는 무한 자유, 무한 가능성, 무한 다양성, 무한
창조성이, 어떤 단계, 어떤 과정, 어떤 층, 어떤 섹터, 이런 걸로 어떻게 나눠질
수가 있나요? 다시 말해서 그렇게 단계를 나눴다고 하는 자체가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전혀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신이 모든 걸 다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드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에 의해서 정의되고, 규정되어질 수 있을까요?
 
그러니 한번 보세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안다면 절대 그런 어떤 의식의 섹터, 의식의 단계, 이런
규정에 사람의 정신이 갇히질 않아요. 아니, 어떻게 자유가 구속에 갇힐 수가
있어요? 구속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닌데 말이죠.
그러니 어떻게 사람의 정신을 가지고 ‘멘탈체니, 아스트랄체니’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냐는 겁니다. 그것은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지요.
 
마치 방을 하나 만들어놓고 이 허공이 방 안에 갇혔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잖아요,
이게. 어떻게 자유가 구속에 갇힐 수가 있어요?
인간 정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의식의
어떤 체계, 의식의 어떤 단계별 유형, 그런 것에 갇힐 수가 있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파헤친다고 해서 어떻게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알 수 있겠어요?
 
어떤 사람은 ‘그냥 눈으로 보면 에테르(ether)는 안 보이는데, 영안으로 보면
우윳빛깔이다.’라고 말해요. 우윳빛깔이 어떻게 안 보일 수가 있나요?
저는 물어보고 싶어요. ‘이 허공은 무슨 색깔인지?’
 
한번 보세요. 허공은 색이 없어요. 그런데 아직 과학적으로 학술(學術)되진
않았지만, 이 허공은 에테르로 일말의 빈틈조차 없이 꽉 차있습니다.
색깔이 없기 때문에 허공 안에서 모든 색깔들을 다 표현할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허공이 빨간색이라면, 우리가 보는 이런 천연적인 색깔이 드러나겠나요?
 
에테르는 모든 물질의 근간에 속하는데, 정작 색깔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모든 물질들을 다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에테르는 입자화 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에 어떤 색깔을 가질 수 없는
겁니다. 허공이 무슨 색깔인가요? 정말 이 허공은 아무 색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색을 허공 안에서 다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한번 보세요.
꿈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별개의 나입니다. 꿈속의 나가 지금의 나와
동일시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냥
동일시 할 뿐입니다. 아니, 이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왜? 모든 사람들이 밤마다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꿈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완전히 하는 일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고, 다 달라요.
그러니 꿈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어떻게 동일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마치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하고 똑같아요.
 
그런 것처럼 꿈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별개의 나라는 겁니다.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가 완전히 별개의 나 이듯이, 꿈속의 나와 지금의 나
또한 완전히 별개의 나입니다.
 
그러면 지금 한번 보세요.
꿈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히 별개의 나라면, 꿈을 꿀 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아무 연관성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말해서 지금 무의식적인 삶을 살면서 꿈을 꾸고 있다면, 깨어있는 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나와 지금의 이 삶과는 사실은 아무 연관성이 없는 거예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이해 가세요? 그러니 중요한 게 뭐가 있습니까?
 
빨리 깨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가 지금 이러한 꿈을 꾸고 있는데, 또 다른
꿈을 꾸는 이것이 중요하겠어요?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데, 해피한 꿈을 꾸는 이것이 중요하겠냐는 겁니다.
꿈을 깨는 것이 중요하지요.
 
사람들은 꿈을 꾸면서 그 꿈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똑같은 게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단지 자기가 동일시하고 있을 뿐인 겁니다.
자기가 동일시하지 않으면 그냥 한편의 영화를 본 것이고, 그 영화 속의 하나의
주인공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의 주인공을 나라고
동일시합니까? 하지 않지요.
 
그냥 영화를 본 것처럼, 그렇듯이 밤에 꾸는 꿈조차도 한편의 영화를 보는 거라고
치면, 그 꿈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별개라는 겁니다. 어떤 연관성도
없어요. 왜? 나는 ‘꿈을 꾸고, 꿈을 깨고’ 이것을 무한 반복 하고 있지만,
그 꿈속의 나는 내가 깨버리면 그냥 사라져버리는 나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렇듯이 지금의 이 무의식적인 삶, 이 꿈꾸는 삶은, 이 꿈꾸는 삶 이전에,
이 무의식적인 삶 이전에, 의식적인 나의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그냥 사라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면 ‘깨어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무의식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의식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식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사라질 나’지만 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 진실은
영원하다는 겁니다.
오늘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신 분들은 ‘진짜 깨어 있어야 된다.’
‘깨어있지 못할 지라도, 깨어 있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셔야 된다.’
 
이것이 오랜 세월 전 지구적으로 몇 안 되는 성자들이 이야기한 ‘깨어 있어라’
참 뜻입니다.
 
알았으면 이제 이해 속으로 들어가셔야 돼요. 자기가 이해했는지, 안 했는지
저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진짜 이해하신 분은 그쪽으로 움직이게
돼 있어요. 그러니 이 이해라 하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힘과 같은 겁니다.
자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하나의 앎과 다를 바 없어요.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고, 아니 얼마나 보편적인 이야기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꿈을 꾸고 있고, 다 잠을 자고 있고, 모든 사람들한테 다 적용
되는 이야기잖아요. 어떤 특정 종교인이라 해서 이 이야기를 피해갈 수 있나요?
어떤 특정 지성인이라 해서, 어떤 특정한 학자라 해서 이 이야기를 피해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밤에 꿈꾼 것을 가지고 그 다음날 깨어나서 회상(回想)해보면, 그냥
한편의 영화를 본 것과 같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을 나라고 여깁니까?
 
물론 그 꿈 안에서는 주인공이었겠지요. 어떻게 그게 나가 될 수 있어요?
그 나는 내가 꿈을 깨버리면 사라질 나지만, 꿈을 꾸고 있는 나는
‘꿈을 꾸었다, 깨었다’ 무한 반복을 할 수 있는 나잖아요.
 
그러니 꿈속에 사라진 나는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별개의 나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나라는 것도 제가 꿈속의 나와 같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요? 없지요.
 
잠을 잔다는 것은, 결국 내가 무의식적인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꿈이라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무의식적인 상태가 될 때, 무의식적일 때
꿔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의식적일 때, 내가 깨어있을 때, 깨어있는 자가 무슨 꿈을 꾸나요?
그렇듯이 성자들이 이야기한 ‘깨어 있어라’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꿈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을 깨고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습니다. 그냥 존재자체만으로 모든 게 다 충족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신을 아는데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우선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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